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바라보기 4
고결함에 대하여 (2)
“지고자에 대한 욕망의 고결함은 그 자체로 지고자의 부름입니다.”(『 I AM THAT』)
그러면 우리에게서 고결한 삶은 무엇일까. ‘제 유래도 혹은 제 어미 아비도 모르는 놈.’ 이 말은 한국인에게 가장 치욕스런 욕의 하나이다. 이로 미뤄 볼 때 한국에서 명예롭고 고귀한 삶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자신의 유래를 알아야 한다.
전래된 희귀 사서들을 수록하고 있는 『환단고기』에 의하면 한민족은 생명의 유래를 삼신으로 믿는다. “만물은 삼신에서 이끌려 나온다.”(『태백일사』) “일체가 오직 삼신이 지은 것이다.”(『태백일사』) 삼신은 우주의 충만한, 신령한 조화기운과 같은 것이다. 만물 생명의 본체는 “오직 일기이고 삼신일 따름이다.”; “일기一氣 안에 삼신이 있고 삼신은 밖으로 일기에 싸여 있다.”; “신은 기며 기는 허령한 것이다.”(『태백일사』) 삼신은 만물을 짓는 조화와 함께 개별자들의 본성으로서 그들 안에 내주한다. 삼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기원이며 본질이다. 삼신은 허령한 한 기운으로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어디에도 유형의 어떤 것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같이 어디나 있으면서 만물을 낳고 모든 변화를 짓기에, 앞서 하이데거의 존재의 경우처럼, ‘더’ 있다.
그래서 앞서 제시한 고결함의 의미에 따르면 우리 문화권에서는 삼신과 하나 되어 삼신과 함께하는 삶이 고결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고결한 삶은 내 안에 본성으로 주어진 신성을 틔워 저 생명의 유래인 신성과 하나로 통하는 데서 출발할 것이다. 이를 ‘성통性通’이라 하는데, 우리의 본성이 삼신으로부터 내려 받은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통’은 또한 ‘회복하다’, ‘되찾다’는 의미를 갖겠다. 이제 우리의 본질이 유래하는 삼신의 성격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남에 따라 한민족에게서 고결한 삶은 구체화될 것이다.
먼저 신의 본질, 참됨은 광명이었다. 육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신령한 기운은 곧 겉도 속도 비어서 “있지 않은 데가 없고 감싸지 않는 것이 없는”(『태백일사』) 빛이라는 것이다. “크고 텅 빈 가운데 빛남이 있으니 그것이 신의 모습이다.”(『태백일사』) 모든 것은 신의 광휘 안에 간수됨으로써 무가 아닌 유로서 존립한다. 신의 조화가 지은 인간의 본성 역시 마땅히 밝음일 것이다. 그럼으로 인간에게 성통은 욕심과 분별로 가려지고 어두워진 그 밝음을 새롭게 혹은 다시 틔우는 것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생명의 본원인 신성의 빛을 만나, 그것과 하나 됨으로써 참된 인간의 삶, 고결한 인간의 삶에 들어서는 것이다. 고결한 삶은 곧 내 안의 가장 밝은 것과 저 생명의 원천인 천지 신성의 빛이 하나로 통하는 것〔性通光明〕과 함께 시작된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은 도통道通의 요체를 밝히는 가운데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몸 속에 본래 있는 조화의 대광명은 환히 빛나 고요히 있다가 때가 되면 감응感應하고, 이것이 발현되면 도道가 통한다.”(『태백일사』) 그렇게 보면 신의 빛은 우주를 존립케 하는 존재의 빚이면서 또한 나를 인간으로 깨어나게 하는 영성의 빛, 깨달음의 빛인 것이다. 그 빛 머물면 존재하고 느끼면 응한다. “오직 생명의 근원 되는 기와 지극히 오묘한 신은 그 자체 집일함삼執一含三으로 있는데, 광휘로 충실하다. 그것이 비치면 존재하고 느끼면 응한다.”(『태백일사』)
한국 고대 사유에서 신의 의미와 관련하여 반드시 새겨야 할 또 다른 특징은 신이 이중적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선도문헌에서 신이며 기인 삼신은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삼신은 한 뿌리의 기운으로서 천지조화의 바탕자리를 이루는 무형無形의 신성神性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세상일을 다스리며, 인간의 기도에 감응하고, 제사를 받는 인격신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천부경』과 함께 한민족의 경전으로 알려진 『삼일신고』는 무형의 신성으로서 삼신을 ‘하늘’이나 ‘허공’으로 부르는 한편, 주재적 인격신을 ‘일신一神’으로 호명한다. 이 두 궁극자는 각기 1장(‘허공’)과 2장(‘일신’)에서 따로 다뤄진다. 이에 따르면 허공〔하늘〕은 없는 곳이 없고 감싸지 않음이 없는 우주의 본체로 설명된다. 반면 일신은 위없는 으뜸의 자리에 머물며 무수한 세계를 주재하는, 밝고 신령하여 감히 이름 지어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신으로 규정된다.
