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약속 1

     1. 화두

 

1)

 

“따라서 현재의 한류 현상이 크게는 지구화(globalization), 문화의 혼성화(cultural hybridity) 또는 세역화(glocalization), 문화생산과 수용의 권역화(regionalization), 문화적 근접성(cultural proximity) 그리고 문화수용의 능동성(active reception)이라는 다섯 가지의 서로 관련 혹은 대립하는 힘들의 중층적 영향/결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한 연구자의 지적에 일단 동의하고자 합니다. 한국 대중문화가, K-Pop이 현재의 한류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하는 주장도 없지 않지만, 나는 일단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한류 문화의 저변에 대한 확충을 다각도로 점검해보자는 것이죠. 한류의 미래! 한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리고 나의 과제가 되겠지요. 자.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여섯 명의 학생들이 연구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물고 창가로 갔다. 머리가 복잡했다. 아니, 혼란스러웠다. 두 번째 강의였다. 아직도 강단이 낯설었다. 과연 이 직업이 나에게 어울리는 옷일까. 담배 연기를 온몸 깊숙이 삼켰다가 창문을 향해 훅 뿜어냈다. 담배 연기는 안개처럼 사방으로 번졌다.

나는 꿈을 꾼다. 내 기억이 처음 열린 그때부터 지금까지 꿈을 꾸며 살았다. 살고 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누구나, 꿈을 꾸며 산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도. 인간은 누구나 꿈을 꾸며 살고 있다. 과연 꿈꾸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뭐,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살아온 그때까지, 참, 혹독한 꿈을 꾸며, 꿈속에서 살아왔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을 당위로 알았다. 꿈꾸지 않는 자는 죽음이다. 주검이다. 과연, 그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선생님은 빨갱이 소설 쓰잖아요. 이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그런 소설은, 안 됩니다.”

평소 잘 알고 있었던 출판사 사장의 그 말 한마디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그 바뀐 세상! 내가 꿈꾸었던 완전한 그런 세상은 아니었지만, 당장에는, 차선책은 된다고 생각하였고, 나는 그 세상을 위해 참 무던하게도 모진 꿈을 꾸며 살아왔는데. 아니, 꿈만이 아니었다. 작가로서, 기자로서 나는 현실을 피하지 않았고, 덕택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하였던가. 벌건 대낫의 대로상에서, 그것도 다섯 살난 아들이 보는 앞에서 너댓 명의 괴한들에게 불법납치당해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서초동 검찰청 어느 검사 앞에서 조사받기도 했으며, 재판정에 불려가 판사 앞에서 괜스레 가슴 조여 보기도 했고, 그리고, 또, 감옥에 끌려가 몇 년을 썩고, 삭여야 했던가. 뜻밖에도 돈이 좀 모였을 때는 좀, 생뚱맞게도, 신문사를 차려 온통 그 꿈꾸는 곳에 집중하기도 하였다. 뭐, 대가를 바라고 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꿈꾸고, 투쟁했던 그런 세상에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며칠 뒤, 나는 꿈 하나를 접었다. 절필이다. 참, 부질없이, 많은 글을 남발해왔다. 변명하자면,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투쟁을 위한 무기였다.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니! 동기부터가 불순했던 것 같기도 하였다. 그것을, 나는 성스러운 것이라고 포장해 왔다. 나는 물론 내 가족을 먹고 살게 하는 글이니, 얼마나 성스러운가. 또 있다. 내 소설은 민주주의를 위한 무기다. 오. 나는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다. 틀렸다. 틀려도 참, 많이 틀렸다. 내, 오만을, 나는 그렇게 포장했던 거다. 죄송하게도 그분, 붓다의 말씀을 빌린다면, 나는 한 마디의 글도 쓰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면, 그동안 내가 쓴 글을, 하나도, 쓰여서는 안 되는 글이었다. ‘빨갱이 소설’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서가 아니다. 물론 그 소리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계기는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 달 동안 아파트 방구석에 틀어박혀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병이 찾아왔다. 참, 무지막지한 병이었다. 며칠 동안을 끙끙거리며 신열을 앓았다. 죽을 고비라는 생각이 몇 번씩이나 들었다. 그러나, 무식하게도 버텼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는 속셈이었다. 고개 하나를 넘으면 큰 병원이 있었다. 원자력병원이다. 암 전문 병원이지만, 뒷날 아내에게 들었던 소리는,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긴 기껏해야 1km 남짓 떨어진 병원을 119구급차에 실려 갔을 정도였다니까.

