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의 『조선상고사』와 역사인식
– ‘총론’ ‘수두시대’ ‘삼조선 분립시대’를 중심으로
사회과학부 김철수 (136. 7. 25.)
Ⅰ.
가장 어려운 시대, 갖은 역경을 헤치며 민족의 얼을 역사에 아로새긴 인물, 신채호! 그는 한국인의 정신을 일으켜 세운 사상가이자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민족의 길을 밝혔던 몸소 실천한 혁명가이다. 언론인이었고 근대의 대표적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민중 혁명가였다.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역사가 있고, 정신이 생동하는 역사가 있으면 그 민족은 반드시 일어섬을 굳세게 믿고 있었던 단재 신채호였다. “성스러운 역사여! 위대한 역사여! 일곱 겹 여덟 겹으로 된 화려하고 장엄한 누각으로 한 나라의 강산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하는 것이 역사가 아닌가! 천 번 만 번 많은 향기와 하늘의 도움으로 한 나라와 민족을 소생시키고 깨닫게 하는 것이 역사가 아닌가!”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 한 신채호이다.
‘한민족, 우리는 누구인가’. 증산상제께서는 “조선국 상계신(환인) 중계신(환웅) 하계신(단군)이 몸 붙여 의탁할 곳이 없나니 환부역조하지 말고 잘 받들 것을 글로써 너희들에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노라”(『도전』 5:347:15)고 질타하고 있다. 조선국의 국조 삼신(삼성조)인 환인 환웅 단군 세 분 뿌리역사시대가 망각되어 버려 삼성조가 의지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 역사의 뿌리조상들이 이 땅의 강토에서 망자의 혼이 되어서 떠돈다. 주변 강대국의 시퍼런 칼날에 의해 완전히 잘려나간 뿌리 역사, 아니 그보다 우리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빚어진 ‘뿌리가 사라진 역사’ ‘동강난 역사’에 대한 질책이다.
주인의식을 잃어버린 역사, 피를 토하며 엎어 쓰러져도, 아니 칼을 물고 자진해도 시원찮을 역사이다. “한민족은 환국–배달–조선의 삼성조 시대가 지난 후 열국시대 이래 중국 한족(漢族)과 일본에 의한 상고(上古) 역사의 왜곡으로 민족사의 뿌리가 단절되어 그 상처가 심히 깊더니.”(『도전』 1:1:7) 지금도 우리는 그러한 역사왜곡, 더구나 단재 신채호가 강조하였던 고구려와 발해사의 왜곡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동방역사의 주체민족인 우리 한민족의 뿌리문화의 실체를 바르게 아는 것이야 말로 가을개벽의 정신인 원시반본과 보은의 첫째 실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단재 신채호! 그는 상처뿐인 우리 역사에 눈을 뜨게 해준다. 신채호를 모르는 한국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그는 1880년 11월 7일 대전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성균관에 들어갔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1907년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 등에 가입․참가하고, 1909년 일진회 성토에 앞장섰다. 1910년 4월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안창호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였다. 그 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의 단장을 맡기도 하였고, 베이징[北京]에서는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지도했다. 1928년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했다.
신채호는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정신에 입각하여 적과 타협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견해가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 외에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사론』 『이탈리아 건국삼걸전』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동국거걸』 『최도통전』 등이 있다.
Ⅱ.