하나의 ‘신’으로서 무형의 신성과 최고의 인격신을 동시에 지칭하는 것은 양자가 다르지만 동일함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고려말의 학자 행촌杏村 이암李嵒(1297-1364)은 허공은 “하늘의 바탕”이며 일신은 “하늘의 주재”라고 함으로써(『태백일사』) 하늘과 일신, 일신과 하늘은 하나의 동일한 것임을 밝힌다. 양자는 어떻게 동일함을 이룰까? 적어도 주어진 설명을 가지고 말하면, 모든 것을 감싸지 않음이 없는 무형의 삼신과 모든 것보다 위에 있는 으뜸의 인격신 일신은 개념상 서로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함께 속하고, 그런 의미로 동일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피하기로 한다.
이처럼 신은 언제나 인격적 실재와 비인격적 실재의 일체로 있는 만큼, 고결한 삶, 즉 본질 유래와 함께 하는 삶은 인격적 일신을 소리쳐 부르는 것만으로도, ‘신 없이’ 비인격적 신성을 체득하여 그것과 하나 되는 것만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단순히 신중심적인 신앙만으로도 인간중심적인 수행만으로도 그 삶을 얻지 못한다. 그 둘 모두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이에 따라 고결함은 내 안에 심어진 신성인 본성을 되찾아 우주의 신령한 한 기운인 신과 하나 돼 그 마음자리에서 일신을 받드는 데 깃들어 있다. 고결한 삶은 내 본성을 틔우는 성통과 하느님 신앙에서 구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을 찾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에는 하느님의 뜻이 현실화하는 데 일꾼으로서 참여하는 공덕이 요구된다. 성통에는 공덕의 완수가 따라야 하는 것이다[性通功完]. “지고자에 대한 욕망의 고결함은 그 자체로 지고자의 부름입니다.”
