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이야기 25회
비잔틴과 불가리아 : 불가리아 제1제국의 흥망
비잔틴 제국과 국경을 마주한 불가리아는 무엇보다 스텝의 기마전사 국가였다. 이들의 뛰어난 전투력은 한편으로는 비잔틴에게 큰 위협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필요한 경우에는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중요한 군사자원이기도 하였다.
▲마다라 기사상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재위 685-711)의 경우 잃어버린 왕좌를 불가리아의 2대 테르벨 칸의 도움으로 되찾았으며 718년 아랍인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불가리아 군대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하였다. 그 후 유스티니아누스에 대해 새로운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테르벨 칸은 3천 명의 불가르 군사들을 파견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군사적 지원에 대한 대가가 없을 수 없다. 테르벨은 황제(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유스티니아누스로부터 받았다. 불가리아 동쪽의 마다라에 있는 큰 바위절벽에 새겨진 ‘마다라 기사’의 당당한 모습은 테르벨 칸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Curta, p. 82) 마다라는 당시 불가리아의 수도였던 플리스카에서 남쪽으로 10 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바위절벽 주위에서 천신(텐그리)에게 제사지내던 신전의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불가르 족의 성소가 아니었나 싶다.
테르벨은 그 후 테오도시오스 3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716) 분쟁을 예방하기 위해 국경을 확정하고 교역의 장소와 교역품 및 교역량 등 세세한 규정을 정하였다. 교역관계는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5세 (재위 741-775)가 등장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험악해지기 시작하였다. 황제가 국경지역의 요새를 강화하고 시리아와 아르메니아 주민들을 이주시키자 불가리아 측에서 협정을 위반하였다고 그 대가를 요구한 것이다. 불가르 족의 침공으로 시작된 분쟁은 불가리아 내부로도 번져 왕조의 교체를 가져왔다. 아스파루크의 둘로 가문의 통치가 이 때 끝났다. 비잔틴 황제는 자신에게 유리한 후보가 불가르 칸으로 선출되도록 내정에 간섭하였다.
불가리아는 9세기 초 시메온 1세 (재위 893-927) 때 그 영역이 최대에 도달하였다. 그리스와 크로아티아를 제외한 발칸 반도 전역이 불가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비잔틴의 끈질긴 공격은 1018년 불가리아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데에 이르렀다. 아스파루크에 의해 680년 경 세워져 330여 년 간 존속하였던 이 불가리아를 역사가들은 ‘불가리아 제1제국’이라고 부른다. 1185년 불가르 귀족이었던 테오도르와 아센 형제에 의해 부활한 불가리아를 ‘불가리아 제2제국’이라고 한다. 제2제국은 1396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공식적으로는 1018년에 망했다고 하나 960년대 말 불가리아는 이미 영토의 상당 부분을 비잔틴 제국에게 빼앗겼다. 비잔틴 제국이 용맹하다고 소문난 바이킹족을 불가리아와의 싸움에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당시 비잔틴의 포카스 황제(재위 963-969)는 키예프 루스의 우두머리 스뱌토슬라프를 매수하여 불가리아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전형적인 이이제이 정책이다. 키예프 공국의 스뱌토슬라프는 968년 불가리아의 수도 프레슬라프를 공격하고 보리스 칸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스뱌토슬라프는 남쪽 땅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는 다뉴브 하구의 ‘작은 프레슬라프’라는 뜻의 프레슬라베츠를 새로운 수도로 삼고 그곳에 눌러앉고 싶었다. 키예프 루스의 역사를 담고 있는 《루스 초대연대기》에 의하면 “나는 키예프에 머물고 싶지 않고 다뉴브 강 연안의 프레슬라베츠에서 살고 싶다. 그곳에 모든 부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부터는 금과 비단, 포도주 및 각종 과일들이, 헝가리와 보헤미아에서는 은과 말, 루스에서는 모피와 밀랍, 꿀 그리고 노예들이 들어온다.”고 스뱌토슬라프는 루스의 귀족들 앞에서 말했다. 비잔틴 황제 치미스케스는 루스족 우두머리의 이러한 계획에 질겁하여 격렬한 전투 끝에 스뱌토슬라프를 러시아로 쫓아버렸다. 