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약속 6

제4장 귀촉도

 

1)

미륵존불 미륵존불 미륵존불 미륵존불 미륵존불 미륵존불⋯

그날도 진표 행자는 법당에서 홀로 미륵존불을 부르며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1천 일 수행정진 중에 두 달이 지났고, 그날도 벌써 두 시진을 지나도록 오체투지를 하는 중이었다. 이따금 몸이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 오체투지를 감당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부처님 명호를 외는 염불수행을 하였다. 그가 외는 부처님 명호는 미륵불이었다. 누구의 지시에 의해 미륵불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출가할 때부터 그의 마음에는 미륵불이 가득 차 있었다.

미륵은 산스크리트어 Maitreya를 음역한 것이다. Maitreya는 ‘자慈maitrī를 갖춘 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미륵은 자씨慈氏, 자존慈尊으로 의역된다. 미륵은 대자大慈를 상징한다. ‘자慈’는 ‘사랑할 자’ 자로서 사랑하다, 사랑, 어머니, 자식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미륵은 가장 큰 특징은 장차 오실 부처, 미래불로서 희망을 상징한다. 불전에서는 흔히 과거불로서 연등불燃燈佛, 현재불로서 석가모니불 그리고 미래불로서 미륵불을 이야기한다. 석가불은 현재불이지만 동시에 ‘과거불’이 되었다. 현재는 무불시대이고, 미륵은 현재 도솔천에서 천상사람들을 교화하면서 인간세상으로 하생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든 뒤 56억7천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부처이다. 혹은 석가입멸 후의 부처의 가르침의 행동 방법을 3기로 나눈 정법시, 상법시, 말법시를 정상말正像末 3기라고 하는데, 정법시는 부처의 교법과 수행자와 증과의 세 가지가 정비된 시기, 상법시는 증과를 볼 수는 없으나 교법과 수행의 양자가 존재해서 유사한 불법이 행하여지는 시기, 그리고 말법시라는 교법만이 있어서 수행도 증과도 없는 시기를 말하며, 미륵불은 바로 이 시기에 하생하게 된다. 정법과 상법의 시한에 대해서는 경론에 따라서 1천 년, 1천5백 년, 2천 년 등의 설이 있다. 어느 설이든 불멸 후 정법과 상법 두 시기가 지나면 말법시기로서 그 시한은 1만 년이다. 미륵이 하생한 세계는 사바세계가 이상적인 국토로 변하여 땅은 유리와 같이 평평하고 깨끗하며 꽃과 향이 뒤덮여 있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수명은 8만4천 세에 이르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있고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미륵은 사바세계의 중생이 오욕으로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연민의 마음을 갖게 되고,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한다. 이후 미륵은 중생 교화의 대장정에 나선다. 용화3회 설법龍華三會說法이 그것이다. 이 회상에는 사바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은 물론 욕계의 수많은 천인들이 와서 공경, 예배하고 구제받게 된다.

 

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모지⋯.

 

진표는 쉰 목소리로 다시 〈참회진언〉을 외웠다. 부처님 미륵불을 외다가 지치면 〈참회진언〉을 외고, 〈참회진언〉을 외다가 또 지치면 오체투지를 하였다. 미륵불 앞에서의 혹독한 참회정진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참회정진도 아니었다. 출가한 이후 자연스럽게 행하게 된 것이 그랬다. 행자란 출가하여 계를 받기 전의 과정에 있는 사람을 지칭하였다. 일종의 예비 승려이다. 정식 승려가 아니므로 지금 진표와 같이 법당을 차지하고 수행 정진한다는 것은 은사인 숭제법사의 특별한 배려가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숨은 가빠졌고, 온몸으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몸의 고통이 아니었다. 몸의 고통 따위야 참고 이기면 그만이었다. 괴롭고도 괴로운 것은, 그러면서도 괴로움을 떨쳐낼 수 없는 것은 정신의 고통이었다. 온몸을 바닷물에 던지듯 오체투지를 하고 일어서면서 정면으로 마주치는 부처님의 오묘한 미소도 그의 괴로움을 없애지 못하였다.

