육당의 만주답사기인 《송막연운록松漠燕雲錄》은 육당의 다른 저서들에 비해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제목에서 송松은 만주, 막漠은 몽고, 연燕 북경, 운雲은 산시(山西)를 뜻한다고 육당 스스로 말했다. 중국 사서에서 우리는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 등의 지명을 만나게 된다. 송막도독부는 당나라 태종이 거란족을 간접 지배하기 위해 내몽골에 세운 기관이었으며 연운십육주는 당나라가 망한 후 혼란스럽던 시기에 후진의 석경당이 거란에게 준 지역으로 오늘날의 북경과 산서 일대의 16개 주를 말한다. 후일 송나라는 국초부터 이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거란과 여러 차례 전쟁을 하였다. 《송막연운록》은 제목으로 보아서는 만주를 포함하여 내몽골, 베이징과 산서 지역에 관한 기록이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만주 답사기만 담고 있다.
원래 《송막연운록》은 육당이 1937년 9월 26일부터 10월 15일까지 20여 일간 만주 일대를 답사한 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84회에 걸쳐 연재한 글이다. 육당은 《시대일보》라는 일간지를 창간하여 잠시 운영하다가 재정난으로 실패하여 신문사업에서 손을 뗀 후 역사연구에 몰두하여 많은 역사 논설들을 썼다. 역사가로서 그는 답사에도 열정을 보여주었다. 전라도 일대를 답사하고 《심춘순례》(1925)를 썼으며 백두산을 답사한 후에는 《백두산근참기》(1926)를 썼다. 그런데 그는 중국과 만주 지역은 답사를 할 기회가 없었다. 마음은 간절하였는데 1937년 드디어 그 기회가 주어졌다. 조선총독부 산하의 선만척식회사가 만주의 조선인 이민촌을 방문해보라고 여행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가난한 농민들을 만주 여러 곳으로 이주시켜 농토를 개간하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남한의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은 만주 하얼빈 근처까지 진출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하였다. 이들이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을 조선총독부는 ‘안전촌락’이라 하였다. 당시 비적들의 침탈로부터 안전을 확보한 취락이라 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만주의 안전촌락 방문이었지만 육당은 이를 만주답사의 기회로 삼았다. 1937년 9월 27일 경성역(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함경북도의 청진으로 출발하였다. 대항구도시인 청진에는 러시아인들이 세운 러시아식 건축물들이 서 있었다고 한다. 청진에서 회령을 거쳐 만주의 조개선朝開線 열차로 갈아탔다. 조개선은 연길시 조양천역과 회령 건너편의 용정시 개둔산 역을 연결하는 노선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용정은 조선인들이 세운 도시이다. 육당의 말에 의하면 당시 연길을 비롯한 다섯 현에는 조선족이 다수를 차지하여 만주국에서는 그 지역을 ‘간도성間島省’이라는 특별 지구로 만들었다고 한다. 오늘날 중국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전신일 것이다. 용정에 대한 기사에 이어 제4회 기사에서는 간도間島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였다. 간도라는 지명은 두만강 근처에 살던 조선 농민들이 강 가운데 모래톱에 경작을 하기 시작하여 이를 ‘샛섬’ 즉 간도라고 한 것에서 연유하였다고 한다. 조선 농민들이 후일 두만강 건너편의 땅도 개간하면서 두만강 너머 지역을 간도라는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육당은 두만강 회령 지역이 청조의 발상지였다는 점도 지적한다.
다음 여정은 연길이었는데 이곳을 거쳐 북쪽으로 하얼빈으로 올라가지 않고 잠시 옆길로 새어 토문과 훈춘을 방문하였다. 훈춘은 조선과도, 러시아 국경과도 가까운 국경도시이다. 이곳에서 조선인들의 모임인 조선인민회를 방문하여 훈춘 동포의 애사哀史를 감명 깊게 들었다.
