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신고三一神誥」가 인도하는 진아眞我(21)】
“총명하고 밝은 사람은 느낌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게 하고, 접촉을 금하고, 오직 한 뜻으로 행하고 삼망을 고쳐서 삼진에 이르면, 삼신의 조화의 기틀이 크게 발휘하느니, (삼신의) 성에 통하여 공업을 완수하는 것이 이것이다[哲 止感 調息 禁觸 一意化行 改妄卽眞 發大神機 性通功完 是]”(「삼일신고」)
“일의화행 개망즉진一意化行 改妄卽眞”
사람은 태어나면[生] 누구나 예외 없이 성장의 가도를 걷는다[長]. 왕성한 성장의 정점에 이르게 되면[斂] 인간은 기력이 쇠퇴衰退하면서 늙어가다가 반드시 삶의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문제는 삶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당면하게 되는 참을 수 없는 고통苦痛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건전한 삶을 저해하고 단축시키는 병病과 노쇠老衰, 그리고 생애를 매듭짓는 죽음이다. 다행스럽게도 일평생 자신의 생명을 잘 돌봐서 병으로부터의 고통은 빗겨갈 수는 있겠으나, 노쇠와 죽음이 가져오는 고통의 한계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노쇠와 죽음의 고통이라는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길은, 동기와 목적이 각각 다를지라도, 두 측면으로 압축하여 접근해볼 수 있다. 하나는 지혜를 통해 근원의 진리를 찾아 자율적으로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적인 존재자에 귀의歸依하여 타율적으로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대체로 학문의 세계를 이끌어온 철학자들이 제시한 방식이고, 후자의 경우는 종교문화를 선도해온 성직자들의 직설直說일 것이다.
서양철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플라톤(Platon)은 가사적인可死的인 현상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 지혜를 통해 불변하는 본성적인 실재계를 자발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이데아(idea) 세계로의 회기回歸를 제시한다. 반면에 기독교의 성자라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는 현실적인 삶의 고통 속에 허덕이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충실한 믿음을 통해 타율적으로 은총을 받아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천국으로 진입할 것을 설파한다. 인륜의 도덕성을 중시하는 동양사상의 사고에서는 일편단심으로 도道를 잘 닦아 천지의 마음을 얻어 천지와 하나 된 삶을 살 수 있는 성도聖道를 권장했고, 반면에 마음철학의 으뜸이라 불리는 불가佛家는 연기緣起의 도를 증득하여 일체의 고통을 파기하고, 마음을 잘 닦아 우주법계와 하나가 되는 자성본불自性本佛을 제시했다.
그러나 태고시대 인류가 처음으로 문명화의 시점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전해진 인류 최초의 정통 수행서 「삼일신고」는 노쇠와 병[衰病], 죽음이라는 고통의 한계상황을 극복하여 무병장수無病長壽할 수 있는 방도를 본질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것은 삼신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려준 본연의 ‘삼진’으로 돌아가 진인眞人, 선인仙人, 신인神人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일의화행一意化行 개망즉진改妄卽眞”을 통해서 성취된다. 다시 말하면 세인世人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자아의 수련을 통해 ‘진성’의 순수한 선善, ‘진명’의 맑고 깨끗한 청淸, ‘진정’의 너그러운 후厚를 실현하여 삼신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본연의 ‘삼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고[返眞], 이로부터 무병장수가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진이 있어 살고, 삼망이 있어 사멸한다[曰有眞而生 有妄而滅]”(『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고 하기 때문이다.
무병장수의 비결은 자아가 곧 ‘진아眞我’로 전환하여 ‘삼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아가 ‘진아’로 거듭날 수 있는가 이다.
