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22 쇼펜하우어 (1)

우리는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1. 삶은 당혹스런 사건

 

그는 이미 17세 때 “병과 고통, 죽음을 목격하고, 마치 젊은 부처가 그랬던 것처럼 삶의 연민에 휩싸였다.” 그리고 23세가 되어서는 이렇게 말했다. “삶이란 하나의 당혹스런 사건이다. 나는 삶 그것에 대해 숙고하면서 삶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 후부터 그는 이 원칙을 지켰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사상가 중 가장 음울한 세계와 의지의 부정자. 그는 주장하기를 “어떤 사람도 죽음이 더 이상 두려운 게 아니라면 삶을 지탱하지 못할 것이며 삶이 하나의 기쁨이라면 어느 누가 또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현세 긍정이 지배적인 독일 철학 안에 처음으로 비관론적 음조音調를 집어넣었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사나운 자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길들여진 자들은 서로를 이용하는, 모든 가능한 세계 중 가장 나쁜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고 밝힌다.

그는 보기 드문 명석함을 가지고서 세속적 비참함을 기술하고 탄식했다. 그렇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호소력 있는 어떤 제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어떤 삶의 의미 같은 것을 전달하는 일을 포기했다. 더욱이 자기가 칼 마르크스처럼 구원과 해방 이론의 선포자로 소명 받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단지 시를 통해 표현했던 것을 믿었다. “생성된 모든 것은 소멸할 가치가 있기에.”

이런 입장에 따라 그는 일반적인 감정에 완전히 어긋나는 통찰들을 얻게 됐다. 예컨대 그는 이제 아이도 갖게 될 연인들을 향해, “그렇지 않았다면 곧 끝났을 모든 수고와 고통들의 영구화를 은밀히 꾀하는 모반자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면 그가 삶에 불만을 가질 이유는 별로 없다.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적어도 재정적인 면에서는 그의 삶은 순조로웠다. 게다가 ‘구두쇠’란 평판마저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적대자들은 쇼펜하우어를 편안하게 벼랑에 앉아 세상의 비참을 유쾌하게 즐기는 부유한 연금생활자에 비유했다.

실제로 그는 아주 모순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독일 사상가 중 그 만큼이나 자기 철학을 지키지 않고 그 철학에 따라 “살지” 않은 사람도 없다.

그는 동물들(“우리 형제들”)을 사랑했고, 또 여자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녔음에도 그들을 경멸했던 천재적인 기인이었다. 그는 “여자란 어리석으며 아이와 성인 남자(본래적 인간) 사이 중간에 있는 존재”라고 적고 있다. 특히 “여자들은 본능적인 교활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뭔가 양보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의 이런 여성혐오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한 적이 없었던 어머니로부터 생겨났다. 쇼펜하우어 자신 “권리를 반으로 줄이고 의무를 배로 늘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31세에 이미 그는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를 출간했지만 책은 팔리지 않은 채 서점의 선반에 꽂혀있게 됐다. 동료 철학자들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노년老年에 들어서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남았다.

그렇지만 이런 무관심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당시 19세기의 사람들은 진보에 대한 낙관적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른바 전능한 이성에 대한 신뢰가 매우 두터웠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여기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라는 생각에 이른 최초의 사상가였다. 이때 삶의 의지에서 “객관적인”, 곧 의식적인 의욕이란 단지 사소한 정도로만 문제가 된다. 인간을 장악하고 괴롭게 하는 충동의 훨씬 더 큰 부분은 오히려 목적이 없는 “맹목적” 의지가 차지한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그로부터 백 년이 조금 못되어 정신분석의 창안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프로이트는 “맹목적 의지”를 전문 용어들로 바꾸었고, 그 후로 ‘리비도(Libido)’,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는 ‘그것(Es)’ 또는 ‘충동’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오직 쉼 없는 삶의 의지를 부정하는데 구원이 있다는 이론으로는 이 사상가는 자연 정치가들과 실제적인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에 비해 감성적인 예술가들이 그에 대해 갖는 경탄은 더욱 컸다. 몰락하는 시민계급의 전기 작가傳記作家인 토마스 만은 침대를 또한 고난의 장소로 본 철학자의 이론에서 그의 전 작품을 꿰뚫는 기이한 죽음의 성애性愛를 발전시켰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외친다. “오 쾌락이여, 오 지옥이여!”

