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소테릭(esoteric) 하이데거?! 2. 이성이 발언하면 사유는 침묵한다.
2) 존재는 비–근거(Ab-grund)인 심연深淵(Abgrund)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는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관계 맺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서 가장 먼저 알려지는 것이다. 모든 것들은 우선 있고 나서 무엇, 무엇이며 어떻게… 등등이다. 존재 덕분에 존재자는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존재는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존재하게 함’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들은 언제나 ‘존재의 존재자’이다.
그러나 존재는 존재자 넘어 혹은 그 배후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에 속한다. 존재가 존재자의 질서와 다른 곳에서 ‘있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또 하나의 존재자일 따름이다. 존재가 머무는 ‘유일한’ 토포스(자리; 場)는 존재자이다. 그런 의미로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의 존재’이다. 즉 존재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하나로 속하면서 “모든 존재자를 발원(ent-springen)하게”(Grundbegrife) 한다. 이해를 위한 한 방편으로 다소 거칠게 말하면, 여기서 존재와 존재자는 도가道家 사상에서 도道와 물物의 관계에 유비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단순화에는 양자 사이 무엇이 같고 다른지 묻는 비판적 사고가 항상 담보돼야 할 것이다.
서구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를 근거나 원인으로 이해한다. “형이상학은 근거 짓는 표상함의 방식으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사유한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으로서의] 철학은 그 시작에서부터 존재자의 존재를 근거로 보았다.”(Zur Sache des Denkens) 그런데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모든 있는 것들을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하지만 근거는 아니다. ‘존재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거는 아니다?’ ‘근거’를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이해하는, 또 형이상학적 의미의 근거만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의 주장은 형식논리에 반反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 문제를 이해하는 첫 번째 관건은 오히려 존재가 마치 존재자인 양 그것의 근거, 다시 이 근거의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얘기하지 않는 데 놓여 있다. 달리 말하면 ‘무엇은 무엇을 낳고 그 무엇은 또 다른 무엇이 낳고 … ’ 하며 계보를 따지는 방식의 사유로써는 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나아가 하이데거는 존재란 창조나 제작, 작용의 근거 등 형이상학적 근거가 될 것이라는 모든 기대를 거절하는, 비근거(Ab-grund)인 심연深淵(Abgrund)이라고 한다.
한편 앞에서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에 속하고 존재자는 존재 덕분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언제나 존재에 속한다고 했다. 그럼으로써 존재와 존재자는 서로에게 속하며 단일함, 동시성을 이룬다. 존재의 경우는 존재자가 없다면 달리 머물 곳이 없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하나는 다른 하나를 가능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그 하나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같은 되먹임의 논리는 서구 사유의 논리로써 보면 ‘순환의 오류’이다. 근거란 시간과 능력에서 항상 결과에 앞서고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고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이데거의 주장은 비합리적이며 에소테릭한 소리로 들린다.
