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약속 4

제3장 용의 아들

 

1)

 

금산사 미륵전에서 실로 오랜만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중생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미륵불을 잠깐씩 올려다보며 이미 망각의 저편으로 아득히 사라진 화두 대신 나의 의식을 독차지한 것은 한류대 정원사 황세운 씨가 보여준 『도전』이라는 책에서 보았던 미륵불 강세 내용과, 그 미륵불이 바로 인간으로 출세하기 전에 30년 동안 임어해 있었다는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불, 그리고 이 미륵전 소제 소임으로 행자와 사미시절을 보냈던 내 청춘의 모습들이 마치 늦은 봄날 아지랑이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이 며칠 동안 내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것은 저 거룩한 분, 미륵불이었다. 과연 인간의 마음이란, 생각이란 술 취한 코끼리와 같아서 어디로 날뛸지 튈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마음을 술 취한 코끼리에 비유한 것이 석가모니부처님의 나라 인도식이라면 예로부터 전해오는 우리 식은 마음을 흔히 팥죽 끓듯 한다고 하였다. 정녕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이 마음이다. 여기저기로 마치 잔잔한 호수 위에 제멋대로 펄떡거리는 물고기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마음을 따라다닌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가부좌를 털고 일어날 즈음, 내 의식을 제압하고 있는 것은 미륵불 너머 한 고승이었다.

산사 미륵전을 세우고, 미륵불을 봉안한 그분―.

진표율사.

과연 그분은 당신이 일으킨 금산사 미륵전, 미륵불을 통해 도솔천에 계신 미륵보살이 인간으로 강세하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내 청춘의 기억을 꺼내 보면 진표율사는 퍽 낯익은 이름이었다. 행자와 사미시절 조석으로 금산사 미륵전을 쓸고 닦는 소임을 수행으로 안았던 내가 어찌 진표율사를 모를 수 있겠는가. 오. 그것은 착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나는 진표율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그분이 신라 고승이라는 것과, 금산사를, 특히 금산사 미륵전을 중창하고, 미륵불을 봉안한 분이라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출생지는 어딘지―대충은 알고 있었다. 금산사 근처 어디라는―, 은사 스님은 누구인지, 어떤 고승인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긴, 내가 절집 생활에 철 들면서 터득하기로는, 선가의 젖줄을 빨고 있는 한국 주류불교의 한 귀퉁이에 몸 박혀 살면서 진표율사가 아무리 금산사를 중창한 고승이고 내가 금산사 대중 가운데 한 명이라 한들, 그분에 대해 알고자 하였다면, 몽둥이 30방이다. 이름 따위야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런 실체가 없는 그런 가짜 이름을, 그런 형상을, 그런 내용을 알고자 하는 것이 망념이요, 번뇌로다!

입만 열면 금과옥조처럼 외던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에서 말하지 않았더냐.

 

凡所有相, 皆是虛妄。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무릇 모습을 지닌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모습이 모습 아닌 것을 보게 되면 곧 여래를 보게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불행하게도 나는 그런 진제(眞諦)의 세계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선업을 지은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 내가 중도에서 절 담장을 넘어 탈출하고, 소설 나부랭이를 써서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았던 것은, 전생에 지은 업장의 결과인 터여서 나는 세속제(世俗諦)에나 딱 어울리는 그런 운명이었는지 몰랐다. 아니면 나의 도반 원명스님처럼 나도 지금까지 청정 수월도량 한쪽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지 않았을까. 결국 끝까지 중노릇을 못 하고 뛰쳐나온 것은 전생에 지은 무거운 업장 탓이로다. 불쌍한 중생이여!

금산사에서 돌아온 나는 진표율사에 관한 문헌자료를 다각도로 수집하였다. 본격적인 진표율사 연구에 들어간 셈이었다. 진표율사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된다. 그날도 세종호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국립 세종도서관으로 걸어가면서 온통 진표율사 생각뿐이었다. 늘 그러하였듯이, 진표율사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은 금산사 미륵전의 소제 담당 사미승이었던 내 청춘의 모습이었다. 주차장을 나온 나는 도로를 가로질러 맞은편으로 책을 펼쳐놓은 형상으로 아담하면서도 우뚝 솟아 있는 세종도서관으로 갔다. 열람실에서 뽑아 든 책은 상해고적출판사에서 간행된 『송고승전』이다. 어렵지 않게 『송고승전』 제14권 「명률편(明律篇)」에서 내가 찾고자 한 부분을 발견하였다.

