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라고 묻지 마라 – 3)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
그러나 또 다른 독일의 시인 괴테는 앞서의 시인과 달리 적극적으로 실재에 대해 자기 주장을 한다. “어떻게? 언제? 어디에? – 신들은 말이 없다. 그대는 때문에(Weil)에 의지하되, 왜(Warum)를 묻지 마라.”(Der Satz vom Grund 근거율)
다음의 시들이 또한 괴테의 말과 교감한다.
“장미는 이유(Warum) 없이 존재한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Weil) 핀다. 장미는 자신에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지 안 보는지 묻지 않는다.”(실레지우스)(Der Satz vom Grund 근거율)
“국화는 절로 그러하게 피어있네[寒花徒自榮].”(도연명)
“가만히 바라보면 만물은 스스로 얻은 것 같다[萬物靜觀皆自得].”(정명도)
하이데거가 직접 언급했던 괴테와 실레지우스를 포함하여 이들이 바라본 세상은 적어도 인과율의 멍에에서 풀려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있음’은 ‘인과적 질서 아래 놓여 있음’, ‘선행하는 원인의 작용에 따른 결과로 주어져 있음’이 아니다. 묻는 것도 따지는 것도 거절하고 다만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로 존재는 비非–근거(Ab-grund)이다. ‘-’가 빠진 독일어 ‘Abgrund’는 심연深淵을 뜻한다. 깊은 골짜기에 던진 돌처럼, 우리가 제기한 ‘왜’은 물음은 존재의 심연에서 사라진다.
그렇다면 ‘왜’의 근거를 거부하는 세계는 어떻게 있는가? 하이데거가 예로 든 산맥의 경우를 통해 알아보자. 하나의 산맥은 지질학적 구조나 지리학적 형세 혹은 그 밖의 이러저러한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즉 그것이 뉘여 있고 솟아있는 바 그대로 어떻게 있는가? 산맥은 산맥으로서 어떻게 드러나 있는가? 산맥은 순전히 그 현존과 관련해서, 다시 말해 그의 존재에 즉卽해서 유의하면 단순히 “비은폐 안에서 밝게 열리며(aufgehen) 비은폐된 것으로”(Was heißt Denken?사유란 무엇인가?) 들어서 있다. 여기서 ‘aufgehen’의 의미에 친숙해지는 것은 하이데거 존재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독일어 ‘aufgehen’은 ‘오르다’, ‘부풀다’, ‘번영하다’, ‘나타나다’, ‘일다’, ‘명료해지다’, ‘개화開花하다’ 등을 지시한다. 이러한 밝게 트임에서 산맥은 다른 무엇이 아닌 그 자체, 즉 산맥으로서 존립한다.
산맥을 그러한 것으로 있도록 세우는 그것의 존재(현존)는 비은폐인 것이다. 자신을 밝게 드러내며 가까이 이른 존재의 현성現成이 “산들과 집을 존속하게 하고 그러한 머묾으로부터 다른 존재자들 가운데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한다.”(Was heißt Denken?사유란 무엇인가?) 이로써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이란 선행 작용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인과적 사건과는 다른 평면에 놓여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언제? 어디에? – 신들은 말이 없다. 그대는 때문에(Weil)에 의지하되, 왜(Warum)를 묻지 마라.” 하이데거는 이 ‘때문에’(Weil)를 ‘존속함, 머묾’(weilen, währen)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Weil’은 본래 ‘dieweilen’이 축약된 것으로서 대상의 존립과 확실성을 보증하는 어떤 이유나 까닭(Darum)을 묻는 게 아니다. ‘Weil’은 “~하는 동안(so lange als, während)’, ‘존속함’, ‘조용히, 평온하게 그 자체로 움직이지 않고, 즉 고요함 속에 머묾’을 말한다.(Der Satz vom Grund 근거율) 괴테의 또 다른 시구는 그런 의미로 ‘weilen’을 사용하고 있다. “바이올린이 멎고 무용수는 멈춘다(weilt).”