병원에 실려 온 그날부터 나는 또 하나의 경계와 싸워야 했다. 아니, 경계 앞에 혼자 괴로워하며 몸부림쳐야 했다.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게 된 나는 2인실에 강제 입원을 당했다. 문제는 입원 첫날부터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7월의 여름 날씨는 지상의 모든 것이 불타는 듯한 무더위였다. 그런데, 병실에는 에어컨조차 틀 수 없었다. 같은 병실에 입원한 환자가 찬 기운을 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암 환자였다. 강원도 강릉에서 왔는데, 30년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달 앞두고 암으로 판정받은 환자였다.

그는 1주일 만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퇴실했다. 다음에 들어온 환자도 암 환자였다. 그렇게 한 달여를 입원하는 동안,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암 환자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랬는데, 회진 나온 의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정밀검사를 해봐야 정확한 것을 알겠지만, 암일 수도 있습니다.”

뒤에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보면 의사는 아주 틀린 얘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암일 수도 있다고 했지, 암이라고 하지는 않았지 않은가. 다만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는 소리를 좀 과하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와 아내의 귀에는 왜 암이라는 진단으로 알아들었을까. 지레 겁을 먹은 탓인지 몰랐다. 원자력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여 동안 우리는 적지 않은 암 환자의 최후를 목격하였다. 오늘 밤에 살아서 우리와 얘기를 나누었던 환자가 다음 날 아침에는 주검이 되어 사라졌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따라서 회진 의사의 그 말 한마디는 우리에게 일종의 사형선고와 같은 울림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간호하던 아내는 벌써 훌쩍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냥, 진공상태에서 한동안 멍하니 어두컴컴한 병실 천정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1주일 뒤에 나온 결과는, 엉뚱하게도, 늑막결핵이라는 판정이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원자력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는 동안, 나는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서울을 떠나는 꿈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에 온 이후 20년이라는 세월을 서울에서 살았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참, 오래 살았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절필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앞으로 소설을 쓰지 않겠다. 내 결심을, 각오를 들은 아내의 얼굴에는 벌써 걱정의 빛이 완연하다.

그때 나는 아내에게 가장 무책임한 말을 툭 내뱉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 되겠지.”

아내는 반응이 없었다. 늘 그랬으니까. 아내의 바로 그런 점이 나를 옭아매는 무기가 되었다. 차라리, 아니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앙칼지게 부정이라도 한다면, 나는 더욱 강하게 튀어 나갔을 터다. 그러나 아내는 어떤 일이 닥치면 천 근 바윗덩어리같이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침묵 앞에 무릎을 꿇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모든 것을 털고 나니까 홀가분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는데, 승리의 여신이 아내의 머리 위에서 흰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때 나에게 손을 내민 것은, 대전 근교 계룡산 천왕봉이 한눈에 올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한류문화대학원대학교(이하 ‘한류대’로 줄임)라는 긴 이름을 가진 대학원대학교 교수 자리였다. 앓고 있는 병이 완치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나는 복부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차를 직접 몰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2)

 

늦여름의 해는 정오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더위는 마지막 작열하는 기세로 한여름 무더위보다 더욱 날카롭게 내리쬐었다. 금산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주위에는 퍽 낯익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보제루를 나온 나는 정면에 보이는 대적광전과 오른쪽 미륵전 건물을 향해 합장을 올린 뒤에 곧장 설법전 건물 앞을 지나갔다. 다른 사람이 나를 눈여겨보았다면 퍽 익숙한 몸놀림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 터다.

