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만 정복과 영국의 성씨

영국에서 노르만 정복 이전에는 성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냥 별명을 덧붙여 이름을 불렀다. 노르만 정복 때부터 소수의 제후들이 자신들의 영지 이름을 성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사 책을 보면 1066년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이 영국사의 중요한 전환점의 하나로 나온다. 당시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바다를 건너 영국을 무력으로 정복한 사건을 말한다. 노르망디라는 지방 이름은 북쪽에서 온 사람을 뜻하는 ‘노르만’(Normand)에서 왔다. 북쪽에서 바다를 건너온 바이킹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820년경부터 프랑스 북부 해안지대를 연례행사처럼 약탈하고 심지어는 센 강을 따라 올라와 파리까지 공격하였다. 처음에는 겨울이 닥치기 전에 자신들의 본향인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물러갔지만 점차 프랑스 땅에서 월동하다가 날씨가 좋아지면 다시 주변지역을 약탈하거나 심지어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눌러앉기까지 하였다. 이 바이킹들을 물리칠 수 없었던 당시의 프랑스 왕은 이들 침입자들에게 땅을 떼어주고 대신 프랑스 왕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땅이 노르만의 땅이라는 뜻인 ‘노르망디’ 지방이다.

당시 노르망디 지방을 차지했던 바이킹의 우두머리가 ‘롤로’라는 사람이다. 센 강 하구로부터 루앙까지의 영토가 이 사람에게 주어졌는데 제1대 노르망디 공작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엄밀하게는 ‘루앙 伯백’이라는 관직으로 노르망디 일대를 프랑스 왕의 제후로 통치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백(라틴어 comes, 영어 count)은 지방의 통치를 맡은 관리를 뜻한다. 왕권이 땅에 떨어진 당시에는 이러한 백은 중앙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고 자신의 영지에서 반독립적인 통치자 노릇을 하였다. 이교도인 롤로는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는 대신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아 로베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제 프랑스 왕의 신하로서 동족인 바이킹들의 공격으로부터 노르망디 지방을 방어할 책임을 맡았다.

노르만 정복 사건의 주역인 윌리엄(프랑스어로는 ‘기욤’이라고 한다) 공은 족보를 보면 롤로의 5대손에 해당한다. 노르망디 공 윌리엄은 정복을 통해 영국 왕위에 올랐다. 노르망디 공작인 동시에 영국 왕이 된 셈인데 그로부터 시작된 왕조를 영국인들은 ‘노르만 왕조’라고 한다. 바이킹의 후예였던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한 것은 해적들이 아무런 권리가 없는 곳을 무작정 공격하여 빼앗듯 차지한 것은 아니다. 1066년 초까지 영국은 웨섹스 왕가 출신의 에드워드 고해왕(Edward the Confessor)이 다스리고 있었다. 별명이 ‘고해자’라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경건한 인물인 것처럼 생각되는 인물이다. 사후 백년 뒤 가톨릭 교회에 의해 시성되었다. 즉 성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인데 실제로는 경건한 생활을 영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교황이 정치적 의도에서 그를 시성한 것으로 역사가들은 본다.

이 에드워드 왕이 1066년 1월에 죽었다. 자식이 없었는데 갑자기 죽어서인지 유언장도 남기지 않았다. 당시 영국의 대귀족들은 에드워드 고해왕이 임종석상에서 처남인 해럴드에게 왕위를 넘겨주라는 말을 남겼다고 듣고서 그를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노르망디 공 윌리엄은 자신이 영국 왕위의 계승권을 갖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에드워드 왕이 예전에 노르망디에서 망명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으며 또 해럴드 역시 노르망디에 왔을 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있음을 내세웠던 것이다.

해럴드가 영국 왕위를 내어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윌리엄은 1066년 가을 1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영국으로 쳐들어가 해럴드를 영국 남부의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전투에서 해럴드 왕은 전사하였다. 윌리엄의 원정은 당시 빈번하던 봉건귀족들 사이의 왕권 다툼에 그치지 않고 영국 역사, 더 나아가 유럽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물론 영국인들의 저항이 없지 않았다. 앵글로색슨 귀족들이 이끈 수년간의 반란이 계속되었다. 특히 북부 지역은 오랫동안 반군들의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 윌리엄은 초토화 작전을 펴는 등 수년간 잔인한 진압을 하였다. 살육과 파괴가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1069-1670년 겨울 윌리엄의 군대가 요크셔를 포함한 북부 일대를 토벌하여 반란은 종식되었다.

