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신고三一神誥」가 인도하는 진아眞我(14)
<< 세 가지 진실한 삼진三眞과 세 가지 거짓된 삼망三妄 >> – (2)
<삼방三房과 삼망三妄의 의미> :
그러나 인간은 삼신에게서 받은 삼진을 그대로 보존하고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심ㆍ기ㆍ신’의 삼방은, 삼신의 본성인 삼진이 머무는 방이기도 하지만, “변화가 이루어지는 근원이 되기(房爲化成之根源)”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조물주 삼신이 ‘이끌어내어 존재하게 되는 만유생명[有引出萬物]’은 시공時空 안으로 들어오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는 생겨나는 모든 것들이 시간적인 과정過程과 공간적인 변형變形을 따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인간을 구성하는 ‘심ㆍ기ㆍ신’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이 현실세계에 안착하여 생명활동을 벌이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면, 인간의 본래 마음도 변화되고, 생명의 기도 변질되고, 몸도 변형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삼신에게서 받은 삼진을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보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삼일신고」 5장은 “인간과 만물은 (삼신에게서) 삼진을 받아 나왔으나 오직 창생은 땅에 살면서 미혹될 수밖에 없으니 삼망이 뿌리내린다[人物 同受三眞 惟衆迷地 三妄着根]”고 정의한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서는 삼진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인간의 ‘심ㆍ기ㆍ신’을 삼방으로 정의했다. 그런데 「삼일신고」에서는 삼진을 보존하고 있는 삼방을 ‘삼망三妄’으로 말하고, ‘삼망이 뿌리내린다[三妄着根]’고 표현했다. 여기에서 ‘삼망’이란 ‘세 가지 망령됨’, ‘세 가지 거짓됨’을 뜻한다. 인간을 구성하는 ‘심ㆍ기ㆍ신’은 무슨 이유로 세 가지 거짓된 것, 즉 삼망으로 뿌리내린다고 하는가?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잠시 인간의 탄생과 성장의 정을 보자.
조물자 삼신이 내려와 인간이라는 고귀한 생명이 잉태孕胎된다. 잉태되는 그 순간에 최초의 태아가 형성되는데, 태아는 본질적으로 삼진이 거주하는 ‘마음의 방[心房]’, ‘생명활동의 기방[氣房]’, ‘몸을 이루는 방[身房]’으로 구성된다. 삼방으로 형성된 태아는 땅에 놓인 순간부터 밖에서 영양을 공급받아 섭취하면서 성인으로 성장하게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마음과 생명의 기와 몸’은 순수한 상태를 잃어버리거나 변질되거나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는 삼진의 본질적인 특성인 ‘선한 마음, 청정한 기, 돈후한 몸’이 현실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변화되고 변질되고 변형이 됨’을 뜻한다. 이로써 삼진은 외부의 영향으로 물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은 “물들지 않는 것은 진이고, 물드는 것은 망이다. 선은 쉬지 않는다. 쉬는 것은 악이다. 청은 흩어지지 않는다. 흩어지는 것은 탁이다. 후는 줄어들지 않는다. 줄어드는 것은 박이다[眞之爲不染也 其染者爲妄也 善之爲不息也 其息者爲惡也 淸之爲不散也 其散者爲濁也 厚之爲不縮也 其縮者爲薄也].”라고 했다.
<삼망의 존재론적인 의미> :
인간을 구성하는 ‘심ㆍ기ㆍ신’은 누구나 삶의 과정에서 다양한 환경에 접하면서 ‘물들게 되고’, 결국 삼망으로 뿌리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삼신에게서 받은 삼진이, 인간을 구성하는 ‘심ㆍ기ㆍ신’의 삼방에 안착하여 유지되고 있을지라도, 인간이 생명활동을 벌이는 동안 ‘심ㆍ기ㆍ신’이 갈라지고 달라지고 변형이 되어 본래의 삼진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게 됨을 뜻한다.