“혹시, 원명스님, 아직도, 계십니까?”

적묵당 앞으로 다가선 나는 굳게 문이 닫혀 있는 건물 쪽을 흘끔거리면서 맞은 편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홍안의 한 노승에게 짐짓 떨리는 음색으로 말을 걸었다. 적묵당은 주지를 비롯한 삼직 스님의 거주처이자 후원 요사의 중심 건물이다. 일반 요사와는 달리 공양하고 예법을 갖추는 대중방(큰방)이 있는 수행 전용 건물이다. 그리고 맞은편에 ‘참석 수행중’이라는 검소한 팻말 하나가 결려있는 안쪽 건물은 화림선원이다. 일반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스님들의 선방이다.

“누구?”

노승이 물었다.

“원명스님이라고.”

“그놈을 왜 찾누.”

“그게, 저.”

“죽었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승은 뒷짐을 진 채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망연한 눈빛으로 비틀거리며 사라지는 노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나는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원명스님은 내 도반이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내가 한 때는 출가인이었다는 얘기부터 하는 것이 순서겠지. 그것도 바로 이곳 금산사에서 행자 시절을 보냈고 사미계를 받았다. 원명은 나보다 1년 늦게 머리를 깎았다. 그렇다고 해도 같은 나이인 우리는 도반이자 친형제와 같았다. 속가의 표현대로라면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꿈 탓이다. 정확하게는, 소설가 탓이었다. 내가 원명과 헤어지게 된 것은.

“이눔아. 소설가라니. 중이 소설가가 되겠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은사 스님은 단호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소설가와 스님은 좀 거리가 있었다. 차라리 시인이면 또 모를까. 전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문학 동아리에 가입했다. 촛불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신석정 시인이 지도교사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시인이 꿈이었다. 그 꿈이 지금까지 유지되었다면, 나는 은사 스님의 바람을 굳이 저버리지는 않아도 좋았을 텐데. 그런데 나는 언제인가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설가의 꿈을 꾸었다. 은사 스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나는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명을 통해 편지 한 통을 남겨 놓고, 어느 날 새벽예불을 마친 뒤에 나는 줄행랑을 치듯 금산사를 떠났다. 반면, 원명은 은사 스님의 착한 제자였다. 그는 은사 스님의 바람대로 선승이 되었고, 몇 년 전에 들리는 소식으로는 아직도 금산사에서 가부좌가 터지도록 정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도 지금도 화림선원 한쪽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지 몰랐다.

나는 미륵전으로 향했다. 삼 층의 육중한 건물이다. 위풍당당한 미륵불상을 보며 나는 마치 고향에라도 온 듯 푸근한 마음이 들었다. 삼배를 올린 뒤에, 잠시 미륵불상을 우러러보았다. 예나 다름없이 자비로운 모습 그대로였다. 오, 부처님. 미륵부처님.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문득 내가 부처님을 찾아온 거지 아들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화경』 「신해품」에서는 ‘장자궁자의 비유’가 나온다. 부자 아버지 장자와 거지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하여 타향객지를 떠돌다가 거지가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다른 곳에 머물면서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있는 성으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가 찾지 못하여 한 성에 머물면서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장자로 불렸다.

장자는 아들 생각에 근심이 떠날 날이 없었다. 어느 날 거지가 된 아들이 장자 저택에 품팔이를 왔다. 아들은 으리으리한 집에 보배로 치장한 주인이 바라문과 왕족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두려움을 느껴 품팔이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달아났다.

장자는 그 거지를 보고는 그렇게도 찾아 헤맸던 아들임을 알았다. 그는 옆에 시위하고 있던, 옷을 잘 차려입은 시종을 보내 데려오도록 했다. 잡혀 온 거지 아들은 자신은 이제 죽게 될 것이라 지레 겁을 내어 기절하였다.