‘진아’란 ‘진정으로 참된 자아’라는 뜻이다. 이는 두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는 올바르고 거짓됨이 전혀 없는 진실성眞實性이고, 다른 하나는 자체로 변함이 없는 고정성固定性이다. 따라서 ‘진아’란 진실하고 변함이 없는 ‘일정한 마음[一定之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단군세기』 <서문序文>은 “마음을 흩어지지 않게 고정하여 불변하는 것을 일러 진아라고 한다[定心不變 謂之眞我]”고 했고, 맹자孟子는 마음의 동요나 흔들림이 없는 “부동심不動心”을 말했다. 다시 말하면 ‘진아’는 상황에 따라 이런 마음이 되기도 하고 또 저런 마음이 되기도 하는 그런 요동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로 고정하여 불변하는 진실한 마음’, 한마디로 일심一心을 가진 자이다.
‘진아’로 거듭나는 첫걸음은 ‘일의화행一意化行’이다. ‘일의화행’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일의一意’는 글자 그대로 말하면 ‘하나의 생각(하나의 뜻)’이고, ‘화행化行’은 ‘변화해서(바꾸어서) 행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일의화행’은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바꾸어서(하나의 뜻을 새워서) 행한다’는 의미로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일의화행’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모든 생각이나 삿된 사념들을 모두 끊어버리고 ‘하나로 정한 뜻(一意)’으로 돌아가(化) 행한다(行)는 의미다. ‘하나로 정한 뜻’은 바로 ‘삼진’으로 돌아가고자[返眞] 하는 일심이다. 이는 어떠한 유혹이나 자극에 의해서도 흔들림이 없이 일심의 경계에서 세운 뜻으로 돌아가 행하는 불변부동不變不動한 마음을 뜻한다.
‘일의화행’은 바로 ‘정일집중精一執中’과 같은 마음이다. ‘정일집중’에 대해 『서경書經』의 <대우모大禹謨>편은 “사람의 마음이란 갈대와 같아서 언제 변하게 될지 몰라 항상 위태하고[人心惟危], 영원하고 불변하는 천도의 마음이라는 것은 아주 미미하고 은미하여 얻기가 어려운 것이니[道心惟微], 오직 정성을 다해 성실한 마음과 일편단심으로 한마음이 되어[惟精惟一] 진실로 그 중도를 잡아야 한다[允執厥中]”고 정의한다. 달리 말하면, ‘정일집중’은 삼신하느님이 내려준 ‘진실한 것[三眞]’, 즉 ‘천도’가 이미 자신에게 확연하게 내재되어 있으나, 삶의 과정에서 변질되고 망각되어 은미하게 되어있으니, 그 ‘천도’를 찾으려는 불변의 일념을 세워 초지일관初志一貫으로 실현하라는 뜻이다.
‘정일집중’을 함의하는 ‘일의화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삼망을 고쳐서 삼진으로 돌아감[改妄卽眞]”이다. ‘삼망’은 다름 아닌 개별적인 인간을 구성하는 세 가지 근본요소, 즉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마음[妄心]’ ㆍ ‘분열과 응축으로 요동치는 혼탁한 기[妄氣]’ ㆍ ‘늘어나고 줄어들어 변형이 되는 몸[妄身]’이다. 반면에 ‘삼진’은 삼신하느님이 내려준 진실한 세 가지, 즉 ‘진성眞性 ㆍ 진명眞命 ㆍ 진정眞精’이다. ‘일의화행’은 고정불변하는 한마음으로 ‘삼망’을 바꾸어 ‘삼진’으로 돌아가[返眞] ‘진아’로 거듭나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삼망을 바꾸어서 삼진으로 돌아간다[改妄卽眞]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망심’에서 비롯하는 거짓되고 그릇된 마음[惡心], ‘망기’에서 비롯하는 더럽게 변질된 기운[濁氣], ‘망신’에서 비롯하는 천박하게 변형된 몸[薄身]을 고쳐서 본연의 순수하고 선한 마음[善心], 전혀 오염되지 않은 맑은 기운[淸氣], 충만하고 돈후한 몸[厚身]을 회복하여 한다. 그래야만 ‘삼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삼신하느님이 내려준 진실한 세 가지, 즉 “성은 이른바 선善이요, 명은 맑음[淸]이요, 정은 후함[厚][乃性之所善也 乃命之所淸也 乃精之所厚也]”(『太白逸史』「蘇塗經典本訓」)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개망즉진’하여야 하는가? 