 

 

헤이스팅스 전투를 묘사한 바이외 태피스트리 일부. 이 태피스트리는 당시의 사건, 의복, 무기 등을 상세하게 묘사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의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프랑스 땅에서 건너온 윌리엄의 기사들은 영국 왕이 된 자신들의 상전 윌리엄으로부터 봉토를 받았다. 물론 그 땅은 영국 귀족들로부터 몰수한 토지에서 나왔다. 무려 4천 명의 영국 귀족들 땅이 몰수되어 윌리엄의 부하들에게 수여되었다. 당시 윌리엄 왕으로부터 봉토를 수여받은 윌리엄의 직신直臣(영어로는 ‘baron’이라 한다)은 그 수가 200명 정도였다. 이들은 대부분 노르망디 출신들이었음은 물론이다.

노르망디에서 온 이 윌리엄의 가신들이 이제 영국의 지배층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들은 영어는 하지 못하고 프랑스어를 사용하였다. 향후 오랫동안 영국의 왕실은 프랑스어를 일상어로 사용하였다. 영국으로 건너온 노르망디 귀족들은 대부분 성姓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노르만 정복 이후 자신들의 이름에 더하여 자신이 노르망디에 갖고 있는 영지 혹은 자신이 영국에서 새로 받은 영지를 이름에 덧붙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행이 그 아들들에게로 계승되고 점차 일반화되어 갔다. 결국 봉토 즉 영지의 이름이 아들에게로 계승되어 가족의 이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러한 상급귀족들의 관행을 하급귀족들 즉 기사계급이 즉각 모방하였다. 영국에서 귀족들이 이처럼 영지를 자신들의 가족 이름으로 채용하는 관습은 1300년경에는 완전히 확립되었다.

관습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평민들도 이러한 귀족들의 관행을 모방하였다. 부유한 도시의 상인들로부터 시작하여 심지어는 농촌의 소작인과 농노들도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1377-81년에 세 차례에 걸쳐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전비를 대기 위해 인두세를 징수했는데 인두세 징수장부가 남아 있다. 14세 혹은 16세 이하는 면세되었으며 그 이상은 거지를 빼고는 모두 징세대상이 되었다. 대장에는 가장의 이름과 직업 그리고 그 처 및 징세연령에 달한 아들과 딸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당시 대부분의 주민은 성을 갖고 있었으나 하인(servant)으로 기재된 사람은 성이 적혀 있지 않다. 리처드 2세 시기의 이 인두세대장을 근거로 판단해보면 성은 영국 사회에서 확고히 정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복자 윌리엄은 영국사에서는 윌리엄 1세로 칭한다. 그 전에는 그런 이름의 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1085년 영국 전역의 국세조사를 명했다. 영국 전역의 토지재산과 그 소유자, 그 위에 사는 가축 등의 가치를 샅샅이 조사하였는데 3년의 시간이 걸렸다. 당시 봉토의 소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농민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조사의 결과는 두 권의 두꺼운 책으로 묶여졌는데 ‘둠즈데이북(Domesday Book)’이라고 불린다. 둠즈데이라는 말은 원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후의 심판날을 의미하지만 그런 음울한 뜻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이 책의 기록은 더 이상 법률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최종적 권위를 갖는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무려 268,984 명의 토지소유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재산이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성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직 영국에서 성의 사용이 정착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필자가 이 책에서 기록된 사람들을 토지소유자라고 했는데 엄밀하게 말해서 토지를 소유한 것은 아니다. 영국 왕이 봉건법상으로 모든 토지의 최종적 소유자이며 그로부터 토지를 직신들이 봉토로 받아 보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소유권과는 차이가 난다. 그래서 영어로는 이들을 ‘상급차지인(tenant-in-chief)’이라 부른다. 물론 이런 상급차지인은 또 자신이 거느린 기사들에게 그 토지를 재분봉 즉 봉토로 부여하였다. 봉건적 계약 위에서 보유하는 토지라서 절대적 소유권과는 차이가 있다. 계약을 위반하는 경우 언제라도 즉각 봉토는 몰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들 역시 그런 기사들로부터 지대를 내고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였다. 영국인들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 둠즈데이북은 상세하고 철저한 기록이라는 면에서는 분명 경탄할 만한 문서이지만 이 문서로서는 아직 성의 정착을 확인할 수 없다.

영국에서 전국적 인구조사가 시행된 것은 1801년부터였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와 전쟁을 하고 있던 영국이 징병자원을 파악하기 위해 인구를 조사한 것인데 이후 10년마다 인구조사가 행해졌다. 시기에 따라 세부내용은 조금씩 달랐다. 현재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진 것은 1881년 조사인데 공개된 이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손쉽게 컴퓨터를 통해 당시에 살았던 조상을 찾을 수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영국에서 가장 많은 성은 ‘스미스(Smith)’이다. 4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 성을 갖고 있었는데 한 조상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중세기에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성이 정착되기 시작하였는데 대장장이 직업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단어가 성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1881년 조사에서 10대 성씨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Smith 2) Jones 3) Williams 4) Davies 5) Wilson 6) Evans 7) Thomas 8) Roberts 9) Johnson 10) Wal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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