단재의 고대사 연구는 『독사신론』(1909)의 발표에서 『조선상고문화사』 및 『조선상고사』 저술이 중심이 된다. 이 가운데 마지막에 발간된 『조선상고사』는 1931년 조선일보 학예란에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것을 1948년 종로서원에서 『조선상고사』로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은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까지를 서술하고 있으며, 모두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론, 수두시대, 3조선분립시대, 열국쟁웅시대 대 한족 격전시대, 고구려전성시대,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고구려․백제의 충돌, 남방제국 대 고구려 공수동맹(攻守同盟), 3국혈전의 시작, 고구려의 수(隋)에 대한 전역(戰役), 고구려의 당(唐)에 대한 전역,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으로 각 편이 구성되어 새로운 역사이념과 인식체계를 제시하여 고대사연구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조선상고사』의 앞 부분을 이루는 주요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
먼저 역사에 대한 정의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 활동 상태의 기록이다. 무엇을 ‘아’ 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서 있는 자를 아라 하고, 그 밖의 것은 비아라 한다.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잦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쉴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다음은 지금까지 역사서의 결점에 대한 지적이다. “역사란 머리에 쓴 말과 같이 시간적 공간적 발전으로 되어오는 사회 활동 상태의 기록이므로 때[時] 곳[地] 사람[人] 세 가지는 역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큰 원소가 되는 것이다.” 이게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신채호에 따르면, “이것은 지극히 명백한 이치인데도 기왕의 조선의 역사가들은 매양 그 짓는 바 역사를 자기 목적의 희생으로 만들어서 도깨비도 떠 옮기지 못한다는 땅을 떠 옮기는 재주를 부려 졸본(卒本:고구려가 처음 개국한 압록강 북쪽)을 떠다가 성천(成川) 혹은 영변(寧邊)에 갖다놓으며, 안시성(安市城:만주 遼東에 있는 고구려의 성)을 떠다가 용강(龍岡)혹은 안주(安州)에 갖다놓으며, 아사산(阿斯山:단군이 國部를 옮긴 곳)을 떠다가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을 만들었다”고 통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역사서들은 압록강 이내의 이상적 강역을 획정는가 하면(『아방강역고』), 승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는 불법이 단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은 왕검시대부터 인도의 범어(梵語)로 만든 지명․인명이 가득하며, 유가(儒家)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유가 경전의 문구가 관용어처럼 외워진다. 중국 역사책인 『삼국사』 열전에는 중국을 유학한 최치원만 세세히 서술하였다. 이렇게 “역사를 지어 자기의 편벽된 신앙의 주관적 심리에 부합시키려 하며, 심한 경우에는 사람[人]까지 속여 신라의 금왕(金王)을 인도의 찰제리종(刹帝利種:왕족)이라 하며(『삼국유사』), 고구려의 추모왕(鄒牟王)을 고신씨(高辛氏:五帝의 한 사람)의 후손이라 하며(『삼국사기』), 게다가 조선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서운관(書雲觀:觀家臺)의 책들도 공자의 도(道)에 어긋난다 하여 불태워버렸다.”
그러면 신채호의 ‘진정한 조선의 상고사’는 무엇인가.
역사에 처음 보이는 환국(桓國)은 광명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대개 조선족이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나와 불함산(不咸山. 현 백두산)의 수림(樹林)을 광명신의 서숙(棲宿)으로 알아, 그 부근의 토지를 ‘조선(朝鮮)’이라 칭하였다. ‘조선’도 고어의 광명이란 뜻이다. 조선족이 자신들의 터전을 개척하는 동시에 일대 공동의 신앙이 유행하니 단군(壇君)이다. 이후 각지로 뻗어나간 조선족은, 각기 거주지 부근에 수림을 ‘수두’라 하니, ‘수두’는 신단(神壇)이란 뜻이다. 매년 5월과 10월에 ‘수두’에 나아가 제사지내고, 1인을 뽑아 제주(祭主)를 삼아 ‘수두’의 중앙에 앉히어 ‘하느님’ ‘천신’이라 이름하였다. 전쟁이나 혹 기타 대사가 있으면 비록 5월 10월이 아니라도 소를 잡아 ‘수두’에 제하고 소의 굽으로써 길흉을 점하였다. 이는 중국의 팔괘, 음양의 기원이 되었다.
적이 침입하면 각 ‘수두’ 소속의 주민들이 연합하여 이를 방어하고, 가장 공이 많은 마을의 ‘수두’를 제 1위로 존숭하여 ‘신수두’라 이름하니 ‘신’은 최고최상을 의미하고, 기타의 각 ‘수두’는 그 아래 부속한다. ‘소도(蘇塗)’는 수두의 음역이며 ‘신수두(臣蘇塗)’는 ‘신수두’의 음역이고, ‘진단(震壇)’의 ‘진’은 ‘신’의 음역이며 ‘단’은 ‘수두’의 음역이다. ‘단군(壇君)’은 곧 ‘수두하느님’의 의역이다. 그러므로 신수두의 단군은 대단군이다.