반면 서구 형이상학과 달리 호체호용互體互用[서로 번갈아 본체가 되고 작용이 된다], 불상리 불상잡不相離不相雜[서로 떨어지지도 않지만 섞이는 것도 아니다.], 불일불이不一不二[하나가 아니면서 둘도 아니다.] 등의 ‘비서구적’, ‘비논리적’ 사유에 친숙한 사람들에게 하이데거 얘기는 그렇게 생경하게 들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언급하면 모든 상이한 것들의 조화가 그렇듯이 하이데거에서 존재와 존재자의 함께 속함은 동일한 중심을 전제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둘의 ‘사이’며 둘을 하나로 묶는 ‘와(과)’가 될 것이다. 이 함께 속함의 중심은 차이 나는 둘, 즉 존재와 존재자보다 시원적이다. 역시 형식논리로 보면 비이성적 주장으로 들린다. 여기에 하이데거는 그 동일한 것은 함께 속함이 일어나는 ‘동안’이며 ‘폭’[場]이라고, 즉 때이자 곳[시공간]이라고 함으로써 그의 에소테릭은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3) 존재와 인간의 공속성 사이 되먹임의 관계
존재와 하나의 특출한 존재자 인간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관계 또한 당연히 공속성의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에 속하는데, 인간이 없으면 존재는 없고, 따라서 존재와 존재자의 함께 속함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인간[현존재]이 있는 한 존재는 ‘있다’.” 그러나 ‘에소테릭’하게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존재가 ‘있는’ 한 현존재가 있다.”는 말도 옳다.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모두가 타당하다는 것이다. 역시 되먹임의 논리에 속한다. 그러한 논리란 결코 성립될 수 없다고 믿는 경우 하이데거의 주장을 비합리적이고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존재와 인간의 공속성과 그런 의미에서의 동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둘의 ‘중심’은 앞서 말하듯 ‘사이’ 영역으로서 시공간이다. 하이데거에게 시간과 공간은 구별되는, 두 가지의 것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독일어 ‘zwischen'(사이)나 우리 말 ‘사이’나 ‘중’, ‘가운데’ 등 분명 시간과 공간 개념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쓰였을 단어들은 시공時空에 대한 시원적 이해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즉 그 옛말들은 지금도 시간과 공간 둘 모두에 적용된다. 물론 여기서 시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하듯, ‘지금’의 연속이 아니며, 공간 역시 뉴턴식의 ‘space-container’가 아니란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 에소테릭한 얘기를 더욱 에소테릭하게 얘기하면, 하이데거에서 이 ‘때/곳’은 유일무이한 심연이고 둥근 원이고 놀이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고 죽는 곳이다.
4) 산과 골짜기와 같은 유有와 무無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하이데거는 사유의 길에서 궁극적 목적이나 존재 근거에 이르려고 하지 않는다. 위에서 시사되듯, 그에게 존재는 근거가 아니고 신神은 더욱 아니다. 존재는 도대체 존재자가 아니다, 어떤 무엇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님’(das Nicht-Seidende)으로서 무와 같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말하는 무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한다. “무는 하나의 대상도 하나의 존재자도 아니다. … 무는 존재자에 대한 반대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존재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Wegmarken); “사유가 존재를 사유하기 때문에 사유는 무를 사유한다.”; “존재자의 타자로서의 무는 존재의 면사포(Schleier des Seins)이다.”(Wegmarken); “존재와 무는 서로 나란히 병렬적으로 생기하지 않는다. 하나의 친족 관계 속에서 일방은 타방으로 향하고 있다. … 무가 존재자로서 존재하지 않는 그만큼 존재도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Wegmarken).
이러한 규정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보다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뒤에 나올 해명들이 어느 정도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충분한 설명 없이도 여기서 다음의 사실만큼은 비교적 확고하게 파악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무를 함께 속하는 것으로 또는 등가적等價的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나아가 둘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노자의 말을 상기시킨다. “유무상생有無相生”; “천하 만물은 유로부터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그래서 하이데거가 당시 이미 독일어로 번역된 도가道家나 선불교禪佛敎의 텍스트를 읽고 관련 구절에서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유와 무를 공속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이는 그의 존재를 유무의 뒤섞임, 이를테면 ‘유야무야’한 것이라고 밝히는 셈이다. 