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히더,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피터 히더,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이순호 역, 뿌리와 이파리, 2008)

세 대륙에 걸친 세계제국 로마의 멸망은 많은 역사가들의 관심을 끈 문제이다.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의 명저 《로마제국쇠망사》는 로마제국의 흥기가 아니라 그 몰락에 초점을 맞추어 큰 인기를 끈 책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가답게 기번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가체제를 약화시킨 주범이라고 보았다. 시민정신을 약화시켰을 뿐 아니라 기독교 국교화 이후에는 교회로 많은 돈이 들어가 국가의 재정도 약화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요인을 중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서는 로마 사회의 양극화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페리 앤더슨은 대지주들이 중소 지주들의 농장을 흡수하고 독립농민을 몰락시켜 그 토지를 가로채 경제적 난국과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켰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서로마제국에서 주로 나타난 현상이다.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 부유한 지주계급은 탈세를 일삼고 군복무도 회피하였다. 그 결과 로마제국 말기에는 국방을 게르만족 용병부대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지주계급의 착취와 국가의 세금압박에 직면한 로마의 민중들은 조직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갈리아를 중심으로 한 ‘바가우다이’ 반란이 그것이다. ‘바가우다이’는 갈리아어로 ‘투사’를 뜻한다고 하는데 도망노예와 피폐한 농민, 탈주병 등이 모여들어 형성된 비적집단이었다. 이들은 독자적인 군대와 재판소를 설치하는 등 로마에 대항하는 실질적인 독립국가를 선포하였다.

이러한 로마 사회의 내적 모순을 로마제국 멸망의 주된 원인으로 보려는 입장을 비판하는 역사가들도 많다. 여기서 소개하려는 피터 히더 교수가 그런 관점을 대변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로마제국은 내부적 약화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외부 세력 즉 게르만족이 로마제국 영토 내로 진입하여 제국의 여러 주요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히더 교수는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의 부제를 ‘문명은 왜 야만에 압도당하였는가’라고 붙였는데 로마제국이 어떻게 하여 자신보다 문명 수준이 훨씬 낮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는지를 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히더 교수의 전공은 고트족 등 로마제국 주변에 살던 게르만족 연구였다. 로마제국은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국경으로 정하고 그 너머 지역을 야만족이 지배하는 ‘만족의 땅’(barbaricum)이라 하였다. 게르만족의 땅이라는 뜻으로 ‘게르마니아’라고도 한다.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은 로마제국 멸망의 주된 원인이 게르만족의 이동에 있다고 보고 그를 중심으로 로마제국 멸망사를 서술한다.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이 출범한 시기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인 서기 9년 게르마니아 깊숙이 전진했던 로마군 2만 명이 게르만족 연합군에 의해 궤멸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로마는 게르마니아를 정복하려는 생각은 접었다. 대신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국경으로 설정하고 그 국경선을 요새화하였다. 그런데 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침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2세기 중반 여러 게르만족이 정착할 땅을 요구하며 국경을 침략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로마는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국경 지대에서의 말썽은 끊이지 않아 철학자 황제로 알려져 있는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오랫동안 국경지대 막사에서 지내야 했을 정도이다. 3세기 말에는 다뉴브강 북안에 있던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게르만족의 침략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변경 지역의 게르만족들이 골칫거리였던 것은 사실이나 376년 이전에는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의 생존까지 위협한 것은 아니다.

일부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동맹(페데라티) 노릇을 선택하였다. 동맹으로서 로마제국의 재정지원을 받아 로마의 부를 일부 향유할 수 있었다.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발견되는 수장급 무덤들에서 발견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그를 입증해준다. 로마제국과의 접촉을 통하여 게르만 사회는 부유해졌다. 로마의 부를 누릴 수 있었던 수장급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무장전사 집단을 거느릴 수 있어 정치적으로도 권세가 높아졌다. 권력의 강화와 더불어 부족들 간의 정치적 통합도 촉진되었다. 로마제국 초기와 비교하여 4세기 경 게르만족 사이에서 더 강한 집단이 생겨나 그러한 집단들의 우두머리는 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히더 교수는 게르만족의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동양유목민 훈족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376년 고트족 난민집단이 다뉴브 강을 건너 로마제국 영토 내로 대거 쏟아져 들어온 것은 훈족의 압박 때문이었다. 376년은 게르만족 이동의 막을 올린 해라고 할 수 있는데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의 100년간은 바로 이 376년에서 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자리에서 쫓겨난 476년까지를 말한다. 다뉴브 남쪽으로 넘어온 고트족 난민집단은 로마 관헌들의 소홀한 대접과 속임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결국에는 로마 황제까지도 고트족과의 전쟁에서 죽는 일이 벌어진다.(387년 하드리아노플 전투) 406년에는 수에비족, 알란족, 반달족이 공모하여 라인 국경을 돌파, 갈리아를 약탈하며 휘젓고 다니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집단들은 갈리아를 황폐화시킨 지 2년 만에 스페인으로 진출하였다. 그 가운데 반달족은 바다를 건너 로마제국의 곡창지대인 북아프리카를 점령하였다. 이는 로마제국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런데 406년의 이 세 족속의 이동도 훈족의 압박에 의한 것으로 많은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모두 10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에서 저자는 이러한 게르만족 이동의 원인을 제공한 훈족에 대해 두 개의 장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훈족의 나라 훈제국은 아틸라 왕(재위 434-453) 때 절정기를 이루었는데 그 영토가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부터 게르마니아 일대를 포괄하였다. 훈제국은 알란족 같은 이란계 유목민 집단 뿐 아니라 게르만족들을 대부분 지배하였다. 북방 초원과 게르마니아의 지배자 훈제국은 453년 아틸라의 갑작스런 죽음 후 급속히 무너져 내리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훈제국이 존속하는 동안 로마제국 특히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점이다. 이는 로마와 접경한 훈제국이 게르만족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아틸라가 죽기 직전 훈제국은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침공하였지만 그 이전 수십 년간 서로마제국과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서로마제국은 어느 면에서 훈제국의 덕을 보았던 것이다.

