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전망에서 본 동서양 문명의 만남
김현일 (인문사회과학부)
1.
서양 문명이 근대 세계를 주도해왔다는 것이 근대 세계사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였다. 서양과 동양 — 여기서 동양은 동아시아로 한정해서 생각하자 — 의 만남은 16세기 대항해 시대의 개막과 함께 동아시아로 배를 타고 온 서양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포교와 다른 한편으로는 동양과의 무역을 원했다. 하지만 근대 초 이들이 바라는 바는 크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마테오 리치를 위시한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포교활동 — 문화적 접근 방식을 통한 포교 — 이 한 세기 반 이상 이루어졌으나 기독교가 중국 땅에서 뿌리내리지 못했다. 일본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상당히 늘어났으나 곧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기독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으며 기독교는 금지되었다. 무역활동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중국은 조공무역의 원칙에 입각한 광동무역체제를 서양인들에게 허용하였을 따름이며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정책을 취했다. 단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만 제한적인 교역을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서양과의 무역활동이 중국과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이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던 조선의 경우 마카오와 나가사키를 잇는 무역로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서양 상인들과의 접촉은 없었다. 조선은 또 철저한 성리학적 세계관 (華夷觀)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서양 선교사들의 포교 역시 불가능하였다. 조선과 서양의 접촉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한문으로 저술하거나 한문으로 번역한 서적들을 통해 이뤄졌다.
물론 16-18세기 동서양간의 접촉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서양 상인들을 통해 새로운 식물들이 이 시기에 도입되었던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감자, 담배, 고추) 또 아메리카의 은이 대거 중국으로 유입되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동서양간 교류는 물자의 교류에 그치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네덜란드인들과의 접촉을 통한 난학(蘭學)의 발전은 19세기 후반 일본의 근대화에 큰 밑천이 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은 나가사키라는 작은 창을 통해 서양의 지식을 흡수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 이 나라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긴 지속적인 영향은 무엇이었을까?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천문역법과 수학, 지리적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세계관 자체를 변화시키거나 중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식이 뿌리 깊이 내려 있어 서양을 배우려는 의지가 박약하였던 이다. 오히려 마테오 리치를 위시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한역서적은 조선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18세기말 조선 천주교회가 자생적으로 출현하였다. 정약용 형제들과 그 인척들이 중심이 된 일부 양반 가문의 청년들이 서학 서적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특이하게 자생적으로 출현한 조선 천주교회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낳은 예기치 않은 결과였다.
근대 초의 동서양 만남에서 서양이 동양에 일방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서양 역시 동양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계몽주의이다. 계몽주의 시대 서양의 사상가들은 중국의 정치체제를 이상화하였다. 이들은 중국의 정치체제를 플라톤의 철인정치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잣대를 당시의 유럽 절대군주정이라는 현실비판에 이용하였다. 계몽사상가들의 중국 찬미로 중국풍이 일시적으로 유행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근대 초 동서양간의 교류가 동서양 문명 자체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아직까지 그 교류의 충격은 제한적이었다. 동서양 문명간의 접촉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와서 양적으로 뿐 아니라 질적으로 폭발적으로 확대되면서 엄청난 역사적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바로 동아시아의 근대화가 그것이다. 동아시아의 근대사는 서양 제국주의의 충격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동서양간의 접촉의 양상은 예전 시기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 예전에 서양인들은 무력으로 기독교와 무역활동을 강요할 수 없었다. 하지만 18세기 말, 19세기 전반의 산업혁명을 겪고 난 후 서양인들은 범선이 아니라 대포를 장착한 윤선(기선)을 타고 도래하였다. 힘의 관계가 서양으로 기울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서양인들의 요구는 광포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제국주의가 바로 그것이었다.
2.
서양제국주의의 예봉을 맞은 것은 중국이었다. 중국은 1793년 무역활동의 확대를 요구하는 영국의 요구를 일축한 바 있다.(매카트니 사절) 영국은 아편무역 문제로 일어난 전쟁에서 중국을 굴복시키고 중국에게 개항을 요구하였다. 1842년의 난징조약은 중국에 대한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의 문을 연 조약이었다.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서양 제국은 조약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으려는 중국을 군사력으로 굴복시켰다. 소위 제2차 아편전쟁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는 200 척 이상의 군함을 동원하여 북경을 점령하였다. 1860년 천자의 국가인 중국의 수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조선과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1)
영국이 주도한 중국에 대한 불평등 조약체제의 확립시기(1840-1860)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두 가지가 일어났다. 하나는 미국에 의한 일본의 개항이며(1854년 가나가와 조약) 다른 하나는 러시아의 만주 진출이다. 17세기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의 남하와 동진은 엄청난 규모의 영토를 러시아에 안겨주었다. 러시아는 바로 서양 열강들의 중국 침략이 진행되던 이 시기에 중국에 대한 침략에 동참하였다.(1860년에 러시아는 중국으로부터 연해주 지역을 얻었다)
동아시아 제국주의 시대의 특징은 서양 제국주의의 위협에 직면하였던 일본이 얼마 있지 않아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합류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가나가와 조약으로 미국에 문호를 개방한 후 유럽 국가들에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개항을 둘러싼 대외문제는 일본의 일부 번(藩)들로 하여금 막부에 반기를 들게 만들었다. 사쓰마와 초슈 두 번을 중심으로 한 반막부 세력이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신속하게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서양 제국주의를 모방하여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그 결과 조선과 중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먼저 조선을 놓고 중국과 전쟁을 벌여 중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부정하였다. 또 일본은 조선과 만주를 놓고 러시아와 경쟁을 하게 된다. 이것이 동아시아 제국주의 시대의 주요한 특징이었다.