『사기』 ‘봉선서’에 “三一神은 天一 地一 太一이니, 三一의 中에 太一이 最貴”이며 “五帝(東西南北中 五方의 神) 太一의 佐”라 하고, ‘진시황본기’에 “天皇․地皇․泰皇의 三皇中에 泰皇이 最貴”라 하며, 『초사』에 ‘東皇太一’의 노래 이름이 있고, 『한서』 ‘예문지’에 ‘泰一雜子’의 서명이 있으니, ‘삼일신’과 ‘삼황’은 곧 『고기』에 기록한 ‘삼신(三神)’ ‘삼성(三聖)’ 등과 같다. ‘삼일신’을 다시 우리 고어로 바꾸면, 천일(天一)은 ‘말한’이니 상제(上帝)를 의미한 것이오, 지일(地一)은 ‘불한’이니 천사(天使)를 의미한 것이며, 태일(太一)은 ‘신한’이니 ‘신’은 최고최상(最高最上)이란 말이니 ‘신한’은 곧 ‘천상천하 유일함’을 의미한 것이다. ‘말한․불한․신한’은 이두자로 ‘馬韓․卞韓․辰韓’이라 적으며, 순서로 말하면 ‘말한’이 ‘불한’을 낳고 ‘불한’이 ‘신한’을 낳았으니, 권위로 말하면 ‘신한’이 신계(神界)와 인계(人界)의 대권을 쥐고 ‘말한’과 ‘불한’보다 최귀(最貴)한 고로, “三一中에 太一이 最貴”라 함이다. ‘신가’가 5 ‘가’(五帝)의 수위임은 ‘신’의 어의로 말미암아 명백하니 삼신․오제는 곧 왕검의 제작한 전설이다.
대단군 왕검이 삼신․오제의 신설(神說)로써 우주의 조직을 설명하고, 그 신설에 의하여 세상의 일반 제도를 정할 새, ‘신한’과 ‘말한’․‘불한’의 삼 ‘한’을 세워, 대단군이 ‘신한’이 되니 ‘신한’은 곧 대왕이요, ‘말한’과 ‘불한’은 곧 좌우의 양 부왕이니 ‘신한’을 협조하는 자이다. ‘삼경(三京)’을 두어 삼 ‘한’이 분주(分駐)하며, 삼 ‘한’의 밑에 ‘돗가․개가․소가․말가․신가’의 5 ‘가’를 두고, 전국을 동서남북중 ‘오부(五部)’에 나누어, 5 ‘가’가 중앙의 5개 국무대신이 되는 동시에 오부를 나누어 다스리는 5개의 지방장관이 되고, ‘신가’는 5 ‘가’ 수위가 되며, 전시에는 오부 인민으로써 중․전․후․좌․우의 오군(五軍)을 조직하여 ‘신가’가 중군대원수(中軍大元帥)가 되어 출진한다. 오늘날 윷판이 곧 오(5) ‘가’의 출진도이다.
지금까지 역사에는 이러한 삼조선 분립사실이 빠졌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라 하더라도 ‘단군, 기자, 위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조선은 ‘신․불․말’ 삼‘한’이 분립한 것이다. 여기서 ‘한(韓)’은 국명이 아니라 王이란 뜻이다. ‘삼한(三韓)’은 삼조선을 나누어 거느린 세분의 대왕이다. ‘신한’은 대왕(大王)이고 ‘불․말’ 한은 부왕(副王)이며, 삼‘한’은 세곳의 수도[三京]에 있어 조선을 통치하였다. 삼조선은 곧 삼 ‘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의 뒤는 ‘신조선’, ‘말한’의 뒤는 ‘말조선’, ‘불한’의 뒤는 ‘불조선’이라 한 것이며, ‘신․불․말’ 삼 ‘한’은 이두문으로 ‘辰․馬․卞’ 삼한이라 적은 것이고, ‘신․불․말’ 삼조선은 이두문으로 ‘眞․莫․番’ 삼조선이라 적은 것이다. 삼한의 수도는 ①‘스라’, 지금의 하얼빈과 ②‘아리티’, 지금의 개평현 동북 안시성의 옛터와 ③‘펴라’, 지금의 평양이다. 강역의 윤곽도 대개 지금 봉천성의 서북 동북, 즉 지금의 길림․흑룡과 연해주의 남단은 ‘신조선’이며, 요동반도는 ‘불조선’이고, 압록강 이남은 ‘말조선’이다. 그러나 전쟁의 시기에 고정된 강역은 없었을 것이다.
삼조선이 분립한 이후, 어느 때는 다시 신조선․말조선․불조선이 연합하여 지금의 몽고 등지를 쳐서 선비(鮮卑)를 정복하고, 연(燕)을 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연나라가 세력을 키워 ‘신조선’과 ‘불조선’을 침범하면서 세력이 미약해졌다. 이에 처음 수도를 평양으로 한 ‘말조선’은 신․불 양조선이 흉노와 중국으로부터 수차 침략을 받아 북방의 풍운이 급박함을 보고 난을 피해 남방의 월지국(月支國)으로 천도하여 국호를 ‘말한’(馬韓)이라 바꾸었다. 월지국은 지금의 공주 부근으로 추정된다.