인간은 삼신하느님이 내려주는 세 가지 진실한 것을 받아 고귀한 생명으로 잉태되고[同受三眞], 인간으로 태어나 영양營養 활동을 지속해가면서 미혹될 수밖에 없다[迷地]. 이 과정에서 ‘삼망’이 뿌리를 내리게 되고[三妄着根], 급기야 ‘삼진’과 ‘삼망’이 서로 마주하여 ‘감感 · 식息 · 촉觸’의 삼도를 지어낸다[眞妄對作三途]. ‘삼도’를 지어내는 상태에서 평생을 제멋대로 살게 된다면[任走], 인간은 필연적으로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이다[生長消病歿]. 따라서 인간이 생노병사生老病死의 한계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삼일신고」에서 권장하는 수행법, 즉 ‘지감, 조식, 금촉’의 수련법을 통해 ‘그릇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혼탁한 기’를 ‘맑은 기’로, ‘천박한 몸’을 ‘돈후한 몸’으로 바꾸어 본연의 ‘삼진’을 회복하고, ‘진아’로 거듭남으로써 무병장수할 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망즉진’의 핵심이다.
‘개망즉진’하여 ‘진아’로 거듭난 사람, 즉 ‘삼망’의 ‘악 ㆍ 탁 ㆍ 박’을 제거하고 ‘선 ㆍ 청 ㆍ 후’를 회복하여 본연의 ‘삼진’으로 돌아간 사람은 곧 ‘진실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란 뜻의 ‘철인哲人’이다.
‘철인’은 어떤 사람인가?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철인’은 수행을 통해 ‘진아’로 거듭남으로써 ‘진인’, ‘선인’, ‘신인’과 같은 모습이다. 그런 사람은 지혜로움으로 가득하여 마음 씀이 항상 선하고, 주변으로 풍기는 기운이 늘 맑으며, 외견으로 볼 때 중후하고 덕망 있는 풍모를 갖추게 된다. 반면에 수행을 하지 않아 ‘삼망’에 물들어 거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마음 씀이 그릇되어 늘 변덕스럽고 거짓되고, 그 기운이 혼탁하여 거칠고 사악하고, 후덕하지 못하여 중후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형모로 전락한다. 그래서 철인의 길을 가는 사람은 마음이 ‘선하여 덕이 넘치고 행복이 가득하고[善福]’, 기운이 ‘맑아서 생명활동이 질서 있게 일어나 천수를 누리고[淸壽]’, 풍모가 ‘후덕하여 사려思慮와 관용寬容이 있고, 언행이 상스럽지 않아 품위가 있어 존귀하다[厚貴]’.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그릇되어 허물이 찾아와 화가 미치고[惡禍]’. 기운이 ‘혼탁하여 생명의 기가 어지럽게 흩어짐으로써 요절하게 되고[濁殀]’, 풍모가 ‘빈천하여 어질고 너그러운 품성이 없어 비천하다[薄賤].
서양문화권에서는 ‘철인’을 어떻게 규하고 있을까? 서양 철학사에서 말하는 ‘철인’은 통상 ‘철학자’를 가리킨다. 철학자는 어원적으로 보면 ‘지혜를 열광적으로 사랑하는 사람(philosopher)’을 뜻한다. 여기에서 ‘지혜’란 단순히 변화에 종속하는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을 말한다. 최고의 지혜는 가장 보편적이고,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근원에 대한 진리인식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따라서 서양 고대의 철학자들은 최고의 지혜를 인식하여 근원의 존재를 닮아감으로써 그것과 함께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고 통칭할 수 있다.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 정의하고자 노력했던 소크라테스(Socrates), 이데아들 중의 최고의 이데아(Idea)를 탐구했던 플라톤(Platon), 부동의 원동자로서의 신(Theos)을 말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우주만물의 근원으로 로고스(Logos)를 인식하고 평정심으로 돌아갈 것을 설파한 스토아철학(Stoics)이 대표적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