장자는 아들이 심지가 얕고 졸렬하여 자신을 어려워함을 알고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곳을 알아보게 했다. 이번에는 방편을 써서 허름하게 생긴 시종을 보내 거지 아들을 꾀어오게 했다. 주인댁에 품팔이할 일이 있으니 같이 가서 똥치는 일을 하면 품삯을 배로 준다는 것이었다. 거지 아들은 똥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화려한 옷을 벗어놓고 초췌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오른손에는 똥치는 그릇을 들고 아들이 일하는 곳으로 가 게으름피우지 말고 일하라고 하였다.

그 후 장자는 아들을 불러 아들 같은 친근감을 느낀다고 하면서 칭찬해 주며 집안일을 도우라고 하였다. 아들은 마지못해 시키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일이 지난 후에 주인댁에 대한 신뢰감이 싹터 출입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 후 장자는 집안의 재물과 창고를 모두 거지 아들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아들은 여전히 대문 밖에 살면서 자기 재물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윽고 장자는 아들의 마음이 점점 커 감을 알고 재물을 물려주기 위해 국왕과 친족들을 불러 놓고 선언했다. 이 아이는 나의 아들이고 그동안 50여 년을 떠돌다가 돌아와 살게 되었으니 이제 모든 집과 사람들을 모두 아들에게 맡긴다고. 그제야 거지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기뻐하며 한량없는 보배를 얻게 되었다.

 

절집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장자궁자의 비유’는 우리가 누구이고 부처가 중생들을 어떻게 교화하는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이 비유에서 장자는 부처를, 거지 아들은 중생을 뜻한다. 아들이 원래 장자의 아들이었듯이 우리 중생들도 원래 부처인 불성을 갖고 있는 불자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하여 50여 년을 떠돌며 거지가 되었듯이, 중생들도 자신이 불자임을, 부처임을 잊어버리고 오도(五道,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를 윤회하며 생로병사의 고통을 받은 중생이 되어버렸다. 거지 아들이 큰 저택에 살고 있는 장자를 차마 자신의 아버지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부처는 원래 다른 존재요 우리 자신이 곧 불도를 이룰 불자라는 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금산사 미륵부처의 입장에서는 내가 거지 아들로 비추어질지 모르겠으나,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장자를 피해 다니는 거지 아들이 차라리 부러웠다. 머리로는 ‘장자궁자의 비유’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으나, 내가 금산사 미륵전을 찾은 것은 거지아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것이었다. 나는 돌아온 궁자가 아니었다. 또한, 원명을 만나기 위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원명도 관련이 있었다.

금산사 행자 시절 원명은 대적광전, 나는 미륵전 소제 담당이었다. 금산사에는 많은 전각이 있었으나 특히 미륵전은 내게는 안방이요, 놀이터와 다름없었다. 나는 행자는 물론 사미 시절 대부분을 미륵전에서 보냈다. 행자 시절 나는 스님들 몰래 미륵불상 뒤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때로는 미륵불상 발뒤꿈치에 기대어 잠을 자기도 하였다. 얼마나 달콤했는지. 그곳은 나의 비밀 ‘아지트’였다. 현재 미륵보살이 천상 사람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는 도솔천과 같은 정토였다.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금산사 미륵불상에 몸을 기대고 잠을 자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밖에 없을 것이라는. 그것은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었다. 아니, 금산사 대중 가운데 딱 한 명,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원명이었다. 반대로 대적광전 상단 밑 공간이 원명의 비밀 아지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때로는 원명과 나, 둘이 같이 미륵불상 뒤편이나 대적광전 상단 밑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예불 시간을 놓쳐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되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날이면 스님에게 불려가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혼이 나나 일쑤였다. 그러나 개구쟁이들의 반성이란 그때뿐이어서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원광이 너는, 하던 일을 계속하도록 해라.”

나는 행자 시절 3년을 꼬박 미륵전 소제 담당으로 보냈다. 그리고 사미계를 받은 뒤에 주지 스님이 내가 준 소임은 여전히 미륵전 소제 담당이었다. 대개 소제는 행자들이 담당하고, 사미는 강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지만, 내가 주지 스님에게 미운털이 박혔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미륵전 소제 담당은 그대로였다.