「당백제국금산사진표전唐百濟國金山寺眞表傳」. 제법 긴 제목이다. 앞으로 「진표전」으로 줄여서 사용하겠다.

“당 백제국이라니!”

나는 입안에서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진표전」 첫 장의 아래쪽 모서리를 살짝 접어 표시를 하고 열람실을 나왔다. 『송고승전』은 송나라 찬영(贊寧, 930∼1001)이 편찬한 고승들의 전기 모음집이다. 『대송승사략(大宋僧史略)』에 따르면 찬영의 부친은 발해인이다. 발해의 멸망과 함께 중원으로 이주한 유민이었다. 그건 그렇고, 「진표전」의 제목을 보면 발해 유민이지만, 송나라 사람인 찬영의 눈에 백제가 당나라의 속국, 혹은 제후국 정도로 보였는가 보았다. 발해 유민인지 그 정도였다면, 예나 지금이나 중국 사람들의 인식은 어떠하였을지. 나는 좀 씁쓸한 느낌을 애써 누르며 복사실로 갔다.

“교수님, 여기 계셨어요?”

「진표전」의 복사를 막 끝냈을 누군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미륵팀’ 총무 격인 정지원이다. ‘미륵팀’이란 내가 최근에 금산사를 두 번째 다녀온 뒤에, 한류대 대학원생들 가운데 진표율사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팀을 가리킨다. 모두 6명이었다. 원래 모임의 이름을 ‘진표(율사)팀’으로 하려고 했으나 범위를 확대해서 미륵팀으로 정했다는 후문이다. 어느 쪽이든 나는 싫지 않았다. 싫기는커녕 자발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에게 고맙기 한량없다.

“응. 왔나?”

“일찍 왔어요. 1시간 전에. 저기 호수 한 바퀴 돌아보고 오는 길이거든요.”

“그런가. 팀원들은 아직인가?”

“다 왔어요. 저기 앞에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가. 가지.”

나는 복사물을 챙겨 들고 책을 반납한 뒤에 정지원과 나란히 세종도서관을 나왔다. 세종 호수공원 쪽으로 가면서 나는 방금 나온 도서관 건물을 흘끔 돌아보았다. 책을 펼쳐놓은 형상이지만, 마치 학이 두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를 듯 아름다운 건물이다. 자연발생적이 아니라 계획도시인 세종시의 향기는 이런 건물 하나에도 스며들어 있었다.

“얘기로만 들었는데, 세종 호수공원요, 잘 꾸며 놓은 것 같아요. 나는, 처음 왔어요. 국내 최대의 인공호수라고 해요.”

정지원이 정면으로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가. 나는 자주 왔는데, 미적 감흥이 나보다는 훨씬 뛰어나군. 아니면, 현대적이라고 할까.”

“왜요, 교수님은 별로인가요?”

“뭐, 별로라기보다는, 인공이라는 점이 좀….”

무심코 말했으나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세종 호수공원이 세종시의 볼거리 중의 하나로서 손색이 없다는 점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언젠가 미얀마에 갔을 때 인레 호수(lnle lake)에서 며칠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장관이더군. 길이 22km, 폭 11km로 미얀마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라고 하였지 아마. 해발 889m 고지대에 위치해 연중 시원한 기후인데다 보트를 타고 호수 위 수상가옥 틈새를 둘러보거나 낚시도 하는 이색 체험을 즐길 수도 있구 말이야. 호수 주위에 띄엄띄엄 들어서 있는 마을과 황금탑 사원들, 그리고 수상 농경지에서 자라는 각종 채소 열매를 구경하기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황금빛 석양이 수면 위로 붉게 물들이는 풍경에 취해 보기도 하고. 허허.”

“어머. 낭만적이군요. 교수님.”

“싫지는 않았지. 시간 여유가 되면, 한 번 가보라구.”