하이데거의 이같은 설명은 ‘weilen’, ‘Weil’의 어원에 대한 사전적 설명과도 부합된다. ‘weilen’의 명사적 형태인 ‘Weile’은 현재는 ‘잠시 동안’, ‘겨를’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고어古語는 ‘wila’로서 인도게르만어족의 어원으로 보면, ‘쉬다, 고요하다(ruhen)’, ‘오랫동안 지속하는(langdauernd)’, ‘평온한, 고요한’(ruhig)에서 나온 말이다. 또 접속사 ‘Weil’은 원래 ‘~하는 동안’, ‘~하는 동안 머묾’을 의미했다. 지금처럼 이유를 묻는 인과적 접속사로만 사용되기 시작 한 것은 지난 18세기 이후부터서이다.(Duden Herkunft[SW]). ‘Weil’은 본래 모든 근거나 이유를 거절하고 단순히 그 자체로 고요히 머묾으로서 스스로가 ‘근거’ 혹은 근거 아닌 근거인 것이다.
또 하이데거는 그러한 머묾(‘weilen’, ‘währen’, ‘immerwähren’)이 존재(‘sein’)란 말의 오랜 의미라고 밝힌다. ‘있다’는 본래 ‘머물다’였다는 것이다. 이 경우 머묾으로서의 ‘weil’은 ‘근거’이면서 존재가 된다. ‘Weil’ 안에서 ‘근거’와 존재는 함께 속하는, 동일한 것이다. 머물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이는 비은폐라는 존재의 근본특성으로부터 이해가능하게 된다. 존재는 스스로 환히 빛나며 현존에 이름으로써 고유하게 머문다. 그 점에서 비은폐는 존재 자체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근거’다. 여기서 앞서 밝힌 ‘존재(자연)=앞에 내세움[근거]=밝게 드러나 가까이 머묾=비은폐[진리]’의 사태가 다시 확인된다.
비은폐에서 존재가 자신을 내주는 만큼 또는 존재가 진리로 머무는 곳/때(Weite und Weile)에, 다시 말해 근거 아닌 근거인 ‘때문에’(Weil)로부터 존재자는, 산, 집, 장미는 그러한 것으로서 비로소 존재한다. 그것들은 존재 자체의 비은폐에서, 그 환히 트임의 시–공간에서 그러한 것으로 서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에게 실레지우스의 시구는 존재자가 존재하는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장미는 이유(Warum) 없이 존재한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Weil) 핀다.” 또 “찬 가을의 꽃[국화]은 절로 그러하게 피어 있다.”
하이데거는 또 다른 곳에서 존재의 비은폐를 “개방된 여지(영역)(Gegend)” 또는 “사역四域”(Gegnet)으로써 생기하는 사태로서 사유한다. 사방으로 밝게 트이는 “사역”의 영역은 「사물」 강연 등에서는 ‘사방四方 세계’(die Geviert-Welt)로 불린다. 여기서 “사방”(Geviert)은 사물에 불러 모여진, 하늘, 땅, 인간, 신적인 것들[四者]의 단일한 어울림으로 규정된다.
하이데거는 사역의 펼쳐짐에서 혹은 사방의 ‘찬란한 윤무輪舞’에서 그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로 어울리며 그 자신으로 자유롭게 돌아간다고 밝힌다. 사역은 “사물을 그 자체에서 사물로서 머물게 한다.”(Gelassenheit내맡김)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하게 함은 사물을 낳는 것도 작용하게끔 하는 것도 아니고 초월론적으로 대상화하는 것도 아니다. 사물을 사물로서, 즉 다른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서 현전現前하게 하는 것이다. “사역은 모든 것을 사역화하면서 그것들을 서로 불러 모아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가 동일한 것에 고유하게 고요히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Gelassenheit내맡김) 이런 일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일어난다. 유비적으로 말하면 사역은 스스로 어둠으로 물러나면서 별들[존재자 전체]을 빛나게 하고 가까이 모으는 밤[존재]과 같은 것이다. 누구도 밤을 반짝이는 별들의 원인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밤은 별들을 빛나게 한다.