“공부도 게을리하지 말고.”

내 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주지 스님은 마지막 어조에 은근히 힘을 주었다.

“예. 스님.”

나는 내심 여유를 갖고 대답했다. 주지 스님이 나에게 미륵전 소제 임무를 계속 맡기는 것은, 그가 나의 은사 스님이었으므로 다른 대중에게 보여 주려는 특별한 배려(?)임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주지 스님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사미가 되었다고 해도 나는 나의 정토 미륵전을 떠나기 싫었다. 미륵전 미륵불상 뒤편이야말로 나만의 세계를 즐길 수 있는 나만의 정토였다는 것을 은사인 주지 스님은 몰랐을 터다. 그런 내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은 역시 원명이었다. 그는 주지 스님이 내가 계속 미륵전 소제를 담당하라는 명이 떨어지는 순간, 나를 향해 부럽다는 표정을 한껏 담아서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원명을 향해 나는 말없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원명아. 원명아. 걱정일랑 꼭 붙들어 매 두거라 잉. 언제라도 우리 아지트로 오면 되는 거싱게. 나는 그런 얘기를 침묵으로 속삭였다. 실제로 그 후에 원명은 자주 나를 찾아 미륵전으로 왔다. 우리는 행자 시절과 전혀 달라 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행자 때는 우리들의 정토가 두 곳이었는데, 사미가 된 뒤에는 한 곳으로 줄어들었다는 점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미륵불상 뒤편에서 자주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랬는데, 달포 전에, 한류대 정원사 황세운씨가 내게 건네준 책이 잠자는 나의 추억의 사자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3)

 

정원사 황세운씨가 내게 먼저 책을 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고, 내가 그의 작업실에 찾아가서 책을 빌려왔다. 나는 연구실에서 수업을 마치면 담배를 물고 창밖을 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그 버릇 한 부분을 황세운씨가 가로채 갔다. 그는 내가 창밖으로 시선을 주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시간에 맞추어 자신도 휴식 시간을 가졌고, 그때마다 나무 밑이나 정원석 위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몇 번씩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으므로 나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그의 휴게실로 찾아갔다.

“무슨 책을 그렇게 보세요?” 내가 물었다.

“뭐, 이것저것.” 내가 찾아온 것이 뜻밖이라는 듯 그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교수님같이 젊은 분이야 실감이 안 나겠지만, 늙으면, 급해지는 법이지요. 밀린 독서를 하는 중이랍니다.”

그는 머쓱하게 웃었다.

“….”

나는 말없이 휴게실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말이 휴게실이지 정원사 일에 필요한 도구들이 한 쪽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것이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정원사 일은 오래 하셨는가요?”

“운이 좋아서, 은퇴 후에 재취업을 한 게지요.”

“그렇군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휴게실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책을 찾는군요?”

백발에 온몸이 삭정이처럼 마른 그는 앙상한 손으로 캐비닛 속에 있는 책을 꺼내 주었다. 그의 손등에서 거머리 같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잠시 동안 그를 보던 나는 책으로 눈길을 가져갔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가죽 표지가 닳아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제법 두툼한 책이다.

“뭡니까. 『증산도 도전』이군요.” 나는 3분의 1정도는 날아간 금박의 제목을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학 때 일부 동학들이 민족종교 단체인 증산도의 동아리 활동을 하던 일이 떠올랐다. 마침 내가 활동하고 있는 불교 동아리방과 이웃하고 있어서 이따금씩 그들의 활동을 엿볼 수가 있었다. 나도 몇 번 그들의 모임에 참석한 경험이 있었다. 일반 동아리 활동과는 달리 그들은 매우 열심히 공부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진리 공부를 하였다. 지금도 인상에 남은 것은 ‘우주 1년’이라는 도표였다. 지구의 1년 사계절과 같이 우주에도 1년 사계절이 있다는, 그런 내용을 그린 도표였다.