“오. 미륵 부처님….”

진표는 오체투지를 할 때마다 가슴을 쥐어짜듯 고통스러운 음결로 부르짖었다. 눈앞에는 속세에서 맺은 인연의 그림자들이 악몽처럼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다.

 

2)

출가하기 3년 전이었으니까, 진표가 열두 살 때였다. 늦가을이다. 진내마 부부와 아들 진표가 유람을 떠나는 날이었다. 부모와 함께 유람 길에 올랐으므로 진표는 벌써 며칠 전부터 마음이 들떠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이 유람이지 고행길과 다름없었지만! 그날, 판돌이 고삐를 잡은 말 안장에 타고 동구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진표는 기분이 상했다.

“멈춰, 똘아.”

똘은 노비 판돌을 말하였다. 진표가 말하기도 전에 똘이는 이미 고삐를 앞으로 바짝 당겼다. 당산나무 아래였다. 진표는 뿌옇게 떨리는 시선을 밀어냈다.

“나리, 나릿님들! 제발 부턱허는디요. 우리 목숨을 살려 주시씨요 잉. 올 한 해 논 서 마지기 농사지어서 이것저것 갚고, 남은 것이라고는 쌀 닷 말이 전부인 게라. 그것마저 뺏어가면 우리 열두 식솔은 워쩌 살라고 그려요. 잉.”

문밖까지 달려 나와 관원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걸복걸하는 사복과 그의 아내는 진내마의 집에서 다섯 집 건너 언덕 편에 살고 있었다. 길바닥에는 관원들이 사복의 집에서 빼앗다시피 들고나온 쌀자루가 세 개가 놓여 있고, 주위에는 관원을 따라온 사내들 두 명이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엉거주춤 서 있었다.

열 명이 넘어 보이는 사복의 자식들이 병아리같이 문밖으로 조르르 나와 부모가 당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치렁치렁 늘어졌고 숯검정같이 검고 꾀죄죄한 얼굴에 기력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깡마른 자식들은 모두 겁에 질린 모습이다. 집 밖을 나설 때는 말을 탔고, 또래의 노비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진표는 그들과, 십중팔구는 그들과 같은 모습의 아이들이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이 때로는 신기로웠고, 때로는 외로웠고, 때로는 부끄러웠다. 적어도 진표의 기억에 우월감을 느끼거나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진표는 그런 천성을 갖고 태어난 아이였다. 사복의 자식 중에 진표 또래인 바우가 중간이었다. 아직 젖먹이인 아기는 바우의 누나가 업었는데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이따금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음마. 이것들이, 말을 워찌 고로코롬 싸가지 없이 한당가잉. 우리가 뺏기는 뭣을 뺏아간다고 그려야. 이거사 아. 요거는 세금이여. 알아 묵것냐. 세금이란 말이시. 신라 백성으로 살아갈려면 세금을 내야 헌당게.”

관원이 사복의 내외를 뿌리치기 위해 바짓가랑이를 툭툭 걷어차며 비아냥거렸다.

“긍게. 시금이란 것이, 이런 시금 저런 시금, 저번에 다 탈탈 털어서 내지 않씹뎌. 나라라는 것이 웬 날강도도 아니고여라, 허구한 날 뺏어만 간대요. 아무리 망국으 백성이라고 허지만서도 해도, 혀도, 혀도 너무 헌다니께요 잉.”

사복은 바짓가랑이를 움켜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며 계속 애원하였다.

“아니, 이것들이.”

그때 옆에 있는 관원이 사복 아내의 복부를 발길질하듯 밀어 찼다. 죽은 나뭇가지처럼 마른 사복의 아내는 힘없이 굴러 길바닥 아래 논바닥으로 떨어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꿈지럭거리며 일어난 그녀는 길바닥으로 다시 올라왔다.