이 또한 형식 논리에 위배된다. 있거나 없거나 양단兩端만을 인정하는 배중률排中律을 따르는 사유와 논리에게 유무공속을 말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에소테릭’하다. 서구 형이상학의 로고스적 성격을 규정하는 서구 언어의 입장에서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진 언어를 가지고 굳이 표현하자면 “있는 듯 있지 않은 있는 것 같은 ‘Some’”이란 규정이 그마나 존재 사태에 유효한 기술이 될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다음의 사실도 어느 정도 분명해진다. 하이데거에서 ‘에소테릭’의 베일을 벗기기 위해서는 시원적인 것, 즉 주관과 객관, 유와 무,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보다 앞서면서 둘 모두를 함께 속하게 하는 것이 드러나야 할 것이란 점이다. 이 시원의 것은 무엇인가 혹은 어디인가? 보다 친숙한 노자의 말로써 물어보자. 유무의 “동일성을 현玄이라 한다[同謂之玄].” 노자에서 유무의 동일성을 담보하는, 그것이 일어나는 그 심연 혹은 신비한 골짜기[玄]는 어디인가? 다음 논의에서 그 ‘무엇’ 혹은 ‘어디’는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에소테릭(esoteric) 하이데거?! 3) 해명 – 발현發現(Ereignis)
5) 해명 – 발현
하이데거에서 시원적이며 본래적인 존재는 숨김과 망각의 은닉으로부터 스스로 그 자신을 열어 밝히는 발현의 사건을 의미한다. 존재는 이렇게 자신을 밝게 드러내는 비은폐非隱蔽로서 고유하게 머문다. 즉 존재가 존재로서 있는 “본질(das Wesende)”이나 참됨은 비은폐인 것이다. 하이데거의 에소테릭은 여기서 더 심각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본래의 존재는 비은폐로서 도래하며 거기 머무는 현존(anwesen)으로서의 존재다. 먼저 현존의 의미를 살펴보는 게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Anwesen’에서 ‘an'[가까이]’은 계측될 수 있는 공간적, 물리적 근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해 밝게 트임의 가까움(Was heißt das Denken?)이다. 즉 “비은폐성의 열린 영역(die offene Gegend der Unverborgneheit)”(Holzwege)을 말한다.
이에 따라 존재는 밝게 트이면서 영역화하며 거기에(‘an’) 본래적으로 머무는(wesen) 것이다. 존재는 그 밝게 트임의 열린 개방성[場]에서 그것을 중심으로 존재자들을 감싸 그것들을 각각의 고유함으로 있도록 한다. “존재자 전체 한 가운데는 하나의 개방된 자리가 현성한다. 밝게 트임이 있다. 이 밝게 트임은, 존재자로부터 사유해보면, 존재자보다 더 있다(seiender)… 이 환히 트이는 중심 자체가 마치 무(Nichts)와 같이… 모든 존재자를 둥글게 감싼다.”(Holzwege) 존재자는 존재의 밝은 빛 안에서 비로소 이러저러한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서 들어서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에서 밝게 트임의 장과 인도 사유에서 브라만이고 참나인 순수 자각 혹은 순수 자각의 장을 비교하려는 시도도 있다. 자각은 빛으로 규정되는데, 모든 나타남은 자각의 빛 안에서 존재한다. 이 경우에도 이 밝음의 장이 없다면 어떤 것도 자기 존재를 갖지 못한다.(「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
‘존재는 발현’이라는 이 마지막 규정은 하이데거의 비합리적 성격, 에소테릭한 측면을 해명하는 열쇠가 된다. 이제 앞서의 모호함들을 다시 상기해 보자.
존재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데 존재 근거는 아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어떤 무엇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발현의 사건과 이행으로 드러났다. 이로써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을 창조나 제작, 산출 등 원인론적, 형이상학적 문맥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의 존재는 존재자를 낳거나(verursachen) 작용시키는(bewirken) 형이상학적인 혹은 과학적 근거로 여겨서는 ‘답이 없다.’ 존재는 단순히 자신을 열어 밝히면서 그 밝음 안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간수하여 그것들이 그 자체로서 있도록 한다.
하이데거에서 존재 그리고 그것의 존재하게 함은 자신의 밝게 트임에서, 그것으로부터 존재자들을 비로소 고유하게 존재하도록 수락, 허용하는 것이다. 이는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즉 시원의 자기됨으로 비로소 새롭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굳이 말하면 하이데거의 존재는 근거 아닌 ‘근거’ 또는 비근거(Ab-grund)인 심연(Abgrund)이다. 근거도 아니면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비은폐의 존재는 모든 현실적인 것들을 뒤쫓아 근거나 원인을 캐묻는 합리적 사유 앞에서는 마치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듯 달아나 스스로를 감춘다.