여기서 완수해야 할 공功, 공업功業이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인간이 마땅히 사역해야 할 과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신의 아들이나 대행자로서 하늘의 뜻을 이어 나라를 열었던[繼天立極] 환인, 환웅, 단군에 의하면 그 천명天命의 핵심은 홍익인간이다. 『삼국유사』 고조선조條를 보면 환인은 세상을 개혁하려는 뜻을 가진 환웅에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땅을 골라줌으로써 천부인과 함께 홍익인간의 종통宗統을 전했다. 환웅은 개국 이념이었던 홍익인간을 참 인간을 위한 심법이라 할 ‘염표문念標文’에 새겼다. “일신강충 성통광명 재세이화 홍익인간一神降衷 性通光明 在世理化 弘益人間”(신에게서 내려 받은 밝은 본성을 틔워 천지 광명인 신성과 하나가 되어 신의 가르침으로써 다스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단군 또한 환웅이 세운 신시 배달의 이념을 좇아 고조선을 건국했으며 홍익의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을 교화했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야 너희들의 복록이 무궁하리라.”(『단군세기』; 『규원사화』) “너희 무리는 오로지 하늘이 내려 주신 법을 지켜 모든 선을 돕고 만 가지 악을 없애 성性이 통하고 공이 이루어지면 하늘에 들 것이다.”(『규원사화』)
홍익인간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이롭게 하는, 즉 남들로 하여금 되어야 할 바 그 자신이 되도록 베풀고 이끄는 일이다. 환웅이 웅녀에게 그랬듯, 진정한 인간의 모습, ‘사람꼴’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홍익이 미치는 대상은 오직 인간만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한 울, 한 생명을 이루고 있는 만물에 이른다. “스스로 참을 이루고 만물을 평등하게 구제”(『태백일사』)한다. 인간을 비롯하여 하늘, 땅, 그 밖의 모든 것들이 모두 삼신이란 동일한 포태로부터 나온 것이다[人物同出三神(『태백일사』)]. 그 때문에 홍익인간의 정신은 그 자체로부터 사회적, 우주적으로 확장돼, 만물이 하나의 조화 안에서 각자의 고유함대로 있도록 이끄는 원리가 된다. 훗날 최치원이 「난랑비서鸞郎碑序」에서 한국의 옛 신교인 풍류도를 설명하며 밝힌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참 뜻도 거기서 구해야 할 것이다. ‘우주 신성과 감응하며〔接化〕 뭇 생명을 살린다〔群生〕.’
이제 여기에 이르러 우리에게 고결한 삶, 다시 말해 본질 유래와 함께하는 삶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신성과 하나 되는 가운데 신을 섬기고 그 뜻에 따라 홍익인간을 실천하는 삶이다. 그래서 환웅의 「염표문」은 인간의 고결함을 위한 가르침이다: ‘일신강충 성통광명 재세이화 홍익인간.’ 저 상고 시대 한민족에게는 그런 인간이 고결한 사람이고 아리안이다.
글은 끝났지만 아직 못 다한 얘기가 있다. 그 한 생각을 여기 달아놓고자 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고결함을 의미하는 ‘아리안’과 마찬가지로, 우리말 ‘아리랑’ 역시 그 유래나 어원, 의미는 분명하게 밝혀진 게 없다. ‘아랑낭자 설(조선시대)’, ‘알영 왕비(박혁거세 부인) 설’, ‘악랑 고개 설’(이병도) 등 여러 해석이 제시되고 있지만 어느 것도 정설로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랑이 한국인의 영혼과 문화에 각인된 키워드임은 분명하다. 이 가운데는 이런 주장도 있다. ‘아리랑’은 ‘알’과 ‘이랑’으로 나눠지며, ‘아’는 만물의 모체며 근본인 ‘알’, ‘생명’, ‘하느님’의 뜻을 지닌 ‘ᄋᆞᆯ’이고 ‘이랑’은 그 생명의 유래‘와 함께’를 의미한다. 특히 ‘~와 함께’라는 뜻의 ‘이랑’과 같은 토씨는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6천년 이상 이어진다고 한다. 그러면 아리랑은 제 본질 유래인 알, 생명 혹은 삼신과 함께 속함, 거기에 머묾을 뜻하게 될 것이다. 즉 아리랑은 고결함의 의미를 갖는다. 아리안의 ‘아’ 또한 아리랑의 ‘아’와 같은 의미와 유래를 갖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해석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본질 기원인 ‘알’, ‘ᄋᆞᆯ’, ‘하느님’과 함께 속하면서 그 연대 속에 신의 뜻을 실현하는 삶은 아리랑이며 아리랑의 인간은 고결한 사람, 아리안이다.
아리안과 아리랑의 비교는 무리한, 어느 면으로 폭력적인 시도일까? 혹은 사유할 가치를 품고 있을까? 이보다 긴박한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삼신이든 존재든 아니면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든, 우리의 본질이 유래하는 것으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혹은 멀어져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