“죽여라. 차라리 죽여라. 이놈들아.” 사복 아내는 삿대질해대며 바락바락 악을 썼다. “오메. 백성 죽이는 나라가 무슨 소용이란 말이더냐. 이놈들아. 죽여라. 이대로는 못산다 아. 죽일 테면 죽여. 이 천벌을 면치 못할 인사들아.”

민초란 그런 것이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하였다. 빼앗길 대로 빼앗기고, 짓밟힐 대로 짓밟혀버린 사복의 아내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지경에 이르자 오히려 돌변하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덤비는 자에게 더 이상 무서운 것이 없는 법이다. 사복의 아내는 조금 전에 자신을 걷어찼던 관원을 향해 덤벼들어 멱살을 잡았다.

“이 년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관원이 다시 사복의 아내를 뿌리쳤다. 그녀는 힘없이 동댕이쳐졌다. 그가 막 늦가을 낙엽처럼 흩날리는 그녀를 향해 냅다 걷어차려는 순간,

“음마. 뭔 짓이여. 시방.”

다른 관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던 사복이 재빠르게 돌진하였다. 그리고 다른 관원과 함께 길 아래 언덕으로 나뒹굴었다.

“저, 저, 저.”

차마 말을 못하고 시큰거리는 것은 진표가 탄 말고삐를 잡고 있는 똘이였다. 당장 달려가서 사복을 도와주고 싶다는 불만의 표출이었다. 그때까지 말없이 관원들의 노략질 광경을 지켜보던 진표 역시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복의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진표가 들어도 사복과 그의 아내가 하는 말은 틀린 것이 전혀 없었다. 그들 열두 식구는 일 년 내내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들이 온갖 명목의 세금으로 수확물을 바치는 것도 진표가 보았다. 그랬는데, 세금은 끝이 없는 것인지, 또 뜯어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쌀 닷 말이 전부라는, 그것으로 열두 식구가 겨울을 나야 한다는 사복의 말도 꾸며낸 말은 아닐 터였다. 그들이 실랑이하는 동안 진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콧등이 아려왔다.

“헛. 흠. 무슨 일이냐?”

그때, 헛기침을 하며 훌쩍 큰 백마를 타고 나타는 것은 진내마였다. 말고삐를 잡은 것은 춘삼이었다. 진표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에게 달려가 일을 처리해 달라고 부탁할 요량이었다.

“내마 나리! 오셨어라.”

관원들이 진내마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네.”

“글씨. 그것이.” 관원은 쉽게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세금을 내라고 해도, 말을 들어 먹지 않아서 오늘 직접 받으러 왔는디.”

관원이 변명을 해댔다.

“뭐하고 있느냐. 당장 멈추지 못할까?”

진내마는 논바닥에서 씨름하듯 엉켜있는 관원과 사복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제야 관원과 사복이 서로를 밀어내고 상대를 마주 보며 식식거렸다.

“아이고. 내마 나으리. 마침 잘 오셨어라. 오매. 나라님도 낯짝이 있는 벱이제, 이기 무슨 날벼력이다요. 잉, 저번에 시금을 다 내부렀는디, 또 내라고 헌당게라. 우리 식솔 한겨울 날 양석인디, 다 가져가 불면 우리는 워쩌 살라고 그런데요. 이것이, 참말로 ”

그제야 사복의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 진내마를 향해 하소연했다.

“요리 백성 죽여놓고, 저거덜만 등 따습게 잘 살문, 무슨 대수다요 잉. 나라님이고 뭐고, 천 벌을 받을 것이요 잉. 천벌을.”

그래도 그녀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허공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이보게, 자네들!”

진내마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미 다 파악했다는 듯 관원들을 향해 점잖게 꾸짖었다.

“…한겨울 양식이라고 하잖느냐. 헛. 흠.”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관원들에게 몇 마디를 한 뒤에 진내마는,

“팔용은 이 자들에게 쌀 닷 말을 내주도록 해.”

뒤에 서 있는 팔용을 향해 말했다.