토문에서 나와 하얼빈까지는 발해의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육당은 발해 유적지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을 답사하였다. 발해의 오랜 수도였던 홀한성忽汗城이었다. 영토가 넓었던 발해는 오경을 두었는데 오늘날 닝안(영안宁安) 시에 위치하였던 상경 용천부가 바로 홀한성이다. 후일 청나라 때에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사람들이 이곳을 동경성이라 하였는데 원래 선양 근처의 랴오양에 누르하치가 세운 동경성이 있다. 좌우간 닝안 지역의 동경성을 둘러본 후 육당은 근처 흥륭사라는 사찰을 방문하여 유명한 발해의 석등을 보았다. 그리고 명승 경박호 관광도 하였다. 경박호는 화산이 폭발하여 흘러내린 용암이 목단강을 막아 생긴 호수이다. 일대가 현무암 지대인데 흥륭사 석등도 이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경박호 관광은 육당 혼자서 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 영사관의 부탁으로 만주국의 경찰과 헌병들이 나와 호위행렬을 이루고 따로 트럭 한 대에는 지방 유지들이 십여 명 따라나섰다고 하니 육당의 만주답사는 그 자신의 말과는 달리 사사로운 여행으로 그친 것은 아니었다.
하얼빈으로 갔을 때에도 여러 사람들이 역으로 그를 마중 나왔는데 명사로서의 대접을 톡톡히 받았던 것이다. 하얼빈은 러시아인들이 동청철도를 세우면서 건설한 도시이다. 동청철도는 러시아가 시베리아의 치타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기 위해 만든 노선으로 그 부설권을 삼국간섭의 대가로 청나라로부터 얻어낸 것이다. 하얼빈에서 러시아인의 묘지와 중국인들이 세운 공자묘 등을 둘러본 후 그는 하얼빈 북쪽에 위치한 수화綏化라는 마을을 방문하였다. 만주사변과 수해로 피해를 본 피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몇 년 전에 조성된 촌락이었는데 이곳에 250 가구가 넘는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 안전촌락의 조선인들은 교육열이 높았는데 육당은 고사古史의 예를 들면서 이들을 격려하는 강연을 하였다.
하얼빈으로 돌아가서는 하얼빈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러시아인들이 동아시아 연구를 위해 세운 동성문물연구회 건물이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현지의 고고학 유물 외에도 앞에서 말한 닝안의 동경성에서 발굴한 발해의 유물들을 보았다.
하얼빈에서는 다롄행 급행열차를 탔는데 일본이 자랑하는 유명한 ‘아시아호’였다. 700km를 12시간에 돌파하는 속도를 자랑하는 특급 급행열차였다. 그러나 이 열차보다도 육당에게 더 인상적인 것은 북만주의 광활한 평원이었다. 어디나 산이 보이는 곳에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산이 보이지 않는 만주벌판은 큰 인상을 남긴다. 육당은 이런 북만주벌판을 ‘천지간의 일대장관’이라 하였다.
연이어 창춘을 방문하였는데 이 도시도 하얼빈이나 다롄처럼 신도시였다. 당시 만주국의 수도로서 신경新京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렸다. 창춘에서 길림시를 거쳐 선양에 도착하였다. 당시에는 봉천奉天이라 하였는데 육당의 발길은 유명한 북릉北陵뿐 아니라 시내에 있는 박물관으로도 향했다. 당시 만주국의 유일한 박물관으로서 열하성熱河省 주석 탕위린의 저택을 빼앗아 만든 것이라 한다. 당당한 3층 양옥 건물이었는데 열하성에서 가져온 유물이 많았다.
박물관 방문 후 청나라 초기 궁전이었던 성경고궁을 둘러본 후 청조실록을 보관하는 숭모각, 그리고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보관하고 있는 왕실도서관인 문소각文溯閣을 방문하였다. 사고전서는 건륭제(재위 1735-1796)가 중국의 중요한 전적들을 경經, 사史, 자子, 집集으로 나눠 수집, 간행한 도서들이다. 네 부류의 책들을 각각의 서고에 보관한다고 해서 사고전서라는 명칭이 붙었다. 육당은 이어서 선양의 북탑이 있는 법륜사, 도교사원인 태청궁, 회교사원인 청진사를 방문하였다. 종교에도 관심이 많은 육당이 이런 여러 종교의 대표적 사원들을 놓칠 리 없다.