얘기를 하고 오는 사이에 우리는 도로의 끝자락으로 왔다. 중앙광장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아래를 보면 푸른 호수와 맑은 하늘, 중앙광장 주변에 활짝 핀 각종 꽃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앙광장으로 내려온 우리는 미륵 팀원들과 합류하여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호수공원을 가로지르는 세호교를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나란히 걸어갔다. 1백여m쯤 가면 잘 단장된 공연장이 있다. 무대섬이다. 평소 이곳에서는 각종 행사와 축제가 진행된다. 특별 이벤트가 열리지 않을 때는 주변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커다란 그늘 쉼터가 되기도 한다. 마침 아무런 행사가 없을 때였으므로 우리가 임시수업을 하기에는 적당한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각자 중앙의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2)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시대를 시조로부터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까지를 삼대로 구분합니다.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의 28 왕을 상대(上代), 제29대 무열왕으로부터 제36대 혜공왕까지의 8왕을 중대(中代), 그리고 제37대 선덕왕(宣德王)에서부터 제56대 경순왕까지의 시기를 하고(下古)라 했어요. 이 경우, 금산사 미륵전을 세우고 또 미륵불을 제작, 봉안한 진표율사는 주로 신라의 제35대 경덕왕(재위 742∼765) 대에 활동하였으니까, 중대 말기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강의를 시작하면서 나는 먼저 진표율사를 소개하였다. 미륵 팀원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내가 은연중에 강조한 면도 없지 않았으나 학생들 역시 진표율사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던 터였다. 아니, 학생을 역시 각자 진표율사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쇠는 달궈졌을 때 두드려야 한다.

“진표율사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분은 한국 불교사에서 매우 특이한 발자취를 남긴 신라시대의 고승이라고 할 수 있어요. 먼저, 고구려 백제는 물론이고 신라시대 당시에 유행이다시피 하였던 중국, 서역, 인도에서 구법 유학도 하지 않았던 점이 눈길을 끕니다. 보세요. 삼국시대에는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많은 고승이 구법 유학을 다녀왔어요. 중국은 물론 멀리 인도까지요. 당나라 구법승 의정(義淨)이 남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우리 선조 아홉 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요. 인도 구법승으로 아리야발마, 혜엄, 현태, 구본, 현각, 혜륜, 현유 등이 그들입니다. 대단하지 않나요? 극동의 한반도 고승들이 중국 대륙을 건너고 다시 서역을 건너 인도까지 구법 유학을 하였다! 중국 당나라의 고승으로 인도로 떠나 17년 동안 유학하다가 중국으로 돌아온 현장(玄奘) 삼장법사가 남긴 『대당서역기』를 보면, 기가 막혀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끝없는 사막, 마을이나 사람은 물론 오아시스도 없는 곳, 서역 땅. 그곳에는 오직 하얀 뼈만이 뒹굴고 있었다. 해골 등을 오히려 이정표 삼아 현장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걷고 또 걸어갔어요.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늙고 여윈 말 한 필과 말 등에 실은 물 한 통,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식량뿐이었습니다. 사막에서 수없이 많은 회오리바람을 만났으며, 물과 양식이 떨어져 모랫바닥에 쓰러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인도 구법승들은 그렇게 목숨을 걸고 구법 유학을 하였던 겁니다. 중국인도 그러할진대, 한국인이라면 오죽하겠습니까.”

“….”

“아무래도 구법 유학은 당나라로 많이 갔어요. 고구려 출신 석파야, 인법사, 실법사, 승랑대사, 의연, 원표, 백제 출신 겸익 아니, 이 분은 인도로 유학한 분이고, 현관대사, 그리고 신라출신 원광, 안함, 자장, 원측, 신방(神昉), 무상선사, 무루대사, 김지장, 각덕, 명랑, 혜통, 불가사의(不可思議), 원측, 승장(勝莊), 의상, 혜초, 그리고 진표율사의 스승 숭제법사 등등.”

나는 생각나는 대로 구법 유학승 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많군요.” 잠자코 듣고 있던 정지원이 말했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요. 교수님.”

“그런가. 이 밖에도 많이 있겠지.” 나는 정지원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진표율사는 구법 유학에서 예외적인 인물이란 말이지. 그런데도, 구법 유학생 누구보다도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것도, 이제 자료를 검토하겠지만,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말이지요.”

“원효도 구법 유학을 하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정지원이 말했다.

“맞아요. 진표율사와 함께 특이한 고승 중 한 분은 원효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다른 고승들도 있겠지만.”

“….”