반면 프랑스 시인인 앙드레 지드(『전원 교향곡』)는 쇼펜하우어의 작품들을 연구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빠졌다. 그리고 ‘초인超人’의 주창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를 자신의 선생이라 불렀는가 하면, 장편역사소설, 『전쟁과 평화』의 저자인 러시아의 레오 톨스토이 같은 이는 심지어 그를 “가장 천재적인 인간”으로 보았다.

그러나 작가들의 평가는 비단 철학자로서의 쇼펜하우어뿐만 아니라 저술가 쇼펜하우어에게도 맞아 떨어진다. 왜냐하면 그는 에마뉘엘 칸트나 프리드리히 헤겔과 같은 사상의 영웅들과는 대조적으로 간결한 문체를 구사할 줄 알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문체는 유명한 저서 『생활의 지혜를 위한 잠언들』에서 화려하게 발휘된다. 일례로 다음의 구절을 보자.

“그러므로 삶의 전반부가 행복을 향한 채워지지 않는 동경이라면, 후반부는 불행에 대한 우려이다. 왜냐하면 삶이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모든 행복은 키메라[희랍 신화에 나오는 기이한 짐승]와 같은 기만적인 것인데 비해 불행은 실제적이란 인식이 크든 작든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적어도 이성적 성격의 사람들에게서는 보다 덜 고통스럽고 평정된 상태가 쾌락으로 희구된다. 젊었을 때의 나는 문에서 벨이 울렸을 때 ‘드디어 왔네!’ 생각하며 반가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면서는 똑같은 자극에 대해 ‘마침내 왔구나!’ 하며 두려움 비슷한 것을 느꼈다.”

쇼펜하우어의 부모들은 보다 낙관적인 사람들이었다. 1788년 2월 발트해 연안의 도시 단치히에서 그가 태어났을 때, 그들은 그에게 ‘아르투어(Arthur)’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르투어’는 “모든 언어에서 다 쓰인다.”는 이유에서이다. 아들이 장차 아버지처럼 무역상으로서 성공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이미 정해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재능 있는 작가이기도 했던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20년 연상의 남자와 결혼하게 된 것은 주로 그의 재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 우호적이지만 냉담한 거리를 유지했으며, 1797년에는 아르투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딸(아델)을 그에게 선물했다. 소년은 유년기를 가족 소유의 농장이 두 군데 있던 단치히 부근의 한 시골에서 새끼 양들과 스페인산 강아지들 틈에서 보냈다. 분방하고 조급한 성격의 어머니는 물론 대부분의 시간을 아들과 함께 보내지만 내심으론 아들을 소원하게 여긴다. 훗날 그녀가 기술하고 있듯, 아들을 “나의 새 인형”으로 여긴다. 그 결과 사랑하는, 그렇지만 거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아버지가 있음에도 아르투어의 영혼은 성장에 장애를 받기 시작한다.

1793년 프로이센이 자유도시인 단치히를 공격해오자, 자유주의적 성향의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같은 ‘한자 동맹’ 도시인 함부르크로 이주한다. 이곳에서 그는 무역상회를 연다. 그 무렵 근심이라고는 거의 모르던 소년에게 생애 내내 괴롭히게 될, 원인모를 불안과 절망이 처음으로 엄습한다.

6세가 된 아르투어는 어느 날 저녁 악몽에서 깨고는 산책을 나간 부모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고정관념에 휩싸이며 공포 상태에 빠진다. 하녀가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다짐을 해줘도 진정되지 않는다. 훗날 성장한 뒤에 그의 불안은 괴상한 형태를 띠게 된다. 이를테면 그는 목이 잘려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이발사도 믿지 못하고 기피한다. 또 그의 침실에는 한 번도 들어오지 않은 강도에 대비할 목적으로 장전된 총 한 자루가 늘 놓여 있다.

그러나 한자 동맹 도시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 두 번째 고향이 되지 못한다. 쇼펜하우어를 예의 바르고 기품 있는 사람으로 기르고 싶은 아버지가 아홉 살짜리 아들을 프랑스의 르아브르에 있는, 한 지인知人의 집에서 2년 간 지내도록 결정한 것이다. 아르투어로 하여금 그 곳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함부르크로의 이주를 제외한다면, 이번 르아브르행은 쇼펜하우어로 하여금 평생 어떤 종류의 국민 의식도 키우지 못하게 한 결과를 가져다 준 수많은 여행들 중 첫 번째의 것이다. 그는 자신을 결코 독일 철학자로 느끼지 않으며, 그가 마치 시인처럼 구사할 줄 알던 독일어는 영어나 프랑스어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르아브르로부터 돌아 온 후 소년은 4년 동안 함부르크의 한 사립학교에 다녔다. 이곳에서 그는 근면함보다는 뛰어난 지능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담임교사는 빠른 이해력을 칭찬하며 그에게 복습 과제를 면제시켜준다.