또 이와 함께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단일함에 얽힌 모호함 역시 다음과 같이 해명된다.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로 향하고, 존재자는 그 존재의 탈은폐 안에 간수돼 존재자로서 존재한다. “한 존재자는 존재 안에서 고유하게 있고 존재는 한 존재자의 존재로서 참되게 머문다.”(Was heißt das Denken?) 그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와 존재자는 번갈아 서로를 향함으로써 구분되면서도 또한 함께 속한다. 달리 말하면 존재는 자신의 밝음에서 존재자를 비로소 그 자체로 드러나도록 하고 존재자는 비은폐인 존재가 유일하게 본래적으로 머물 수 있는 토포스가 되는 되먹임의 논리로써 둘은 단일함, 동시성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통일성을 견지하는 동일한 중심, ‘사이’[中]의 문제 또한 보다 뚜렷해진다. ‘사이’의 ‘개방된 여지’(das Offene)는 제3의 것으로서 존재와 존재자에 덧붙여지거나 끼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열린 장은 존재가 스스로를 열어 밝히는 지평과 방식으로서 존재 자체에 속한다. 비은폐를 본질로 하는, 아니 비은페 자체인 존재는 사방四方으로, 원으로 밝게 트이며, 다시 말해 영역화하며 현성現成하는 것이다. 이 밝게 트인 영역이 존재와 존재자의 ‘사이’가 된다. 그리고 그 ‘사이’ 영역은 존재가 그 자체로서 머무는, 다시 말해 비은폐로서 현성하는 동안[Weile]의 폭[Weite]으로서 시/공간의 성격을 갖는다.
존재와 인간의 독특한 관계 역시 다음과 같이 해명된다. 존재가 발현이란 규정은 존재는 언제나 은닉으로부터 발현이란 점과 아울러 발현이 일어나 머무는 장, 말하자면 발현이 담길 ‘그릇’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미 전제한다. 그러한 존재의 요구에 상응하는 것이 사유하는 인간 혹은 인간의 사유이다. 사유는 존재와의 순전한 만남을 왜곡하거나 방해할 모든 제약들을 내려놓고, 끊임없이 마음을 모아 존재를 향해 개방한다. 인간은 그와 같이 사유로써 존재로 자신을 바치는 한편 존재는 인간 사유의 개방성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럼으로써 사유의 개방된 여지는 존재가 자신을 열어 밝히고 그 밝음에서 모든 존재자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장[때/곳]을 떠맡는다. 이로부터 존재는 비은폐, 즉 자신의 참됨으로 머물고 인간은 존재를 지키는 자[존재의 목자; 존재의 이웃]로서의 본질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하는 것들 또한 이른바 저 밝게 트임의 ‘그릇’ 안에 감싸여 존재자로서 고유하게 있다. 이때 합리적 사유는 존재와 인간 사이의 선후나 우열에 관심을 갖지만 하이데거의 사유에게 그런 물음은 사태의 순환 속에 잠길 뿐이다. “오직 인간[현존재]이 있는 한 존재는 ‘있다’.”는 저 말도 맞고, “존재가 ‘있는’ 한 현존재가 있다.”는 이 말도 맞다.
끝으로 유와 무의 동일성 문제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동시적이며 동일하다?!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존재자가–아님(das Nicht-Seiende)”이란 의미로 무다. 이때의 무는 전통 형이상학이 이해하듯, 존재자 전체의 완전한 부정이나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것이 아니다. 존재가 발현으로 밝혀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무는 존재 진리의 숨김과 감춤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서 유와 무는 곧 감춤과 밝힘, 은닉과 발현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은닉은 발현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며 발현은 은닉으로부터 솟아난다.