마한이 월지국으로 천도한 뒤에 평양에는 이른바 ‘낙랑국’이 들어선다. 마한은 북방에서 중국과 흉노의 난을 피해 마한으로 들어오는 신․불 양조선의 유민이 날로 많음으로, 마한이 지금 낙동강 연안 오른쪽에 ‘신조선’ 유민을 살게 하고, ‘진한부’라 이름하고, 또 불조선 유민에게도 주어 ‘변한부’라 칭했다. 변한에는 신조선 유민들도 함께 섞여 있어 ‘변진부’라고도 칭하였다. 이것이 ‘남삼한’이다. 이것 또한 삼신 수를 채운 것이며, 북삼한의 중심주권자는 ‘신한’이었으나 남삼한은 마한이었다.
역사학자들이 다만 진수의 『삼국지』 ‘삼한전’의 삼한, 곧 남삼한을 근거하여 그 강역을 결정하려 했다. 삼한의 명칭과 유래 그리고 삼한의 체제의 변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북방 원래의 삼한도 발견치 못하고 남삼한의 상호관계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 ‘한’은 원래 천일․지일․태일의 삼신설에 의하여 말한은 천신의 대표, 불한은 지신의 대표, 신한은 천보다 높고 지보다 큰 우주 유일신의 대표로 신앙하여 왔다. 그러나 말․불 양 ‘한’이 ‘신한’을 배반하여 각기 ‘신한’이라 자칭하여 세 대왕이 병립하여 지력으로 지위를 획득하면서, 일반인들도 계급은 자연적․고정적이 아니요, 힘만 있다면 파괴할 수도 있고 건설할 수 있음을 깨달아 삼신설을 회의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삼국의 신한들도 흉노와 중국의 여러차례 침략을 받아 국토가 많이 손실되고, 또한 일반인들도 이제 제왕은 사람의 아들이요 하늘의 아들[天子]가 아님을 깨달아 그의 성패흥망도 범인과 같이 되었다.
열국으로 분립되면서 쟁웅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북부여와 양 동부여(동부여․남동부여) 그리고 고구려의 네 나라는 ‘신조선’의 판도내에 세워졌다. 신조선이 흉노에게 패전한 때가 기원전 200년 경이고, 동․북부여의 분립도 또한 기원전 200년 경이라는 사실로 보아, 부여가 곧 ‘신조선’의 별명이고, 신조선으로부터 다른 삼국이 나뉜 것처럼 보인다. 열국의 연대도 많이 삭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역도 또한 삭감되었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연대도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668년에 망하니 705년 존속하였다 하나 이것도 고증하여 보면 900년 정도임을 알 수 있다. 강역도 축소되었는데 이는 북방의 나라들이 수 천리를 옮기어 남쪽으로 와 옛 지명을 남방에 옮기었기 때문이다.
Ⅲ.
이상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뉘기 이전 조선상고사에 대한 단재의 기본적인 역사관이다. 이는 어떻게 평가받을 수 있을까?
이만열 교수는 “단재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에서 단재의 사학 사상이나 한국사 인식은 한말 일제하라고 하는 격변기에 그 자신의 시대경험의 확대와 민족모순에 대한 의식의 진전에 따라 변화해 갔다고 하였다. 단재는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국사의 연구와 교육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국사의 연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민족의 자강과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단재는 단군․부여․고구려로 계승되는 역사인식체계와 그 역사무대로서 만주를 중요시하였다.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부여족의 식민지로서 중국대륙의 일부까지를 우리의 역사로 수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사군의 반도 외 존재설과 전후삼한설 등을 새롭게 주장하였다. 만주 중심의 단군 이해는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체계화 및 발해사의 한국사와 관련되고, 또 만주 중심의 밑바탕에는 한말 일제하에 전개된 만주의 우리 국토화 운동과 독립운동의 기지화 운동과 연결된다.