아틸라 사후 게르만족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자 여러 게르만 집단들이 훈제국 영토를 벗어나 로마제국 영토 내로 쇄도해 왔다. 게르만족의 침략을 모면한 동로마와는 달리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들의 이주와 공격으로 인하여 큰 피해를 보았다. 서로마 영토 내로 진입한 게르만족들은 점차 자치집단에서 독립된 왕국으로 변모해 갔다. 그리하여 서로마제국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영토로는 이탈리아와 남프랑스 일부 정도만 남게 되었다. 영토가 줄어들어 조세수입은 크게 감소하여 군대도 유지하기 힘들었다. 곳곳에서 로마의 행정, 군사체계가 무너져 내렸다.

이탈리아에도 게르만족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이들은 서로마제국의 용병으로 들어왔다. 그 용병대장 가운데 한 사람이 오도아케르(오도바카르)였다. 이 사람의 부친은 훈족 왕 아틸라의 최측근이었던 에데코로서 아틸라 사후 스키리족의 왕이 된 인물이다. 게르만족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는 서로마제국의 실권자가 되어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소년 황제 로물루스를 폐위시켰다. 예전에는 오도아케르 같은 실권자가 마음대로 새로운 황제를 임명하거나 자기 스스로 황제가 되기도 하였는데 그는 달랐다. 동로마제국 황제로부터 이탈리아 왕으로 인정받아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던 것이다.

역사가들은 로물루스의 퇴위를 서로마제국의 멸망시점으로 본다. 황제는 사라지고 만족의 우두머리인 오도아케르가 통치하는 시대가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왕 오도아케르는 황제만 입는 망토와 제관 등을 동로마황제에게 보내 버렸다고 한다. 이탈리아 왕 오도아케르의 뒤를 이어 동고트족이 와서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갈리아에는 프랑크족이 들어와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로마제국은 사라지고 그를 대신하여 게르만 정복자들이 다스리는 중세가 막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한마디 하자. 전문번역가의 번역이라서 그런지 번역이 나무랄 데가 없이 훌륭하다. 번역이 의심스러워 필자가 갖고 있는 영어원서를 열어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딱 하나 사소한 오류가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번역상의 오류가 아니라 역주 오류이다. 역자는 424쪽에서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톰슨 교수에 대한 역주를 붙였는데 같은 이름의 다른 인물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본서의 여러 곳에서 인용되는 에드워드 아더 톰슨(1914-1994)은 노팅검 대학 교수를 역임한 사람으로 영국에서 만족사 연구를 선도한 학자이다. 그는 이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역주에 엉뚱하게 소개되어 있는 인물은 에릭 홉스봄과 더불어 20세기 후반 영국의 사회사를 개척한 에드워드 팔머 톰슨(1924-1993)이다. 산업혁명기 영국 노동자들의 역사를 다룬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창비, 2000)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두 톰슨 교수 모두 영국 공산당에 발을 들여놓았던 마르크스주의 계열 역사가인데 후자는 반핵활동을 비롯한 많은 활동을 하였던지라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꽤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학문적인 면에서 앞의 톰슨 교수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는 1948년 훈족에 대한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1990년대에 《The Huns》로 약간 제목을 바꾸어 ‘유럽의 제민족’ 시리즈의 하나로 개정판이 나왔다. 저자는 그 동안 제기된 비판에 대응하여 본문의 상당 부분을 손대고 싶었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히더 교수에게 개정작업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별세하는 바람에 본문에 대한 개정은 거의 이뤄지지 못하였다. 그 대신 히더 교수는 훈족 연구에 관련된 주요한 사료들과 함께 최근까지 이루어진 주요한 연구들을 소개하는 짧지만 유용한 후기를 덧붙여 놓았다. 톰슨 교수의 또 다른 저서 가운데 하나로 《Romans & Barbarians : The Decline of the Western Empire》이 있는데 로마제국 말기 게르만족 연구의 고전으로 꼽힌다. 여기서 소개하는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은 톰슨 교수의 이러한 연구를 계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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