선양에서 고구려 요동성이 있었던 곳은 멀지 않다. 오늘날의 랴오양시로서 전국시대 연나라가 이곳에 요동군의 치소를 두었다. 당시에는 양평襄平이라 하였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13층이나 되는 높은 백탑이 있는데 그 백탑 주위를 백탑공원이라는 이름의 공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옛 양평 고성의 유적지라는 표지판을 그곳에서 볼 수 있다. 조선의 연행사들은 북경으로 가는 길에 요동벌판에 서 있는 이 탑을 보고 감격하여 많은 시문을 남겨놓았다. 육당은 18세기의 홍양호, 박지원 심지어 최근의 인물인 김윤식이 백탑을 보며 지은 시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요양 근교에 있는 유명한 천산千山도 방문하였다. 많은 기암괴봉들이 있어 그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랴오양에서 남쪽으로 기차를 타고 가다 해성(海城:하이청)을 지나며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기에 지난 요택遼澤, 그리고 요동평원의 젖줄인 요하를 생각하였다. 물론 요하를 보기 위해서는 하이청에서 지선열차를 타고 가야 하였다. 요하가 역사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육당은 요하의 근원과 그 여러 지류들에 대해 《수경水經》, 《한서》 지리지, 《문헌통고》 등 여러 지리서와 역사서들을 인용하며 서술한다. 우리는 여기서도 육당의 엄청난 지식을 확인할 수 있다.

영구營口에서도 조선총독부를 통해 이주한 조선농민들이 정착한 촌락을 방문하여 강연을 하였다. 원주민들이 버리고 간 농토를 일궈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조선농민들이 만주대륙 발전에 기여하고 있으며 이러한 발전이 민족 발전의 선구가 된다는 요지로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요동벌판에 대한 서술이 이어진다. 요동벌판은 북경으로 가는 연행사들이 지나는 곳이 아니던가? 육당은 조선광문회를 통해 고전사업을 한 적이 있어 그런지 유득공, 박제가, 박지원, 홍양호 등 조선 후기 학자들의 글들을 종횡무진 인용한다.

마지막으로 개평蓋平(오늘날에는 개주蓋州로 개명되었음)를 거쳐 요동반도로 들어가는데 개주 지역에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이 있었을 것이라 한다. 그리고 당태종이 공격에 실패하여 원정을 포기하고 돌아가게 되는 결정적 전투가 있었던 안시성이 개평 근처 탕지湯池에 있었다고 한다. 안시성 전투를 지휘한 고구려 성주 양만춘과 안시성에 대한 정몽주, 이건창, 김정희 등 조선의 여러 학자들 글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일본의 대륙진출의 기지 역할을 하는 다롄(大連)에 도착하였다. 다롄은 1898년 러시아가 삼국간섭의 대가로 청나라와의 협약을 통해 조차지로 얻은 곳으로 이곳에 군항과 상업항구를 만들기 위해 시가지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곧 러일전쟁이 벌어져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는데 일본의 만철(만주철도주식회사)가 이곳에 본부를 설치하고 대규모 개발에 나섰다. 육당이 방문했던 당시 인구는 이미 40만에 달했는데 중국인과 일본인이 반반씩 차지하고 조선인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뤼순(여순旅順)은 이 다롄의 끝에 위치한 한 구이다. 육당은 다롄에 간 김에 뤼순에 대한 문헌을 찾아보았다. 발해 때는 거란이 서쪽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발해에서 당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압록강 하구로 내려와 해로를 통해 가야했는데 뤼순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뤼순이라는 지명은 원대부터 문헌에 나타나는 바 우리나라 학자들의 글에서는 정몽주와 권근의 글에 그 지명이 보이기 시작한다.
《매일신보》에 연재한 《송막연운록》은 이렇게 요동반도 끄트머리인 뤼순에 대한 글로 끝이 난다. 뤼순은 1910년 안중근이 처형된 뤼순감옥이 있던 곳이다. 신채호 선생도 이곳에서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6년 2월 순국하였다. 육당이 만주기행을 하던 때로부터 불과 1년 10개월 정도 앞선 일이다. 《송막연운록》에는 이러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