“증산도 신도입니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니지요.”

그의 대답은 이외로 단호했다.

“그럼?”

“나는, 모든 성인의 가르침을 존중합니다. 다 믿지요.”

“그렇군요.”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라고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게실 안은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자초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 저기 오래된 책은.” 내가 캐비닛 속에 꽂혀있는 책 한 권을 보고 물었다. 내 질문에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의도가 섞여 있었다.

“아. 저거요. 어디 보자.” 황씨는 꾸역 일어나 책을 꺼내왔다. “이건, 『대순전경』이라는 책인데.”

“『대순전경』이라구요.” 나는 황씨가 들고 있는 두 책을 번갈아 보았다.

“증산도 신도들이 신앙하는 증산 상제의 행적을 기록한,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순전경』은 그 초기 기록이구.”

“….”

“초기 기록들은 『대순전경』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지요. 『도전』은 초기 기록들을, 다시 일일이 답사하고 관련자 후손들의 증언을 취재하여 다시 정리한 경전입니다. 일종의 종합경전이라고 할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증산 상제가 누구입니까? 증산도 신도들이 신앙한다면 증산도 도조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내가 아직 지식이 짧지만서도, 얘기하자면, 그분은 19세기 말, 그 나라 안팎으로 혼란한 시기에, 또한 우주사적으로는 우주의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하추교역기에 사람 농사를 결실하기 위해 인간으로 온 우주 주재자이자, 통치자입니다.”

“우주 주재자…통치자…라구요.” 나는 황씨가 했던 말을 뇌었다. “우주의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하추교역기에 인간으로 온, 우주의 주재자라.”

“그 분을, 상제라고 하지요.”

“상제! 와. 세군요!” 나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미륵불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의 부처인.” 황씨는 내가 전직 승려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만, 미륵불에 힘을 주어 말했다. 황씨의 얘기대로 미륵불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보살 가운데 하나로 석가모니 부처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를 가리킨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이트레야(Maitreya)이며,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지타(Ajita, 아일다阿逸多)이다. 성인 미륵은 자씨(慈氏)로 번역되어 흔히 자씨보살로도 불린다. 불전에 의하면 그는 인도의 바라나시국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현재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 그는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 56억7천만 년이 되는 때에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라고 하는데, 그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기 이전까지는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이후는 미륵불이라 한다.

“미륵불이라구요!”

나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움푹 들어간 황씨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빛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흔들리는 것은 내 마음이었다. 미륵불! 그것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내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사자를 깨우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나의 뇌리에는 금산사 미륵불이 번갯불처럼 스쳤다. 나의 도반 원명의 얼굴과 함께.

“내 말이 아니랍니다. 증산 상제, 당신이 직접 자신의 신원을 그렇게 밝혀 주었어요. 여기, 보세요.”

황씨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 혀끝에 침을 묻힌 뒤에 『도전』을 재빠르게 넘겼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내가 미륵이니라.”(증산도 도전 2:66:5)라는 글자가 분명히 적혀 있었다.

“여기도…여기도요.”

황세운씨는 『도전』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지 곧장 그가 원하는 부분을 찾아내어 손가락 끝으로 꾹꾹 짚어 나갔다. 과연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도전』 곳곳에서 증산 상제(당신을 신앙하는 분들의 입장을 존중하여 ‘증산 상제’로 표기한다)는 자기가 미륵이라고 자기의 신원을 밝혀 놓고 있었다. 나에게, 문제는 그 미륵불 증산 상제가, 어느 먼 곳에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4)

 

황세운 씨에게 『도전』이란 책을 빌려온 나는 며칠 동안 밤을 새우다시피 읽어 내려갔다. 그중에서도 내 어린 시절의 추억과 직접 관련이 있는 내용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좀 길지만 있는 대로 인용한다.