앞에서 언급한 《루스 초대연대기》는 비잔틴 황제가 엄청난 선물을 안겨주고서야 동맹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스뱌토슬라프의 병력이 실제로는 1만 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많은 수의 비잔틴 군대를 당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아시아에서 도래한 새로운 유목민 페체네그 족이 키예프를 공격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 결합하여 그로 하여금 루스 땅으로 돌아가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루스 족이 불가리아 땅에서 돌아간 후 루스족 이 차지하였던 불가리아 땅은 자연히 비잔틴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제 불가리아 영토는 서쪽만 남고 크게 줄어들었다. 수도도 서쪽의 스코페, 오리드 등으로 옮겨갔다. 두 도시는 모두 지금은 불가리아 땅은 아니고 불가리아에 인접한 마케도니아 공화국 도시들이다.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예전에는 유고 연방에 속했던 나라로 1991년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독립하였다.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와는 구별해야 한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무척이나 못마땅해 한다. 자신들 나라의 영웅인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 출신이거늘 관련도 없는 야만족 출신들이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니… 좌우간 동쪽 영토를 빼앗기고 서쪽 영토만 남은 이 시기의 불가리아 제1제국은 처음에는 스코페, 그리고 좀 더 뒤 사무일 왕 (재위 976-1914)의 시기에는 오리드를 수도로 삼았다. 오리드는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서남쪽 구석에 치우쳐 있는데 같은 이름의 큰 호숫가에 있다. 고대와 중세 시대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 구시가는 고색창연한 도시이다. 로마시대의 극장 뿐 아니라 사무일 왕이 건설한 요새와 많은 교회당들의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오리드는 불가리아 정교회의 총주교좌가 있었던 곳 즉 불가리아 정교회의 수도였다. 9세기 말 키릴 문자를 창건한 키릴(콘스탄티노스)과 메토디우스 형제의 제자였던 클리멘트가 세운 유명한 신학교 덕택에 오리드는 이미 불가리아 뿐 아니라 동유럽의 문화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키릴 형제가 만든 문자는 이곳을 중심으로 동구 전역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사무일은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잃어버린 영토를 일부 되찾았다. 당시 양국 모두가 중시하던 요충지인 세르디카(오늘날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는 사무일이 회복한 곳 가운데 하나였다. 사무일은 비잔틴 제국이 아랍인들과의 싸움에 주력하는 틈을 타서 비잔틴이 지배하던 발칸 반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후일 베네치아가 지배하게 되는 두레스(이탈리아어로는 ‘두라초’)는 아드리아 연안에 면한 전략 요충지로서 이 시기에 불가리아 지배하에 들어간 곳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비잔틴의 바실 2세 황제는 아랍인들과의 싸움에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자 불가리아 정벌 아니 이번에는 완전히 불가리아를 소멸시켜 버리기 위한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비잔틴 군대는 불가리아 군을 압도하였다. 1014년 벨라시차 전투에서 황제군은 14,000 명의 불가리아 군사들을 사로잡아 백 명당 한 명씩만 남겨두고 모두 눈알을 빼버렸다고 한다. 눈이 성한 병사들이 장님이 된 동료들을 인도하여 돌아가게 만든 것이다. 사무일 왕은 장님이 되어 돌아온 군사들을 보고 너무나 충격을 받아 이틀 뒤에 죽었다고 한다. (Hupchick, p.55) 비잔틴 황제는 불가리아의 주요한 도시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고 군대를 파견하지 못한 곳은 반란의 근거지로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저히 파괴하였다. 이로써 아시아 유목민 전사들이 세웠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참고서적
Florin Curta, Southea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500-125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Denis Hupchick, The Balkans : From Constantinople To Communism (Palgrave, 2002)
S. Cross et O. Sherbowitz-Wetzor (tr.) The Russian Primary Chronicle : Laurentian Text (Harvard University Press, 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