그리고 사역은 그를 향한 인간의 사유 안에서 그렇게 한다. 사역에 응대하는 사유는 스스로를 주체로서 경험하는 인간이 근거나 원인을 구하며 어떤 것을 자기 앞에 객관으로 대상화하는 표상함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사유다. 왜를 묻는 것이 추궁, 몰아세움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내맡김으로써 수행된다. 내맡기는 것은 의지 혹은 주체의 종식으로써 이뤄진다. 그런 의미로 무위無爲이고 기다림이다. 그것은 사방으로 펼쳐지는 사역을, 뒤로 물러서며 그리로 향하는 방식으로 맞이하는 것으로서 “작용하려고 하고 현실성을 그의 요소로서 의욕하는”(Gelassenheit내맡김) 의지와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의욕하지 않음(Nicht-Wollen)을 의욕해야 한다. 단지 ‘가만히 바라봄’[靜觀]이 만물의 스스로 얻는 자리를 열어주는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사역화를 위한 장場으로 스스로를 바칠 때, 사역이 비로소 참되게 트이면서 사물은 그 사역의 때와 폭에서 사물로서 고유하게 현전한다. 다시 밤의 유비로 말하면, “점점 더 아름답게 빛나며 별들을 경탄스럽게 하는 밤으로”(Gelassenheit내맡김) 깊이 들어서는 인간 본질의 상응에서 밤은 별들을 하나로 모으며 그것들을 빛나게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밤과 별 사이의, 드러내고 감추는 유희遊戲를 바라볼 따름이며, 그에 내맡길 뿐이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근거가 아닌(Ab-grund) 심연(Abgrund)으로서, 자신을 물러나면서 존재자를 고유하게 현전現前하게 하는 사태를 놀이라고 부른다. “존재의 본질을 가리킬 만한 보기는 존재자 가운데는 어디에도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존재의 본질이 놀이 자체라는 데 있을 것이다.”(Identität und Diffferenz동일성과 차이) 존재와 존재자가 서로 겹치며 펼쳐지는, 마치 서로 꼬리를 잡고 도는 듯한 놀이에는 이유와 근거가 없다. “‘때문(Weil)’은 놀이(유희) 안으로 가라앉는다. 놀이는 ‘왜’가 없다. 그것은 놀이하기 때문에 놀이한다. 그것은 단지 놀이로 머문다: 가장 높은 것이자 가장 깊은 것으로서”(Der Satz vom Grund 근거율)
놀이가 놀이하는 저 심연 앞에서 노자老子는 “황恍이여 홀惚이여”라고 경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는지 모른다. “도는 비어있으나 어떤 씀도 그것을 닳게 하지 않는다. 온갖 것들의 조상과 같다. … 나는 그것이 누구의 아들인지 모르나 신[帝]보다도 앞서는 것 같다.”(『노자』)
인간은 하늘과 땅, 신들의 순수한 연관, 즉 존재 자체의 놀이에 ‘죽을 자’로서 참여한다. 그에게는 “놀이의 법칙”(Der Satz vom Grund 근거율)에 오롯이 맡기는 가능성만이 남아 있다. 놀이는 놀이할 뿐이다.
삶의 확고한 지지대로 간주돼 온 ‘왜’의 발판에서 발을 뗄 때, 우리는 어쩌면 인도의 영성적 사유와도 진지한 대화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은 무한한 가능성, 즉 지고의 실재인데, 그것은 그대의 안에 있으면서 그 힘과 빛과 사랑을 모든 경험에게 던져줍니다. 그러나 이 근원은 하나의 원인이 아니며, 어떤 원인도 근원은 아닙니다.” “부재의 상태, 비존재의 상태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원인이라는 개념에는 한 원인이 먼저 존재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대의 본래적 상태는 이룸(변화)의 한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아이 앰 댓(I AM TH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