 

상제님께서 임인(壬寅 : 도기道紀 32, 1902)년 4월 13일에 전주 우림면 하운동(全州 雨林面 夏雲洞) 제비창골 김형렬의 집에 이르시니라. 이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심회를 푸시고 형렬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나는 조화로써 천지운로를 개조(改造)하여 불로장생의 선경(仙境)을 열고 고해에 빠진 중생을 널리 건지려 하노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본래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개탑(天蓋塔)에 내려와 천하를 두루 살피고 동양 조선국 금산사 미륵전에 임하여 30년 동안 머물다가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내려왔나니, 이제 주인을 심방함이니라.” (증산도 도전 2:1:1-85)

 

나의 일은 비록 부모, 형제, 처자라도 알 수가 없나니 나는 서양 대법국 천개탑 천하대순이로다. 동학 주문에 ‘시천주 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나니 천지간의 모든 신명들이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나에게 탄원하므로 내가 천조(天朝)의 대신(大臣)들에게 ‘하늘의 정사(政事)를 섭리하라.’고 맡기고 서양 천개탑에 내려와 천하를 둘러보며 만방의 억조창생의 편안함과 근심 걱정을 살피다가 너의 동토(東土)에 인연이 있는 고로 이 동방에 와서 30년 동안 금산사 미륵전에 머무르면서 최제우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주었더니 조선 조정이 제우를 죽였으므로 내가 팔괘 갑자(八卦甲子)에 응하여 신미(辛未 : 道紀 1, 1871)년에 이 세상에 내려왔노라.(증산도 도전 2:94:1-7)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 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하늘의 모든 신성과 부처와 보살이 하소연하므로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이마두가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있는 나에게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내려와 이마두를 데리고 삼계를 둘러보며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중 진표(眞表)가 석가모니의 당래불(當來佛) 찬탄설게(讚歎說偈)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至心祈願)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甲子 : 道紀前 7, 1864)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辛未 : 도기 1, 1871)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수운가사(水雲歌詞)에서 말하는 ‘상제’는 곧 나를 이름이니라.(증산도 도전 2:30:8-17)

 

자신이 미륵불이라고 스스로 밝힌 증산 상제가 인간을 온 과정을 밝힌 기록들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전체 내용도 그렇지만, 특히 나를 놀라고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미륵불인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온 과정에서 금산사 미륵전 미륵불상에 임하여 30년 동안 머물렀다는 부분이었다. 내가 행자와 사미 시절을 포함하여 6년 동안 매일 쓸고 닦았던 금산사 미륵전, 바로 그곳에 증산 상제가 30년 동안 임하였다가 인간으로 왔다! 이 밖에도 『도전』에는 증산 상제가 금산사 미륵불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은 많았다. 그렇게 인간으로 와서 당신의 일을 마친 증산 상제는 다시 금산사 미륵전을 통해 천상으로 환궁하였다. 다시 인간으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너무 악하여 몸둘 곳이 없으므로 장차 깊이 숨으려 하니 어디가 좋겠느냐?” … 잠시 후에 “나는 금산사에 가서 불양답(佛糧畓)이나 차지하리라.” 하시니라. 또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미륵이니라. 금산사 미륵은 여의주를 손에 들었거니와 나는 입에 물었노라.” 하시고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 미륵불을 보라. 금산사 미륵불은 육장(六丈)이나 나는 육장 반으로 오리라.” 하시니라.(증산도 도전 10:33:1-7)

 

『도전』 기록에서 나는 더욱 놀라고 당혹스럽게 만든 다른 구절은 “중 진표가 석가모니의 당래불 찬탄설게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이라는 부분이었다. 금산사 중창조로서 진표율사라면 나로서는 행자 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터라 모를 리 만무하였다. 그러나 위의 구절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바로 그 금산사에, 금산사 미륵전과 미륵불에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떠났다는 자책감에 젖어 들었다. 나는 기자 시절 익힌 감각이 발동하였다. 금산사 미륵불상을 세운 진표율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도전』에는 「미륵불의 동방 조선 강세의 길을 연 진표 대성사」라는 제목으로 진표율사에 대한 행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놓았다.