3.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발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에 의한 서양인들에 대한 테러(일본인들은 이러한 사무라이들을 ‘志士’라고 부른다)과 같은 비조직적인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중국의 구교(仇敎) 운동이나 의화단 반란처럼 조직화된 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중국의 구교운동은 서양 선교사와 교민들에 대한 공격을 말한다.2) 구교운동은 서양 제국주의를 물리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압박을 강화하고 그 결과 중국은 더 많은 이권을 제국주의 국가들에 빼앗겨야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의 일부 사무라이들의 서양인 공격이나 중국의 구교운동이나 무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의화단의 운동은 속성상 구교운동에 속하기는 하지만 일부 집권세력의 노골적인 지원을 받았다는 면에서 일반 구교운동과는 차이가 난다. 당시 실권을 쥐고 있었던 서태후는 의화단의 난을 서양인들을 몰아낼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 역시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열강의 군사력 앞에 중국의 군사력은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의 경우에는 개항 이전에는 서양과의 어떠한 접촉도 거부하는 단호한 쇄국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통상조약 이후 조선 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개항 이후의 조선에서의 반제국주의 운동으로는 두 가지 운동이 눈에 띈다. 하나는 동학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유생들의 주도에 의한 의병운동이었다. 갑오년에 혁명세력화한 동학은 일본 제국주의를 명백한 적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정부군과 일본군에 의해 패주한 동학은 1900년대 초에는 제3대 교주 손병희의 지도 아래 그 성격을 완전히 전환하였다. 반서양적인 성격을 탈피하고 문명개화를 내세웠던 것이다.
조선말의 의병운동은 성리학적 이념을 고수하던 유생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화서학파에 속한 사람들이다. 1895년 을미의병을 일으킨 제천의 유인석은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그의 많은 문하생들이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다. 을사보호조약이 일어난 직후인 1906년 전라도 태인에서 거병한 면암 최익현도 화서 이항로의 제자였다. 화서학파의 사람들은 서양과 기독교, 그리고 더 나아가 당시의 개화정책에 대한 자신들의 분명한 반대 입장을 글로써 잘 남겨놓았다.3)
이항로의 고제로서 19세기 말 현실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최익현의 논리를 살펴보자. 세상에는 중화와 이적의 차이가 있다. 중화는 성인들이 나와 전장과 법도를 세워 찬란한 꽃을 피운 곳이다. 이적들은 “천지의 지극히 치우친 곳”에 사는 자들로서 이들이 사는 곳은 산천과 풍기 또한 고르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곳에 사는 자들은 정대한 면은 적고 교사(巧詐)가 많다. 그리고 이들은 오로지 기기(汽器)만을 숭배하며 잔인하고 방자하다. 이적들은 금수와 같은 존재이며 모두 성인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의 기술이란 것은 “누에가 실을 뽑고 벌이 꿀을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기술을 보고는 미혹되어 “요순과 삼왕의 법보다 낫다”고 하며 그것을 개화와 문명이라고 한다. 면암이 보기에 개화정책을 추진한 자들은 임금을 오도하고 소중화의 전통을 저버린 역적들이다.4)
이러한 전통적 사상에 입각해 있던 조선말의 의병운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의병운동의 이념적 기반도 차츰 근대적 세계 앞에서 영향력을 상실해갔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서양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제국주의의 위협을 물리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에 섰던 사람들 즉 서양 문명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서양을 배움으로써 근대화를 추진한 사람들의 노력을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4.
19세기 동양의 근대화 경로를 살펴보면 서양을 알고 배우는 것이 근대화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서양은 압도적으로 우월한 무기와 선박, 기계, 기술, 과학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동양 사회를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문물을 도입하고 모방하는 것이 유일한 방안이었다. 당시에 이러한 방안 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즉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하느냐 아니면 근대화를 거부하느냐 하는 선택 밖에 없었다. 이것이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동아시아가 처해 있던 역사적 상황이었다. 19세기 동양이 서양을 배우는 길 — 이를 마루야마 마사오는 ‘근대화의 첫걸음’이라고 하였다 — 은 구체적으로 외국인 전문가 초빙, 유학생 파견, 시찰단 그리고 번역작업이었다.5) 이 네 가지 방안에서 일본은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중국과 조선은 무척이나 느리고 서툰 모습을 보였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서양 배우기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 국가가 다른 문명을 배우기 위해 이러한 집단적 노력을 기울인 경우는 역사상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이는 일본이 신속하게 근대화하고 강대국의 하나로 발전하는 결정적 기반이 되었다. 일본이 서양 배우기에서 중국과 조선과는 얼마나 달랐던지 몇 가지 예들을 통해 알아보자.
