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으로서 짓기, 짓기로서 살림 (하이데거의 강연을 중심으로)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살림’

– 짓기, 짓기로서 살림

 

# 다리에 하늘, 땅, 신적인 것, 인간이 모여있다.

하이데거는 ‘짓다’(Bauen)를 설명하기 위해 잘 지어진 다리 하나를 예로 든다. 다리가 지어짐으로써 다리에는 강과 강가, 땅이 서로 이웃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다리는 땅을 가까이 불러 모은다. 물살의 충격을 감당하는 교각을 가진 다리는 이미 하늘의 날씨에 대비돼 있다. 또 다리는 강물을 잠시 수문 안에 받아들였다가 다시 방류함으로써 강물을 하늘로 향하게 한다. 강물은 그런 방식으로 하늘을 자기 곁에 간수한다. 다리는 죽을 자들인 인간들에게 그들이 뭍에서 뭍으로 걸어가거나 차를 타고 가도록 길을 내줌으로써, 급기야는 이 차안의 삶 저편으로 인도함으로써 죽을 자들인 인간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밖에도 언제나 이미 마지막 다리로 가는 도상에 있는 인간들은 ‘신적인 것’의 구원 앞에 이르려고 애쓴다. 그럼으로써 다리는 또한 신적인 것을 자기 안에 간수하고 있다. 다리는 이런 방식으로 하늘, 땅, 죽을 자들, 신적인 것들을 불러 모은다.

물론 ‘짓다’(Bauen)에는 위와 같이 어떤 것을 세우고 건립하다의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생육을) 돌보다, 예컨대 ‘(밭을) 일구다’, ‘(포도나무를) 재배하다’와 ‘(옷을) 짓다’, ‘마르다’의 뜻도 지니고 있다. 포도나무를 보자.

땅에 뿌리내린 포도나무는 하늘의 햇빛을 받고 자란다. 포도나무의 열매에는 땅의 자양분과 하늘의 태양이 어울려 있다. 포도 열매로 만들어진 포도주는 사람들의 기운을 돋궈주고 유쾌하게 만든다. 또 포도주는 성스런 제의祭儀에서 신을 향해 바쳐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포도나무에는 하늘, 땅, 죽을 자들, 신적인 것이 하나로 어울려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짓다’, ‘짓는다’는 것은 ‘산다’(Wohnen)는 것이다. 즉 대지에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인간의 고유함 혹은 본질에 속한다. 인간은 사는 한, 짓고 있고 또 지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을 본질로 있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살리는 것이다(Schonen, Hüten). 그런데 대관절 무엇을 어떻게 살린다는 것인가?

하이데거에게 있어 살려야 할 것은 바로 하늘(天), 땅(地), 죽을 자들(人間), 신적인 것(神)이다. 여기서 하늘이란 태양의 운동, 달의 운행, 별들의 빛남, 계절의 바뀜과 하루 낮과 밤, 기후 등이다. 땅은 기르며 떠받치는 것으로서 바위와 물에까지 펼쳐져 있고 식물과 동물을 망라한다. 신성神性을 알려주는 사자使者와 같은 것인 신적인 것은 사물들에게서 빛나는 성스러움으로 이해하면 무방할 듯 하다. 마지막으로 인간 자신인 죽을 자들이란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는 자들을 말한다. 오직 인간만이 소멸하지 않고 죽는다.

“사방”(das Geviert)이라 불리는 이 네 가지의 것들은 근원적인 단일함으로부터 하나로 어울린다. 천지인 삼재(三才)가 그렇듯이, 우리는 이 넷 중에 어느 하나만 말해도 이미 다른 세 가지의 것을 함께 사유하고 있다. 이 하늘, 땅, 죽을 자들, 신적인 것의 근원적인 어울림이 세계다. 하늘과 땅, 신적인 것과 인간의 윤무!

살린다는 것은 하늘, 땅, 죽을 자들, 신적인 것으로 하여금 본연의 모습으로 있도록, 그것들의 고유함대로 있도록 지켜주는 일이다. 왜곡되고 비본래적 모습에서 벗어나서 말이다. 예컨대 땅을 살린다는 것은 땅을 땅으로 있도록 놔두는 것이다. 그것은 땅을 이용하고 함부로 부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땅을 장악하거나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조금만 해도 그것은 곧 무제약적인 착취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살린다는 것은 곧 일종의 섬김과 같은 것으로 수행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처럼 하늘, 땅을 받들고 죽은 자들과 신적인 것을 섬기는 살림에서 사방은 스스로 고유함을 되찾아 참된 모습으로 있고 세계는 환하게 열린다. 아직 없었고 이후 더 이상 없는 세계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처럼 사방을 살리는 일은 인간이 자신이 지은 사물들안에 사방을 불러모아 간수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앞서 하나의 다리나 포도나무가 그렇듯이, 사물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사방의 어울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물의 편에서 보면 그것이 순연純然한 저의 본 모습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했던가?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이러 저런 관점에 따라 채색되고 왜곡되지 않은, 산으로서의 산, 물로서의 물이란 바로 하늘, 땅, 죽을 자들, 신적인 것들의 성스런 어울림 속에 서 있는 것이다. 사물을 그렇게 세우는 것이 곧 살림으로서의 짓기다. 그 살림을 통해 모든 사물이 바로 서고, 하늘도, 땅도, 죽을 자들인 인간 자신도, 신적인 것도 모두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비로소 세계가 세계로서 일어나는 것이다.