아르투어는 성장이 충분할 만큼 빠르지 않은 탓에 학급동료들의 놀림감이 된다. 그렇지만 그것을 악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붙임성 있는 놀이 동무인 그는 친구들과 함께 즐겨 곡식 창고 위로 올라가 칼을 찬 채 쥐 사냥을 한다.

변성기에 들어서자, 부모들은 그를 무도강습소에 보낸다. 그는 이곳에서 신사가 숙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 그가 호사스런 여성들에게서 “유럽 문명과 기독교-게르만적 몽매함의 기형아”를 보고 “존경과 숭배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가소로운 권리주장을” 조롱하게 되는 것은 아직 수년 후의 일이다.

방학이면 그는 프라하, 라이프치히, 베를린 등으로 여행을 한다. 여행 중에 그는 이곳저곳에서 눈물 골짜기로서의 세상,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어떤 것으로서의 세상을 체험한다. 이를테면 젖먹이였을 때 세례를 받으러 가다 두 눈이 얼어버려 전혀 밤낮의 개념이 없는 한 부인을 만났을 때, 소년은 애통한 마음으로 “이 장님 여자는 기독교가 되는 기쁨을 너무 비싼 값으로 치러야 했다.”라고 기록한다.

그는 세계에 대한 인식들을 책이나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통해서보다는 자기의 실제 경험을 통해서 쌓아간다. 그 때문에 강의하는 방식으로 아들에게 거래와 상점들의 세계에 흥미를 갖도록 하려는 아버지의 노력 역시 성공하지 못한다. 아르투어는 오랜 동안 그 세계를 둘러보면서 사무실은 자기에게 맞는 자리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됐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여 학자가 될 요량으로 김나지움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소년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전히 그를 회사의 상속인이자 후계자로 여기는 아버지는 이제 열다섯 살의 소년에게 전적으로 공정하다고 할 수 없는 양자택일의 선택을 제안한다. ‘김나지움에 다니겠느냐 아니면 상인이 되는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몇 년 동안 유럽을 유람하겠느냐?’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아들은 여행 쪽을 택한다(‘편력시대’).

1803년 3월에 시작된 여행의 대부분은 부모들이 동행한다. 흥겨움을 찾는 어머니가 계획을 짰던 탓에 여행 계획에는 대부분 관광명소만이 들어있었다. 그 때문에 6천명의 죄수들이 비참한 상태로 갇혀 있는 툴롱의 감옥을 구경하게 되기까지는, 그가 세상의 비참함을 직접 접하는 일은 아직 유보돼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성격과 곧이어 철학까지를 지배하게 되는 격한 비관주의가 유람 여행 중에 기이한 방식으로 쇼펜하우어에게 생겨났다. 프랑스나 그가 말을 배우기 위해 가장 오래 체류한 영국, 그 어디에서든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은 그에겐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예컨대 함께 여행하고 있던 부모들 눈에 비친 것과는 상이한 형태로 비쳐진다. 우울한 빛으로 흐려진 그의 눈은 화려한 무대장치들로 힘겹게 감춰진 슬픔과 고통, 무상의 세계를 지각한다. 단지 거리를 두고 지나쳐 달리는 역마차 안에서 바라볼 뿐이지만, 빈민가의 낡은 판잣집 앞에 서 있는, 슬픔으로 여의고 무표정한 사람들의 모습은 그를 슬프게 하고 눈물짓게 만든다.

1805년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 온 그는 여행의 감상들을 이렇게 요약한다. “이 세상은 지극히 선善한 존재에 의해 지어진 것일 수 없다. 아마도 고통의 장면을 보고 즐길 생각으로 피조물을 현존케 한 어떤 악마의 작품일 것이다.” 이런 확신이 개신교도로 세례를 받은 쇼펜하우어를 독일 사상가 중 최초의 무신론자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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