“원효 역시 한때는 당나라 구법 유학의 꿈을 갖고 두 번씩이나 시도하였지요. 처음에는 가지 못했고, 두 번째는 가지 않았어요. 그가 구법 유학을 포기한 일화는, 해골 물, 그건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다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아무튼 원효, 진표의 명성은 다른 중국 유학승 이상으로 중국까지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진표율사는 원효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원효는 많은 저술을 직접 찬술하였고, 그 저술이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어요. 반면 진표율사는 단 한 편의 저술도 남기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그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고, 그에 대한 최초의 전기적 기록은 국내보다는 중국에서 먼저 문자화되어 『송고승전』을 비롯하여 몇 권의 중국기록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나는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 다른 의문을 제시하였다. 물론 학생들의 주의를 끌기 위함이었다.

“그야…, 진표율사의 깨달음 이후 신통력, 교화력이 남달랐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수님.”

정지원이 대답했다.

“신통력, 교화력이 남달랐다! 뛰어났다는 말이겠지? 그럴듯하군. 좋아. 하지만, 그건, 좀 평범한 진단이 아닐까. 다른 의견은 없을까?”

“금산사 미륵전 아니, 미륵불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요. 교수님. 진표율사는, 한국 미륵신앙의 선구자가 아닐까요?”

석사 1학기에 재학 중인 강정화가 말했다.

“그것도, 일리가 있군!”

“하지만, 선구자라고 하기에는 좀….”

학문적 욕심이 누구보다 강하고, 그만큼 열정적인 정지원이 고개를 저었다.

“좀, 뭔가?” 내가 물었다.

“진표는 신라 중대 말기 인물이라고 하셨잖아요, 통일신라시대. 그렇다면, 백제가 멸망한 뒤인데, 백제시대에 창건한 익산 미륵사를 보면, 백제의 미륵신앙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미륵사에 있었던 익산지역은 금산사가 있는 김제지역과 이웃하고 있는, 아주 가까운 지역이구요. 미륵사 창사연기설화를 보면.”

“그렇다면, 자네가 미륵사 창사연기설화에 대해 발표할 수 있겠나?”

나는 정지원에게 발언하도록 하였다. 그가 발표하는 동안에 물이라도 한 잔 마시자는 의도였다.

“미륵사 창사연기설화를 얘기하기 전에 먼저 백제의 서동설화를 소개하는 것이 순서겠는데요. 아니, 그 전에 백제 제30대 무왕의 어린 시절 얘기부터 해야겠는데, 한 마디로 그는 용의 아들이었다고 해요….”

불교설화를 전공하고자 하는 정지원은 마치 발표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의 발표에 따르면, 아니 그가 주로 인용하고 있는 『삼국유사』 무왕 조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薯]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못 속의 용 관계하여 낳았으므로 무왕이 용의 아들이라는 얘긴가?”

내가 물었다.

“네. 적어도 표면적인 의미는 그래요. 『삼국유사』의 이어지는 부분이 널리 알려진 서동 설화입니다. 무왕 조는 크게 네 가지 화소(話素, motif)로 구성되었어요. 첫 번째 화소는 무왕의 출생과 성장 과정, 두 번째는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는 이야기, 세 번째는 서동이 왕비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는 부분이거든요.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화소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꼽히는 익산 미륵사를 창건하는 소위 미륵사 창사연기설화입니다.”“

정지원은 백제 미륵사 창사연기설화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발표했다. 『삼국유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한다.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곧 지명 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전(殿)·탑·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하였다.

진평왕이 여러 장인을 보내서 이를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은 남아 있다.

 

“잘 들었네. 미륵사 창사연기설화의 의미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해 보도록 하고, 방금 발표한 바와 같이 미륵사 창사는 백제의 미륵신앙의 절정을 이루는 증거일 수 있다는 지적에 나도 긍정적이네. 백제 무왕의 재위연대가 600년에서 641년까지이고, 진표율사가 주로 활동한 신라의 경덕왕의 재위 연도는 742에서 765년까지야. 1백30년 정도의 차이가 나지. 발표와 같이 미륵사가 보여준 백제의 미륵신앙이 진표율사의 미륵신앙에서 하나의 환경적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도 동감이야.”

나는 정지원의 발표를 정리하고, 학생들에게 미리 준비해 온 복사물을 나누어 주었다. 진표율사와 관련된 문헌자료를 복사한 것이었다. 내가 학생들에게 각자 참고하라는 말을 끝냈을 때, 광장 쪽에서 키가 훌쩍 크고 짙은 갈색 선글라스에 등산 모자를 쓴 중년이 겅중겅중 걸어왔다. 그가 막 무대섬으로 들어오자 학생들이 먼저 알아보고 모두 일어나 인사를 하였다. 동료인 김현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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