만물이 성스러움을 회복하고 하늘, 땅, 신적인 것, 인간 자신이 그 성스러움의 빛 속에서 하나로 어울리며 새롭게 세계를 펼치는 곳. 그러나 그 곳은 동시에 본래 우리가 있어야 할 것으로 주어져 있기에 가장 오랜 것이다. 그러기에 그 새로운 천지의 새 집은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인간이 원시반본하여 찾아가야 할 고향 같은 곳이다.

“구름모양처럼 / 세상이 빨리 바뀐다 해도 / 모든 완성된 것은 돌아간다 / 태고의 것을 향해” (릴케의 시詩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중에서)

 

# 살리는 것은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이데거에서 짓기란 실제로 망치와 목재와 벽돌을 써서 집을 짓거나 씨뿌리고 거름 줘 농작물을 경작하는 것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 삶의 근본방식으로서 어떤 것을 고유함에로 내세우는 것, 본연의 모습으로 있도록 세워놓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밝힌 바대로, 섬김의 태도에 가깝다. 달리 말하면 “Bauen Wohnen Denken”(짓다 살다 생각하다)이란 강연제목이 시사하듯, 산을 산으로서 물을 물로서 나타나게 하는 사유 방식이다. 그것이 다리를 짓고, 집을 짓고, 포도나무를 재배하는 등 모든 구체적 짓기들에 관통하는 근원적 의미의 짓기다.

한편 뚜렷이 언급되지 않은, 짓기의 또 다른 성격이 여기서 드러나고 있다. 사물이 비로소 사물이 되고 세계가 세계로서 일어나는 존재사건의 편에서 보면, 그것은 인간의 짓기를 필요해서 쓴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 존재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짓기를 본질로 하는 인간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짓는 자인 인간이 없으면 사물은 바로 서지 못하고, 사방은 머물 데가 없으며, 세계는 존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그 같은 쓰임이란 전혀 강압이나 폭력 같은 것이 아니다. 그를 통해 인간은 사물을 바로 세워 세계를 비로소 여는 자신의 본분을 다한다. 다시 말해 짓기란 자기 본질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참된 인간으로 살 수 있다. 그러니 그 씀이란 인간으로서는 새로 남의 호의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씀에서, 그것을 중심으로, 사물, 세계와 인간 쌍방이 서로를 살리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본래적 씀이란 언제나 쓰는 자 자신의 필요로부터 쓰는 것이며, 쓰이는 것을 그것의 본질로 있도록 해주는 것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씀은 쓰는 자, 쓰이는 것 둘 모두를 살리는, 문자 그대로 활용活用이다. 심지어 해월 최시형 같은 이는 시간의 씀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는 그의 <용시용활>에서 대저 도란 시간을 맞추는 것, 때를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건이 마침내 일어날 수 있는 무르익은 시간을 써야, 쓰는 인간도 성공하고 시간도 보람을 얻는 것이다. 때맞춰 쓰는 자가 없다면 아무리 농익은 시간도 불임의 시간이 돼 지나가 버린다. 그리고 인간은 쓰라린 만시지탄을 곱씹을 수밖에. 때를 못 쓰면 시간도 죽고, 인간도 낮에 난 도깨비처럼 허황할 뿐이다. “대저 도는 때를 쓰고 활용하는데 있나니 때와 짝하여 나아가지 못하면 이는 죽은 물건과 다름이 없으리라.”(『천도교경전』, 353쪽)

결국 하이데거의 짓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짓는다는 것은(作) 사물로 하여금 하늘, 땅, 인간, 신적인 것들의 성스런 융회로서의 세계를 펼치도록 세우는 것이다. 그를 통해 천지자연을 살리는 것이다(生). 그리고 천지자연의 편에서 보면 그 새로운 건립은 인간을 씀(用)으로써 이뤄진다. 우리는 지으며, 살리며 우리가 정주할 새로운, 그러나 가장 오랜 터전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그러는 한 희망은 사람에 있다.

 

<상생문화연구소 서양철학부 황경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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