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26회
불가리아 제국의 기독교화
불가르족은 다뉴브 하류에 정착하여 국가를 건설한 이후 그 전통적인 신앙을 상당 기간 유지하였다. 물론 불가르족의 고유한 종교라는 것이 ‘텐그리’라고 불리던 천신에 대한 숭배 말고는 자세한 내용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앞에서 소개한 마다라 기사상 주변에 그리스어로 새겨진 비문에 불가르족의 종교의 모습을 드러내주는 언급을 약간 찾아볼 수 있다. 글씨가 심하게 마모된 상태로 남아 있어 전문의 해독은 불가능하지만 해독가능한 부분에 의하면 자신의 왕권이 텐그리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고 믿었던 불가리아의 칸은 텐그리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제사의식은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의식이었던 것 같다. 비문이 새겨졌던 때로부터 한 세기 뒤 테오파네스는 그의 연대기에서 당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 성벽의 금문(Golden Gate) 근처에서 올린 제사의식을 “더러운 악마적 의식”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리스인들이 보기에 좀 더 끔찍했던 관행도 있었다. 크룸 칸은 전사한 비잔틴의 니케포로스 황제의 목을 잘라 그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휘하의 슬라브 족 수령들과 술을 마실 때 이 잔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Curta, p.150) 기독교도들에 대한 박해도 전해지고 있다. 크룸의 아들 오무르탁 칸(재위 814-831)은 아드리아노플 대주교와 데벨투스 (불가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위치한 트라키아 지방 도시) 주교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 몇 사람과 비잔틴 장군 두 사람을 죽였는데 이들은 비잔틴 제국의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오무르탁의 장남 엔라보타는 자신의 노예를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개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독교도라는 이유 때문에 왕위계승에서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죽임을 당했다. (Fine, p.108)
기독교는 그리스인 포로들이나 망명자들을 통해 전파되었다. 특히 크룸 칸은 아드리아노플 공격하고 그 지역 주민을 일만 명이나 사로잡아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Oblenski, p.39) 일반적으로 불가르 귀족들(볼리아데스)은 기독교에 반감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왕실 내에서도 개종자가 나왔다. 오르무탁의 장남 뿐 아니다. 불가리아 왕으로서 처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보리스 1세 (재위 852-889)의 여동생도 오라비에 앞서 기독교도가 되었다. 보리스 1세가 귀족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정확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여동생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정략적인 이해관계가 작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당시 불가리아는 슬라브족의 모라비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과 서쪽에서 연이어 전쟁을 벌였는데 비잔틴 제국과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리스 칸은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외교적 방책의 하나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그는 비잔틴의 미카엘 3세 황제를 대부로 삼아 세례를 받았다. 이제 비잔틴의 성직자들은 불가리아로 들어와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보리스 칸은 기독교로 개종하더라도 불가리아 교회의 통제권이 비잔틴 제국으로 넘어가도록 허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비잔틴 교회 즉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로마교황청과도 즉각 접촉하였다. 그가 로마 교황 니콜라스 1세에게 보낸 편지에는 기독교의 교리와 의례에 대한 광범한 질문을 담고 있었다. 당시 국가통치와 관련되어 비잔틴의 성직자들이 가르치던 것들에 대해서도 교황청의 답변을 구하였다. 교황청은 보리스 칸의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해 109개 장에 달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내왔다. 그 가운데에는 당시 불가르족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장도 있다. 제35장이 그런 장인데 불가르족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점을 치고 주문을 외우는 관습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런 이교적 관습 대신에 교회에 가서 죄를 회개하고 기도한 후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보리스 칸에게는 유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니콜라스 교황과 포티우스 총주교 사이의 관계가 험악해져 서로가 서로를 파문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던 보리스 칸은 로마 교황이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을 허용할 생각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비잔틴 측에 붙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구로부터 불가리아 교회의 자주권을 얻어내었다. 이것이 불가리아 정교회의 기원이다.