이 경우 은닉으로서의 무는 존재를 존재로서 열어 보여주는 가능성으로서 “근원적으로 [존재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Wegmarken) 무는 존재를 감추면서 동시에 내보이는 “존재의 면사포(Schleier des Seins)”(Wegmarken)이고, 존재의 편에서 보면 존재는 은닉의 면사포, 부재의 어둠을 뚫고 밝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은닉과 비은폐, 감춤과 밝힘, 곧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유와 무는 산과 골짜기처럼 서로 포함하는 것이다. “존재와 무는 함께 속한다.”(Was ist Metaphysik?) 그 때문에 유 아니면 무의 이항대립적인 방법으로써 하이데거의 존재에 접근하는 것은 전혀 사태에 적중할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하이데거에 대한 ‘에소테릭하다.’는 반응의 내용이 무엇이며 어떤 배경 속에서 제기되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해명될 수 있는지 다뤘다. 물론 이 간략한 해명 자체가 ‘에소테릭’을 더욱 심각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지만, 나중에 다른 자리에서 시도될 보다 자세하고 다양한 해명을 기다리면서 더 이상의 설명은 피하기로 한다. 무엇보다도 하이데거와의 꾸준한 대화만이 그와 올바르게 만나게 해줄 것이다. 그가 말하듯 사유는 영원히 길로 머문다.
그럼에도 우리의 설명만으로도 하이데거를 내내 사로잡았던 문제, 말하자면 ‘에소테릭’의 베일에 감춰진, 하이데거 사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어느 정도 드러난다. 존재가 밝게 트이고 그 안에서, 그것과 함께, 그로부터 존재, 존재자, 인간이 하나로 어울리고 그 가운데 제 본질로 빛나며 머무는 존재 사건이 그의 사유 중심에 놓여 있다. 말하자면 존재 발현의 ‘마법(Zauber)’으로써, 그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그것을 중심으로 비로소 저의 참됨으로 돌아가 고요히 머무는 사태가 하나의 별처럼 그의 사유를 이끈다. 하이데거는 이를 “고향”으로, “또 다른 시원”으로 호명한다.
모든 것들이 비로소 조화 가운데 시원의 본질을 새롭게 얻는 그 ‘곳/때’는 주객분리의 사유로는 닿을 수 없고, 근거를 거부하며, 유무로써 잡히지 않는다. 서구의 합리적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심연이다. 동시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고 죽는 곳(/때)이다.
그런 만큼 여기에 들어서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주객분리 위에서 모든 것을 대상화하고 근거를 구해 그것들을 파악하고 장악하고 이용하려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포기해야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사유는 모종의 셈법을 걸어놓고 무엇을 표상하는 계산적 사유이다. 우리는 대상화하고 계산을 통해 지배하려는 일체의 의지를 여의고 그로부터 순전한 마음으로 존재에 청종하고 존재에 자신을 바치는 사유로 전향해야 할 것이다. 그 사유는 또한 우리를 본질에 이르게 해준 존재의 호의에 대한 감사함일 터이다.
하이데거는 전자의 형이상학적 사유와 구별되는, 이러한 ‘또 다른 사유’를 “andeken”, “besinnen”, “besinnliches Denken” 등으로써 가리키려 한다. 우리는 대개 이를 ‘숙고’라고 옮기고, 영어권에서는 ‘meditative thinking’, ‘Meditation’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유’로 전향하고 모든 것이 비로소 자체의 모습을 찾는 존재 발현으로 들어서는 데는 학식과 사변思辨이나 심오한 탐닉이 요구되지 않는다. ‘뜰 앞의 잣나무’, ‘나는 솔개, 뛰어오르는 물고기[鳶飛魚躍].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저 단순하고 소박한 사실로 뛰어드는 한 걸음의 도약이 필요할 뿐이다. 그때 하이데거의 ‘에소테릭’은 참된 사유를 막고 우리를 혼란으로 이끄는 한갓 너울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