잠자코 아버지가 일을 처리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진표의 마음에는 먹구름이 밀려왔다. 혼란스러웠다. 가장 먼저 드는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양쪽 모두의 처지를 살려준 일처리 자체는 매우 훌륭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도 진표의 마음 한구석은 썩 개운하지 않았다. 망국의 백제 유민 중의 한 사람인 아버지의 위세가 그 정도라는 것이 자랑스럽기보다는 왠지 모를 어색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가자.”

일처리를 끝낸 진내마가 유람 길을 재촉하였다.

늦가을.

이미 한 여름의 열기를 잃은 해는 중천을 향해 엉기적엉기적 매우 힘겹게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3)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지면 나머지 단추도 잘못되는 것은 당위였다. 그날 유람은 시작부터 마음을 상했는데, 끝까지 그 모양이었다. 아니, 요즘 세상에 유람이라는 말이 사치가 아닐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진내마 일행은 북으로 갔다. 진내마와 진표는 각자의 말을 탔고, 정씨 부인 길보랑은 말이 끄는 수레에 올랐다. 그리고 노비 세 명이 말을 잡았다. 그들이 고착한 곳은 집 떠난 지 한나절이 지날 무렵이었다.

여기는 사비주泗沘州였다. 소부리주所夫里州라고도 하였다. 어떤 식으로든 불명예스러운 지명이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 전에는 사비성으로 백제의 큰 성이었고 도읍 자체의 명칭이기도 하였다. 본래는 백제의 소부리군所夫里郡이었다. 백제가 좁은 웅진熊津을 버리고 넓은 들이 있는 곳에 더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538년(성왕 16) 봄이었다. 그때 성왕은 이곳에 도읍하고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다.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도성 주위에 사비성을 쌓았다. 이 성은 부소산을 감싸고 있고 양쪽 머리가 낮게 둘려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므로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했다. ‘사비泗沘’가 ‘소所’와 같은 어형이고 ‘부리夫里’가 ‘읍邑’을 뜻하는 것으로 ‘수읍首邑’의 의미를 갖는다는 뜻으로 사비성이라고 하였다. 소부리가 서야벌徐耶伐과 같은 뜻의 ‘동경東京’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설도 전한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사비주를 설치하였다. 말하자면 강등이다.

진내마 일행은 왕궁터로 갔다. 그러나 사비주에 도착할 즈음부터 진표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버지. 여기가 왕궁이었단 말입니까. 믿어지지 않아요.”

온통 폐허인 채로 바람과 고요만이 일렁이고 있는 왕궁터를 둘러보는 진표는 절규하듯 소리쳤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이런 데를, 왜….”

좀체 앞에 나서지 않은 정씨 부인 길보랑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유람인 줄 알았는데, 왜 이런 곳에 데리고 왔느냐는 원망이었다. 진표도 어머니의 말에 동감이었다. 아버지는 왜 이런 곳에 가족을 데리고 왔을까. 진표는 진내마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진표뿐만이 아니라 진내마 역시 사비주에 들어설 때부터 도통 말이 없었다.

“잘 봐두거라!”

왕궁터를 둘러보고 나왔을 때, 진내마가 진표를 향해 도장을 찍듯 꾹 눌러 말했다.

진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의도를 도통 모르겠다. 그가 알고 있는 백제의 역사는 대충 그러하였다. 백제는 서기전 18년에 부여족 계통인 온조溫祚 집단에 의해 한강 지역을 중심으로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고 건국되었다. 4세기 중반에는 북으로 황해도에서부터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일대를 영역으로 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660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3년간 치열한 부흥전쟁을 전개하였지만 이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패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678년 동안 존속한 백제의 마지막 왕궁은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은 해골과 다름없었다. 다른 어느 왕도보다도 화려했을 것으로 보이는 왕궁터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백제가 멸망한 지 반 세기가 조금 지나지 않았을 세월에 이렇게 자취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듣기로는 사비성 당시에는 10만 호가 태평을 즐겼던 화려한 왕도였다.