일본은 먼저 서양의 학문을 번역을 통해 흡수하였다. 한 사회가 다른 문명에 속한 사회로부터 배우는 데에는 번역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메이지 시대는 진정 ‘번역의 시대’였다. 너무나 많은 번역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 수천 권에 달했다 — 이러한 번역서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책도 나왔다.(“譯書讀法”, 1883년)
서양을 배우겠다는 일본인들의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는 시찰단에서도 드러났다. 도쿠가와 막부도 개항 후 여러 차례 사절단을 구미에 파견하였지만 메이지 유신 후인 1872-1873년간의 이와쿠라 (岩倉) 사절단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사절단에는 놀랍게도 정부의 주요한 책임자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으며 —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 사절단의 수도 100 여명에 달했다. 이 사절단은 무려 21 개월 동안 미국과 서양 여러 곳을 돌며 사회와 제도를 시찰하고 조사하였다. 귀국 후에는 모두 다섯 권에 이르는 보고서(“歐米回覽實記”)가 간행되어 일반에게 자세한 서양 사정을 알렸다. 사절단원들은 시찰을 통해 서양과 일본의 엄청난 격차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당시 일본 정부 내에서 격론이 벌어지고 있던 정한론에 반대하고 일본은 근대화에 매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6)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과 비교되는 것이 조선의 신사유람단(1881년)이었다. 신사유람단은 당시 개화에 대한 반대세력 때문에 비밀리에 사찰을 떠났으며 보고서도 공개되지 않았다.7)
또 하나 일본이 서양문물의 도입에서 이용하였던 것은 외국인 전문가들의 초빙이었다. 무려 수천 명에 달하는 외국인들을 초빙하여 많은 근대적 제도를 수립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교육, 법, 외교, 철도건설, 전신, 토목사업, 농학, 우편사업, 육군과 해군 건설 등 다양한 부분에 배치되었다. 메이지 시대 초빙 외국인들은 근대화의 주요한 통로였던 것이다.8)
5.
동아시아는 근대화에서 성공한 지역으로 꼽힌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 대만은 근대 산업국가로 변모하였다. 현재는 거대한 중국이 그러한 변모의 과정에 돌입하였으며 맹렬한 속도로 전진하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 물결은 동남아시아에도 그 여파가 확산되었다. 동아시아 지역의 성공적인 근대화는 서아시아 지역에 위치한 이슬람권의 실패와 뚜렷이 비교된다. 이슬람권은 동아시아보다는 서양문명과 훨씬 일찍부터 접촉을 유지해왔다. 그렇지만 근대화의 과정에서는 뒤지고 있다. 이 두 문명을 비교해 볼 때 한 가지 뚜렷한 점이 눈에 띤다. 동아시아는 근대화에 장애가 되는 전통적 이념체계를 버렸던 반면 이슬람권은 그 종교를 핵으로 한 이념체계를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화적 차이가 이 두 지역 근대화의 성공여부를 결정지었던 결정적 요인이었던가?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보건대 그럴 가능성은 높다. 특히 비서양 지역의 근대화가 어느 정도 서구화를 의미하고 또 서구화를 수반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문화적 저항 — 이는 문화권마다 다르다 — 이 근대화의 성공여부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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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수운의 “동경대전” 가운데 ?논학문?에서도 이러한 충격이 엿보인다.
2) 구교운동에 대해서는 貝塚茂樹 외, “중국사” (윤혜영 편역, 홍성사, 1986) 제 17 장에 훌륭하게 요약되어 있다. .
3) 화서 학파의 사상에 대해서는 국사학계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편이다. 몇몇 연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영섭, “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1999) 강대덕, “화서 이항로의 시대인식” (신서원, 2001)
4) 1898년 음력 10월 9일의 再疏, “국역면암집” 1권 158-184쪽.
5)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슈이치, “번역과 일본의 근대” (임성모 역, 이산, 2000) 25쪽.
6) 마리우스 잰슨, 앞의 책, 84-112쪽.
7) 소위 ‘신사유람단’에 대해서는 허동현의 논문 참고할 것. ?조사시찰단(1881)의 일본경험에 보이는 근대의 특성?, “개화기 한국과 세계의 상호이해” (국학자료원, 2003)
8) 죤 홀, “일본사” (박영재 역, 학민사, 1986), 326쪽.
9) 미국의 저명한 경제사가인 D. Landes 의 입장이 그것이다. The Wealth and Poverty of Nations. Why some are so rich and some so poor? (Norton, 1999) 물론 좌파들은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글: 김현일(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