‘삼방’이 물들어서 ‘삼망’으로 뿌리내리게 됨을 「삼일신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말하기를, (삼망은) 심기신이다. 마음은 (삼신의) 성에 의거하나 (착하고 도리에 맞는) 선과 (도리에 어긋나는) 악이 있다. 선한 마음은 복을 받지만 악한 마음은 화를 부른다. (생명의) 기는 (삼신의) 명에 의거하나 (맑고 깨끗한) 청기와 (흐리고 더러운) 탁기가 있다. 청아한 기운은 장수하고 탁한 기운은 요절한다. 몸은 (삼신의) 정에 의거하나 (두텁게 보호하여) 후함과 (방치하여 위태로운) 박함이 있다. 후한 몸은 (빼어나고 소중하게 되어) 귀하고 박한 몸은 (쓸모가 없어 업신여김을 받을 정도로) 천하다[曰心氣身 心依性 有善惡 善福惡禍 氣依命 有淸濁 淸壽濁夭 身依精 有厚薄 厚歸薄賤].”
삼신의 진성眞性이 머무는 ‘심방’은 어떻게 거짓된 것으로 뿌리내리게 되는가? 진성의 본질적인 특성은 원래 선善 자체이다. 인간의 ‘마음[心]이 성에 의거한다’함은 삼신의 진성에 의존함을 뜻한다. 즉 마음의 근본은 삼신의 진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현실적인 생명으로 잉태되면서 마음[心]이 자리 잡게 되는데, 마음은 아무런 형체도 없지만 물리적인 제약으로 인해 혼돈에 빠지기 시작하고, 곧 순수한 선善이 물들기 시작한다. ‘물든다’는 뜻은 마음에서 진성의 본래적인 특성인 순수한 善이 결여缺如되어 드러남을 의미한다. 선의 결여는 곧 악惡으로 표현된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마음은 선이 거처할 장소를 점차 잃게 되고, 결국 악의 소굴로 변화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선악을 주관하는 것은 성性이고, 타고난 그 진성을 존속하고 유지하는 주체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을 위협하는 것은 혐오嫌惡이다. 혐오로 물든 인간의 마음은 당연히 불행과 재난, 근심과 허물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신의 진성이 위태롭게 되고 악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삼신의 진명眞命이 머무는 ‘기방’은 어떻게 거짓된 것으로 뿌리내리게 되는가? 진명의 본질적인 특성은 원래 맑고 청아함[淸] 자체이다. 인간의 ‘생명의 기[氣]가 명에 의거한다’ 함은 삼신의 진명에 의존함을 뜻한다. 즉 인간 생명의 근본은 삼신의 진명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적인 존재로 잉태되면서 생명체를 기르고 역동적으로 보호하는 기[氣]가 자리 잡게 되는데, 생명의 기는 아무런 형체가 없지만 물리적인 제약으로 인해 혼탁混濁에 빠지기 시작하고, 곧 맑고 순수함이 물들기 시작한다. ‘물든다’는 뜻은 생명의 기에서 진명의 본래적인 특성인 맑고 청아함이 변질됨을 의미하는데, 맑고 청아함의 결여는 곧 탁함[濁]으로 표현된다. 그럼으로써 인간 생명의 기는 맑고 청아함이 거처할 장소를 점차 잃게 되고, 결국 탁함의 소굴로 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것은 명命이고, 타고난 그 진명을 유지하고 존속하는 것은 생명의 기이다. 이러한 생명의 기를 위협하는 것이 나쁨[醜]과 탁함[濁]이다. 나쁨과 탁함으로 전혀 물들지 않은 생명의 기는 진명의 청아함을 그대로 유지하므로 오래 살지만, 혼돈에 빠져 물들기 시작한 인간생명의 기는 탁해지면서 활력을 잃게 되고 곧 요절하게 된다.