왕궁터를 뒤로 하고 진내마 일행은 부소산을 올랐다. 유람이나 가자고 했던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가족을 데리고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오지 않은 것만 못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씨 부인뿐만 아니라 진표의 불만도 커졌다.

“조룡대釣龍臺라고 하오이다. 허허.”

그때 백발이 온통 헝클어져 치렁치렁 늘어지고 수염이 가슴 밑으로 흘러내리는 한 노인이 바람처럼 나타나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진표가 보기에 마치 산신령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표는 말없이 조룡대라는, 깨진 자국들이 여기저기 보이는 괴석을 보았다. 마치 괴석이 강가에 걸터앉은 모양새였다.

“참 오랜만에 인기척을 느낍니다. 잘 보아야 합니다. 똑똑하게, 보아 두어야 하오이다, 허허. ”

“반갑습니다. 노인장. 이곳에 사시나요?”

잠자코 말이 없던 진내마가 말을 걸었다.

“죽지 못해 살지요. 지키려구.”

“지키다니오. 무엇을 지킨다는 것이오?”

“아무도 찾지 않으니, 자꾸 없어질 거 아니오. 죽어가는 나라도 이곳을 지켜야지요. 백제를!”

“….”

노인의 말에 진내마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진내마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노인은,

“돌 위를 잘 보시오.”

진표가 뚫어지게 보고 있는 바위 위를 가리켰다. 말인즉, 바위에 여기저기 깨진 흔적으로 보이는 것은 용이 발톱으로 할퀸 자국이라는 것이었다.

“전하는 말인즉, 그러하지요.” 하고 노인은 조룡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강에 도착하여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홀연히 비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더 이상 군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생각에 잠겼던 소정방이 흰 말로 미끼를 만들어 강물에 던졌다. 마침내 용 한 마리를 낚았다. 잠깐 사이에 날이 개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할 수 있었다.

“해서, 이 강을 백마강이라 하고, 바위는 조룡대라고 한답니다. 패자들이 부르는 자포자기의 구슬픈 노래지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허허. 그것이 아니면 승자들이 만들어 낸 노래이던가!”

조룡대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 노인은 쓸쓸한 뒷모습을 남기며 사라졌다.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이오이다.”

산 아래쪽으로 사라지면서 노인은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한 말을 메아리처럼 남겼다.

노인이 떠난 뒤에 진내마 일행은 다시 부소산을 올랐다. 노인이 가보라고 한 낙화암이다. 전하는 애기는,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었을 때 궁녀들이 쏟아져 나와 이 바위 위에 올라가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고 이름하였다. 왕궁터는 물론이지만, 부소산을 중심으로 어느 곳 하나 슬픈 얘기를 담고 있지 않은 물체는 없는 듯하였다. 부소산성을 돌아내려 오면서 진표는 매우 울적해졌다. 발아래 왕궁터가 보였다. 그날 진표가 보았던 가장 기분 나빴던 곳은 소정방 비였다. 당나라 고종이 소정방을 보내 신라의 김유신 장군과 더불어 백제를 쳐서 멸망시키고, 이곳에 돌을 세워 그 공적을 기록한, 이른바 저들의 승전비였다.

한 세기 전에는 백제의 도읍이었으나 지금은 신라 땅―. 이곳에 백제는 없었다. 아니, 없는 것이 아니라 주검이 되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의 자취는 여전히 찾을 길이 없었다. 진내마 일행이 사비주를 둘러보는 동안, 만난 사람은 부소산 조룡대 앞에서 만난 산신령같이 생긴 노인이 전부였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진표는 문득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동으로, 동으로 그의 눈길이 달려가는 곳은 지난해 이맘때쯤 아버지를 따라가 보았던 이 나라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송장처럼 죽어있는 백제의 옛 왕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도시였다. 한눈에 보아도 풍요로움과 화려함이 넘쳐흐르는 왕도였다. 끝없이 펼쳐진 기와지붕, 집집마다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숯으로 밥을 지어 먹기 때문이었다.

 

EnglishFrenchGermanItalianJapaneseKoreanPortugueseRussianSpanishJavan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