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23회
아바르 제국과 프랑크 제국
앞에서 본대로 아바르 제국은 사실상 옛 훈 제국을 그대로 재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시아계통의 기마전사들이 유럽의 여러 족속들을 지배한 양상은 똑 같았다. 그런데 훈 제국이 아틸라라는 걸출한 지도자의 사후 권력승계 문제로 일어난 내분 때문에 무너졌다고 한다면 아바르 제국은 프랑크족에 의해 멸망하였다고 할 수 있다.
프랑크족은 아틸라 시대에 갈리아 동북부를 점령하였던 게르만 계통의 족속이다. 이들의 원거주지는 라인강 하류 지역이었는데 로마 제국의 혼란을 틈타 갈리아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들의 세력은 차츰 확대되어 클로비스 왕 시대에는 서고트 왕국을 점령하여 갈리아 북부 뿐 아니라 갈리아 서부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클로비스 왕이 죽었던 511년의 지도를 보면 갈리아 동남부의 부르군드 왕국과 지중해 연안의 서고트족 영토를 제외하면 현재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은 프랑크족의 영역이었다. 물론 여기에 더해 벨기에와 라인 동쪽 지방의 일부도 프랑크 왕국의 영토였다. 부르군드 왕국도 530년대에 클로비스의 아들들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 시기에 프랑크족에 의한 갈리아의 통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6세기 중반 아바르족이 서쪽으로 진출하였을 때 아바르족은 프랑크족과 충돌하였다. 아바르 사절단이 비잔틴 제국의 수도에 모습을 드러낸 지 몇 년 되지 않은 562년경 벌써 아바르와 프랑크족의 싸움이 있었다. 당시 프랑크왕국은 여러 명의 왕들이 영토를 나누어 다스렸는데 그것은 왕자들 모두에게 왕국의 영토를 나누어주는 프랑크족의 상속관습 때문이었다. 클로타르 왕의 네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시게베르가 가장 동쪽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왕국의 수도는 파리에서 150 km 정도 동쪽에 위치한 렝스에 있었다. 정확히 어느 곳에서 아바르족과 전투가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아마 프랑스 동부 어느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두 번째 침입에서는 시기베르 왕은 아바르족의 포로가 되었다. 프랑크 왕은 아바르족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아바르와 강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 《프랑크족의 역사》 4.29) 아바르족은 갈리아 영토를 침략하여 차지할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시기베르로부터 공납을 약속받고 물러갔다. 이후 아바르는 프랑크족의 동맹으로서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존중하여 침략행위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크 왕국과 아바르의 관계는 8세기 후반 샤를마뉴 때 바이에른 공국 — 영어로는 바바리아 — 문제로 급속히 악화되었다. 바이에른 공 타실로(Tassilo)가 프랑크 족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바르 족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샤를마뉴는 그의 봉신인 타실로가 이교도인 아바르 족과 손을 잡고 자신을 배반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의 지위를 박탈하자 아바르 족이 프랑크 왕국을 공격하였다. 아바르 군은 알프스 너머의 프리울리를 공격하고 바이에른 국경 지역을 침략하였다. 아바르 족과 프랑크 왕국의 전쟁은 8년간(791-799) 계속되었다. 아바르 족은 샤를마뉴의 지배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작센 족과 손을 잡기도 했지만 전쟁은 샤를마뉴의 승리로 끝났다.
아바르 제국이 패배한 이유로는 아바르 족 사이에서의 내분을 무시할 수 없다. 카간과 투둔 — 투둔(tudun)은 아바르 족 부왕의 칭호 가운데 하나였다 —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투둔은 샤를마뉴의 수도에서 세례를 받기까지 하였다. (795) 여러 아바르의 수령들이 샤를마뉴 측과 개별 협상을 벌일 정도로 아바르 제국의 통일적 권력체계가 붕괴되어 있었다. 프랑크 군은 아바르 족의 본영으로 진입하여 그 동안 아바르 족이 쌓아놓았던 엄청난 부를 약탈하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각기 네 마리의 황소가 끄는 열다섯 대의 수레로 보물들을 샤를마뉴의 궁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는 9세기 말 성 갈렌 수도원의 수도사 노트커가 저술한 《샤를마뉴 전기》 (라틴어로는 ‘샤를마뉴의 행적 Gesta Caroli Magni’이라고 제목이 붙어 있다)에 나오는 기록이다. 아바르 전쟁에 참여한 전사의 증언에 따르면 아바르 인들의 영토는 아홉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모두 나무로 이중의 방책을 만들고 그 사이에 돌과 석회를 다져넣은 방책이었다고 하는데 맨 바깥의 성벽은 아바르 나라 전체를 에워싸고 있었다고 한다. 이 말은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지만 아바르 인들의 본영이 여러 겹의 방책으로 둘러싸여 있었을 가능성은 많다. 노트커의 말에 따르면 아바르의 본영을 아바르인들은 ‘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바르인들은 비잔틴 제국과 피지배 족속들로부터 받은 재물들을 대부분 이곳에 보관하였다. 아바르 족은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 574-582) 때부터 평화와 동맹의 대가로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금화 8만 개를 매년 받았다. 이 액수는 비잔틴이 슬라브족의 침략으로 곤경에 처했던 585년에는 10만 개로 인상되었다. 이렇게 2세기 이상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받은 금화는 아바르 전사들에게 일부가 분배되었겠지만 상당 부분은 아바르 본영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샤를마뉴는 아바르로부터 약탈한 전리품을 그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는 한편 수도원과 교회에도 많은 양을 기증하였다. 그리하여 비잔틴에서 기원한 엄청난 양의 황금이 아바르 족을 거쳐 서유럽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샤를마뉴는 아바르 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우두머리인 카간의 지배 아래 모여서 살도록 허용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자치는 20여년 후에는 프랑크 족의 직접 행정으로 대체되었다. 자신들의 국가가 사라진 아바르 전사들은 예전에 자기들의 땅이었던 곳에서 프랑크 왕국에 세금을 바치며 사는 예속 농민이 되었다. 그 땅의 소유권은 대부분 독일 교회와 수도원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판노니아의 이러한 아바르 농민들은 점차 기독교화 되었다. 그러나 아바르 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9세기 말 아시아에서 온 새로운 유목민 전사들인 마자르인들이 판노니아를 정복하였을 때 티자 강 상류 지역에서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고 불가리아의 지배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아바르 족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사츠데키–카르도스, ‘The Avars’ p.220)
참고서적
Eginhard et Notker the Stammer (tr. by D. Ganz) Two Lives of Charlemagne (Penguin, 2008)
S. Szadeczky-Kardoss, ‘The Avars’ in D. Sinor ed. The Cambridge History of Early Inner 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