삼신의 진정眞精이 머무는 ‘신방’은 어떻게 거짓된 것으로 뿌리내리게 되는가? 진정의 본질적인 특성은 돈후함[厚] 자체이다. 인간의 ‘몸[身]이 정에 의거한다’ 함은 삼신의 진정에 의존함을 뜻한다. 즉 인간 몸의 근본은 삼신의 진정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로 잉태되면서 생명체로 활동하는 몸[身]이 자리 잡게 되는데, 몸은 물리적인 형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의 제약으로 인해 빈천貧賤에 빠지기 시작하고, 곧 후함이 물들기 시작한다. ‘물든다’는 뜻은 몸에서 진정의 본래적인 특성인 돈후함이 결여됨을 의미하는데, 돈후한 몸의 결여는 곧 박함[薄]으로 표현된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몸은 귀함이 거처할 장소를 점차 잃게 되고, 결국 박함의 소굴로 전락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천박으로 물든 몸은 선한 마음과 맑은 생명의 기를 보호할 수 없고, 하찮은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선한 마음과 맑은 생명의 기를 주관하는 것은 정精이다. 이러한 진정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은 몸이고, 몸짓은 곧 선악의 마음과 청탁의 기를 나타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천박한 모습이나 행위는 고귀함과 고결함을 위협한다. 빈천함과 천박함이 전혀 없는 진정은 돈후함을 보전함으로 오래도록 고귀하지만, 무절제한 혼돈에 빠진 몸은 빈천한 존재로 전락한다. 이러한 빈천함을 없애고 후함을 기르기 위해서는 음식을 충분히 골고루 섭취하면서 천지의 생명 기를 모으는 수행이 필요하다.
<매듭 말> :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물들어서 세 가지 망령된 것, 즉 삼망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마음은 선악善惡이 있기 때문에 길함[吉]과 흉함[凶]의 집이며[心房], 생명의 기는 청탁淸濁이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방[氣房]이며, 몸은 후박厚薄이 있기 때문에 너그러움과 욕망이 담긴 그릇[身房]이다. 인간의 마음[心]은 진성에 의거하나 선악으로 나뉘고, 생명의 기[氣]는 진명에 의거하나 청탁으로 나뉘고, 마음과 생명의 기로 이루어진 몸[身]은 진정에 의거하나 후박으로 나뉘게 된다. 따라서 지상에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난 인간은 누구나 삼진과 삼망이 서로 뒤섞인 채 살 수밖에 없다.
만일 ‘선함 ㆍ 청아함 ㆍ 돈후함’으로 발현되는 ‘삼진’이 땅에 전혀 미혹됨이 물들지 않고 삼신의 본성인 ‘성性ㆍ명命ㆍ정精’을 순수 그대로 발현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런 사람은 마음이 훤하게 밝아 선하고 복이 있으며, 생명의 기가 깨끗하고 맑아 장수할 뿐만 아니라, 너그러운 모습으로 귀하고 후한[善淸厚] 상태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상철上哲이 통하는 ‘신적인 사람[神人]’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삼진’이 물들어 ‘삼망’으로 전락하기 때문에, 마음에는 ‘선과 악’, 생명의 기에 ‘맑음과 탁함’, 몸에 ‘후함과 박함’이 교차하게 마련이다. 만일 ‘선하고 청아[善ㆍ淸]’하나 박薄하다면, 그런 사람은 복되고 장수하지만 너그럽고 귀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만일 ‘선하고 돈후[善ㆍ厚]’하나 탁濁하다면, 그런 사람은 복되고 너그럽고 귀하지만 요절夭折하게 된다. 만일 ‘청아하고 돈후[淸ㆍ厚]’하나 악惡하다면, 그런 사람은 장수하고 귀하지만 복이 없다. 만일 ‘선하기만 하고 청淸 ㆍ 후厚가 없다’면, 그런 사람은 복은 있으나 단명하고 귀하지 못하다. 만일 ‘청아함만 있고 선善 ㆍ 후厚가 없다’면, 그런 사람은 장수하지만 복도 없고 귀하지도 않은 자이다. 만일 ‘후함만 있고 선善 ㆍ 청淸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귀하지만 복도 없고 단명하게 되는 자이다. 만일 ‘선善ㆍ청淸ㆍ후厚가 전혀 없고 악惡ㆍ탁濁ㆍ박薄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악하여 복도 없고, 탁하여 단명하고, 천박하여 귀하지도 못하므로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