 

동방 조선 땅의 도솔천 천주님 신앙은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영글어 민중 신앙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

진표는 12세 때 부모의 출가 허락을 받고 김제(金堤) 금산사(金山寺)의 숭제법사(崇濟法師)로부터 사미계(沙彌戒)를 받으니라.

법사가 진표에게 가르쳐 말하기를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님 앞으로 가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하여 친히 미륵님의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 하매 이로부터 진표가 미륵님에게 직접 법을 구하여 대도를 펴리라는 큰 뜻을 품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더니

27세 되는 경자(庚子, 760)년 신라 경덕왕 19년에 전북 부안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 들어가 미륵불상 앞에서 일심으로 계법을 구하니라.

그러나 3년의 세월이 흘러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하자 죽을 결심으로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니 그 순간 번갯빛처럼 나타난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살며시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에 놓고 사라지더라.
이에 큰 용기를 얻어 서원을 세우고 21일을 기약하여 생사를 걸고 더욱 분발하니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온몸을 돌로 두들기며 간절히 참회하매 3일 만에 손과 팔이 부러져 떨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거늘 7일째 되던 날 밤 지장보살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며 와서 진표를 가호하니 곧 회복되니라.

21일 공부를 마치던 날 천안(天眼)이 열리어 미륵불께서 수많은 도솔천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대광명 속에서 오시는 모습을 보니라.

미륵불께서 진표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시기를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戒)를 구하다니.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 참회하는구나. 내가 한 손가락을 튕겨 수미산(須彌山)을 무너뜨릴 수 있으나 네 마음은 불퇴전(不退轉)이로다.” 하고 찬탄하시니라.

이 때 미륵불께서 점찰경(占察經) 두 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 189개를 진표에게 내려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것으로써 법을 세상에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으로 삼으라. 이 뒤에 너는 이 몸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도솔천에 태어나리라.” 하시고 하늘로 사라지시니라.

원각(圓覺) 대도통을 한 뒤, 닥쳐올 천지 대개벽의 환란을 내다본 진표 대성사(大聖師)는 온 우주의 구원의 부처이신 미륵천주께서 동방의 이 땅에 강세해 주실 것을 지극정성으로 기원하니 이로부터 ‘밑 없는 시루를 걸어 놓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고 4년에 걸쳐 금산사에 미륵전을 완공하니라.

이 뒤에 진표는 미륵불의 삼회설법의 구원 정신을 받들어 모악산 금산사를 제1도장, 금강산 발연사를 제2도장, 속리산 길상사를 제3도장으로 정하고 용화도장을 열어 미륵존불의 용화세계에 태어나기 위해 십선업(十善業)을 행하라는 미륵신앙의 기틀을 다지고 천상 도솔천으로 올라가니라.(증산도 도전 1:7:1-19)

 

미륵전에는 마침 찾아오는 불자도 없어서, 한참 동안 말없이 미륵불을 올려다보던 나는 와르르 무너지듯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도전』을 읽었던 그때부터 나는 과거의 포로가 되었다. 내 십 대 시절을 오롯이 하였던 금산사와, 금산사 미륵전 미륵불을, 그리고 진표율사를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춰 주었다. 당신들을 몰랐다는 것은 곧 나를 몰랐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금산사에서 보낸 내 십 대 시절은, 행자 시절은, 사미 시절은 무엇인가. 『금강경』에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는 문구가 있다. 꿈이나 환영, 물거품이나 그림자 같다는 의미다. 그런가! 그런가! 그때부터 내 머리는 복잡해졌다. 『금강경』에서의 그 온전한 문장의 가르침은 내 입장과 달랐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현상계의 모든 법은 꿈이나 환영, 물거품이나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같이 볼지니라.

 

부처님은 그렇게 설하셨다. 죄송하지만, 나는 금산사 미륵전에서 보낸 내 행자 시절을, 사미 시절을 꿈이나 환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 있는 실체라는 것을 확인하게 위해서 이곳 금산사를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반개한 눈가에 힘을 주었다. 눈언저리가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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