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신고三一神誥」가 인도하는 진아眞我 3 삼일신고의 전래과정

「삼일신고」의 전래과정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문계석

「삼일신고」는 언제 출현하여 동방 한민족에게 전해지게 되었던 것일까이 물음에 대해서 정확한 사료를 추적하여 체계적으로 밝혀내기란 아마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다만 한민족의 정통사서 『환단고기』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下篇에서 전하는 바에 의거해 보면그 기원은 인류 최초의 시원국가인 환국桓國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환국의 환인천제桓仁天帝는 하느님으로부터 인류 최초의 묵시록黙示錄이라 할 수 있는 「천부경」과 함께 「삼일신고」를 성령으로 전수받아 구전口傳으로 전하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환국의 종통을 계승한 배달국倍達國의 신시神市 시대에는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백성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설說해지게 되었다이는 환웅천왕께서 처음으로 동방 배달민족의 역사시대를 열고 백성들에게 교화를 베푸실 때 천부경을 풀어 설명하시고삼일신고를 강론하시어 백성들을 크게 가르치셨다”(『환단고기』 안경전 역주)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천부경」과 「삼일신고」는 배달국 시대에 처음으로 기록되어 경전의 위격을 갖추게 된다왜냐하면 배달국 시대에는 녹도문鹿圖文이라는 문자가 나왔기 때문이다이를 짐작할 수 있는 방법은 조선朝鮮 중종 때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1455~1528)이 1520년에 편술編述했다는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이 책에서 이맥은 삼일신고는 본래 신시 개천시대에 세상에 나왔고그 때에 글로 지어진 것이다”(『환단고기』 안경전 역주)라고 기록했다그리고 단군조선檀君朝鮮에 이르자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경전은 전문篆文으로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동방 한민족의 정신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들은 「삼일신고」의 전문全文을 쉽게 접할 수 있다「천부경」과 「삼일신고」가 대중화되어있기 때문이다그럼 「삼일신고」의 전문은 어떤 때 어떤 과정을 통해서 대중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일까이는 대체로 세 가지 귀중한 자료를 통해 「삼일신고」의 전모가 세상에 밝혀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태백일사본太白逸史本>, <발해渤海 石室本>, <고경각古經閣 신사기본神事記本>의 자료가 그것이다.

<태백일사본>의 「삼일신고」는 <태소암본太素庵本>이라고도 하는데천보산天寶山의 태소암太素庵本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송호수의 『한민족의 뿌리사상』에 의거해 보면고려 말기의 행촌杏村 이암李巖(1326-1364)은 이명李茗과 범장笵樟과 같이 천보산에 놀러갔다가 소태암에 야숙하던 중에 여러 기이한 고서[奇古之書]를 얻었다그 중에 전문 366자로 구성된 「삼일신고」가 있었다이것이 <태소암본>이다. <태소암본>의 「삼일신고」는 원래 분장되어있지 않았는데행촌 자신이 一曰 虛空二曰 一神三曰 天宮四曰 世界五曰 人物로 분장한 것이다이암이 소장하고 있던 「삼일신고」는 후손에게 전해졌고, 1520년에 이맥이 『태백일사』를 편술하면서 소장본을 「소도경전본훈」에 싣게 된 것이다이때 이맥은 366자로 구성된 「삼일신고」를 第一章 虛空 三十六字第二章 一神 五十一字第三章 天宮 四十字第四章 世界 七十二字第五章 人物 一白六十七字”(『환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안경전 역주 참조)로 분장한 것이다.

<발해 석실본>과 <고경각 신사기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근대近代에 일어난 단군교檀君敎에서 시작되었다단군교는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구할[救世救民목적으로 1904년에 발족되었으나 후에 대종교大倧敎로 명칭이 바뀌었다『대종교중광60년사』에 의거해 보면, 1906년 1월 대종교의 중광重光 교조인 홍암弘巖 나철羅喆(1863~1916)은 서울 서대문 역에서 백봉白峰의 제자 백전佰佺(호는 두암頭巖)이라는 노인을 통해 두 권의 책, <발해 석실본>과 <고경각 신사기본>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발해 석실본>의 「삼일신고」는 발해국 제3대 문왕文王(737-793)이 백두산 석실에 봉장封狀한 신고神誥를 말한다. <발해 석실본>에는 천통天統 17(서기 715) 3월 3발해의 왕 대조영大祚榮이 「삼일신고」에 대해 친히 어제 찬을 지었고신하인 임아상이 주석을 달았으며아우인 대야발이 서문을 지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그리고 「삼일신고」가 어떻게 간직되어 전해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봉장기는 대조영의 손자 대흠무(발해 문왕이고 연호는 대흥대흥3(739)에 삼일신고가 후대에 영원히 전수되기 위해 태백산 보본단 돌집 속에 간직될 수 있도록 적은 것이라고 한다이것이 석함石函에 비전되어 오다가 백봉이라는 도인이 백두산에서 10여 년간의 기도 끝에 발견하여 제자를 통해 단군교에 보내진 것이다. <발해 석실본>의 「삼일신고」 전문 366자는 천훈天訓신훈神訓천궁훈天宮訓세계훈世界訓진리훈眞理訓의 오훈五訓으로 분장되어 있다.

<고경각 신사기본>은 백봉이 보낸 두암으로부터 대종교 홍암 나철이 친수親受 받은 <신사기>이는 어느 때 누가 작성했는지를 모르지만조화기造化記교화기敎化記치화기治化記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바로 교화기에 「삼일신고」의 전문이 들어있는데발해의 석실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이것이 <발해 석실본>과 함께 홍암 나철에게 전해진 것이다.

출처가 다른 세 자료는 삼일신고의 시작부분이 조금 다르다. <고경각 신사기본>의 삼일신고는 主若曰〇爾衆으로 시작하고, <발해 석실본>은 帝曰元輔彭虞으로 시작하고, <태백일사본(태소암본)>은 帝曰爾五加衆으로 시작한다나머지 내용은 세 자료가 일치하고 있고다만 후반부의 어구 몇 개만이 앞뒤가 바뀌어 있다즉 <신사기본>과 <발해 석실본>은 眞性無善惡”, “眞命無淸濁”, “眞精無厚薄으로 되어 있지만, <태백일사본>은 眞性善無惡”, “眞命淸無濁”, “眞精厚無薄으로 되어 있다. <신사기본>과 <발해 석실본>은 선악이 전혀 없는 진성’, 청탁이 전혀 없는 진명’, 후박이 전혀 없는 진정을 말하고 있고, <태백일사본>은 악이 없고 오직 선한 진성’, 탁함이 없고 오직 청아한 진명’, 박함이 없고 오직 후한 진정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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