보리스 칸은 불가리아 교회의 자주성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비잔틴에서 파견된 그리스 성직자들에게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어가 아니라 불가리아인 다수가 사용하는 슬라브어로 교회의 책들과 문서들이 번역되고 보급되어야 한다. ‘슬라브 사도들’ 즉 키릴(본명은 ‘콘스탄틴’으로 후일 로마에 가서 키릴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826-869)과 메토디오스(815-885) 형제가 키운 제자들이 이러한 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키릴 형제는 비잔틴 황제에 의해 862년 모라비아 왕국으로 파견되어 선교활동을 하다가 동생 키릴은 로마에서 수도사로 죽고 형 메토디오스는 모라비아에서 주교로 활동하다 죽었다. 그들에게는 클리멘트와 나움 등 여러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885년 독일 교회 당국의 압력 때문에 모라비아에서 쫓겨났다. 보리스 칸은 이들을 적극 환영하고 마케도니아의 오리드에 정착시켰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리드의 성직자 양성 학교에서 클리멘트와 그 동료들은 전에 키릴 형제가 만든 글라골 문자(Glagolitic)를 개선하여 키릴 문자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러시아를 비롯하여 동구 일대에서 사용되는 문자이다. 클리멘트 일행은 교회의 여러 책자를 키릴 문자로 번역하여 보급하였다. 그 결과 불가리아 교회는 그리스 문자로 된 교회전례서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져 보리스 칸이 바라던 대로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이 유지될 수 있었다. 클리멘트는 이러한 공적 때문에 보리스 칸에 의해 불가리아 교회의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보리스 칸이 주도한 기독교의 도입이 마냥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보리스 칸은 장남인 블라디미르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플리스카 근처의 한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기독교를 따를 마음이 없었다. 전통적인 신앙을 유지하려는 반란이 일어나 플리스카 주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쿠르타 교수에 의하면 플리스카 근처의 한 집단매장지에서 발견된 25구의 젊은 남자들의 유골들은 모두 살해당한 흔적이 있었으며 또 흑해 연안의 바르나 근처에서 발견된 대부분 여자들로 이루어진 43구의 유골들도 타살된 유골들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저지른 학살에 분개한 보리스 칸은 수도원에서 돌아와 아들을 왕좌에서 몰아내고 귀족들 — 불가리아의 귀족들을 ‘보일라데스’라고 불렀는데 후일 러시아에서 귀족을 의미하는 ‘보야르’는 여기서 온 말이다 — 전체를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소위 893년의 ‘프레슬라브 회의’인데 프레슬라브에서 회의가 열린 것은 당시 수도인 플리스카가 반란으로 크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분노한 보리스 칸은 블라디미르를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프레슬라브 회의는 블라디미르를 퇴위시키고 그 동생 시메온을 왕으로 앉혔다. 프레슬라브 회의는 불가리아 역사에서 중요한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교회에서 사용되던 슬라브어 즉 클리멘트 일파가 표준화한 슬라브어를 국가의 공용어로 선언하였다. 시메온 왕은 젊어서 콘스탄티노플에 유학하면서 그리스 학문을 배웠는데 그리스 학문에 상당히 능숙하여 ‘반(半)그리스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는 클리멘트 일파의 슬라브어 문예운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러한 기독교화 정책은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의 통합을 촉진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제 불가리아는 불가르 전사귀족이 지배하던 유목민 스타일의 국가에서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는 중세 유럽 국가의 하나로 차츰 변모해 나가게 되었다. 수적으로 소수였던 불가르 전사귀족은 국민의 대다수를 점하는 슬라브족의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슬라브족과 별개의 종족으로서 국가와 사회를 지배하던 불가르족의 종족적 정체성과 그 전통적 종교도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서적
Florin Curta, Southea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500-1250.
Denis Hupchick, The Balkans : From Constantinople To Communism.
W. L. North (tr.) The Responses of Pope Nicholas I to the Questions of the Bulgars A.D. 866. (http://sourcebooks.fordham.edu/Halsall/basis/866nicholas-bulgar.asp)
Dimitri Oblensky, Byzantium and the Slavs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