또한 한국의 상고문화에 대한 자존적인 인식이 뚜렷하다. 단군왕조를 강조하고 우리의 상고문화가 중국을 능가하는 우수한 문화임을 강조하는 여러 사례들이 기술되어 있다. 이는 중국에 대한 문화사대와 일제의 식민지상황을 철폐하려는 자주적인 역사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김부식 등 사대주의 역사가와 한국사의 타율성론을 강조하였던 식민사관론자들은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를 삼국시대 이후로 보고, 그 역사무대도 한반도가 중심이라고 애써 강조하였다. 단재는 이런 종래의 한반도 중심의 역사무대를 만주, 요동반도 및 요서지방과 중국 동북지대까지 확대한 것이었다.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 점이다. 「총론」에서도 비치고 있지만, 1925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글인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단재는 묘청이 일으킨 서경전역의 이면에는 낭․불․유(郎佛儒) 3가의 쟁투가 감추어져 있었으며, 이는 곧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다툼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낭․불 양가는 패퇴하고 유가가 집권하여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이 소멸되었다고 보았으며, 『삼국사기』는 그 산물이라고 보았다.
다음은 단재가 주장하고 있는 역사관을 몇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자.
1. 기자의 단군계승설 부정 : 신채호는 우선 단군 및 단군조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기자의 단군계승설을 부정하였다. 그는 또한 기자문제 못지않게 조선사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2. 상고사의 전후삼한설 체계화 : 그는 또 단군조 이후의 불분명했던 상고사를 전후삼한설로 체계화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래 이 기간에 한반도를 위만이 지배했다고 주장해온 학설이나, 아니면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설치되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주장, 또는 고대의 일본이 남조선을 지배했다는 ‘고대일본의 남조선경영설‘[임나일본부설 포함] 등, 외세의 침략세력이 우리 고대사의 영역을 지배했다고 주장한 종래의 학설들을 부정해 버렸다.
3. 기존 역사학의 조류 거부 : 그는 당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역사학의 두 조류를 거부하였다. 그 하나는 『삼국사기』 이래 전통적으로 답습되고 있던 유교주의적인 역사이해이며, 다른 하나는 근대 사학의 탈을 쓰고 접근해 오던 식민주의 사학이었다. 유교주의 사학은 단군을 우리 역사의 서두에 올려놓긴 하였으되 역사도 설화도 아닌 애매한 존재로 취급한다. 대신 중국에서 온 기자를 단군조를 이어 받는 문화의 시조로 부각시켰다. 한편 일제 관변학자들에 의한 식민주의 사학은 소위 ‘근대성’으로 포장하며 ‘단군신화‘의 ‘신화‘는 역사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 단군을 우리 역사에서 제거하였다.
4. 부여, 고구려 중심의 체계 : 단군이후의 왕조계승을 보는 입장도 다르다. 종전에는 단군에서 계승되는 왕조가 기자, 위만(혹은 삼한), 신라로 연결되는 것으로 파악한 데 비하여, 단재는 그것을 부여, 고구려 중심으로 계승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한국고대사 인식체계는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체계라고 할 수 있다.
5. 고대사의 영역문제 : 부여 고구려 중심의 역사 인식에 따라, 한국 고대사의 역사무대는 한반도 중심의 역사무대에서 만주 요동반도 및 요서지방과 중국 동북지방으로 확대되었다.
그 외에도 한사군 문제와 고구려 연대소멸론, ‘상고문자 기원설’과 ‘신지(神誌) 문제’ 등에 대한 이해는 조선문화의 원류를 밝히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또한 낭가(郞家)사상의 발견은 중국문화를 능가하는 우리의 고유 정신이 있었음을 강조함과 동시에 거기에 기반하여 민족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한 대외항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또한 1920년대 『천고(天鼓)』에서 다룬 승군, 화랑, 진왕, 소도, 조선 고대의 사회주의 내용 등도 관심을 끈다.
이러한 단재의 역사보기는 반도중심적, 사대주의적, 그리고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관을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을 준다. 물론 단재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역사연구방법론에서 강조한 것과는 달리 전거와 고증이 불확실한 부분도 있고, 착실한 고증 전개에 앞서 성급한 결론에 도달해 있는 점도 있다. 그러나 단재의 진실한 의의와 가치는 조선상고사의 새로운 체계를 세워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천착한 점이다. 단재는 한국사의 웅혼한 모습이 이미 삼국 이전의 역사에서 보여졌다고 강조한다. 이는 식민주의 사학이 한국상고사를 마치 비주체적, 타율적 역사의 표본이나 되는 것처럼 내세우고 있었던 연구방향과 뚜렷이 대조되는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진행되는 고구려와 발해사의 역사왜곡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한민족, 우리는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한민족의 뿌리문화의 실체를 바르게 아는 것, 그것은 가을개벽의 정신인 원시반본과 보은의 첫째 실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단재 신채호의 올바른 해원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글: 김철수(2006.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