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성에서 영성으로
서양 철학자 하이데거는 “다가올 사유는 더 이상 철학”이 아니며 “형이상학보다 더 근원적으로”(Wegmarken) 사유한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적어도 형이상학으로서 철학이 존립할 여지는 이미 사라졌다시피 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철학이 지향한 바와 같이 세계 전체를 이성적 사유를 통해 절대적으로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게 종이와 펜을 다오. 그러면 내가 세상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지 논리적으로, 모조리 잡아서 깔끔하게 설명해주리’란 ‘담대한 혹은 오만한’ 주장은 이제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다. 신 죽음의 선포를 통해 최고 존재자를 정점으로 한 형이상학의 공고한 체계를 부수려한 니체, 형이상학의 숨겨진 근원으로 되돌아가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하이데거, 그리고 이들의 뒤를 따라 구조주의나 분석철학, 포스트모더니즘 등에 의한 거듭된 공세로 철학의 형이상학적 기반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철학의 상실은 아쉬울 것도 속상할 것도 없다. 더는 형이상학이 이해하는 대로는 자기를 내보이지 않는 존재의 보내 줌(schicken)이고 운명(Geschick)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출간된 『사유의 사태에로』에 실린 「철학의 종말과 사유의 과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철학이 자신의 과제(Sache)를 절대지나 최종적 명증으로 이끌려는 바로 그 곳에서는 더 이상 철학의 과제일 수 없는 사유되어야 할 어떤 것은 자신을 감춘다.”(Zur Sache des Denkens) 전통 철학이 담을 수 없는 또는 형이상학적 접근으로써는 도무지 만날 수 없는 것을 향한 새로운 사유는 형이상학 이전의 시원적 사유이자 형이상학의 표상적 사유 방식과 작별하는 또 다른 사유이다. 형이상학의 ‘앞서’이며 ‘넘어서’인 사유는 다만 철학이 끝났을 때 일어날 수 있다. “철학의 종말과 함께 사유가 끝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 새로운 시원으로 이행한다.”(Vorträge und Aufsätze) 헤겔의 유명한 말을 빌려 쓰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돼야 날아오른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서구 시원의, 또는 형이상학 이전의 희랍인들은 산이 있고 꽃이 있고 신전神殿과 광장이 펼쳐 있는 존재[~이 있다]를 경이驚異 속에서 ‘밝게 트인 빛 안에서 들어서 있음’, 즉 스스로부터 그 자체를 내보이는 발현發現으로서 경험한다. 또 이들은 밝게 열림으로서의 존재를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는 단일한 일자一者[hen]로 이해했다. 이때의 통일성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가 로고스로 부른 ‘자기 자신 안에 구분되어 있는 하나’라는 의미이다. 또 당시 그리스인들은 이를 우리말 ‘자연’으로 번역되는 ‘피시스’(physis)라 불렀다. ‘피시스’는 “개방성 안으로 피어남, 밝게 트임의 열림으로서 도대체 어떤 것이 그리로 나타나고 그 경계에 들어서 … 이런 저런 것으로 현존할 수 있는 장場이다.”(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
그러나 이른바 차축시대[야스퍼스]를 지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서 존재자를 인간 주체에 마주한 대상으로 앞세우고 그것의 본질과 근거를 추궁하고 해명한다. 그들에게 학문(철학)적으로 물을 가치가 있는 것은 ‘~이 있다’는 자명하고 뻔한 사실이 아니라 그것들이 실제로는 무엇으로 있으며, 어떤 근거에서 유래하는지 하는 문제이다. 다多의 개별자들을 초월적인 일一로 환원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주체의 철학, 인간중심주의가 싹트며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장악해서 이용하려는 패권적 의지가 그 후의 철학을 관통한다. ‘있는 그대로’가 ‘인간에 있어서’로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으로 각인된 인간의 표상 방식은 도처에서 단지 형이상학적으로 건립된 세계만을 볼 뿐이다.”(Vorträge und Aufsätze) 그 세계는 끝내 하나의 상像[세계상]에 그치지 사물事物 자체가 아니다.
‘이데아’, ‘현실태’, ‘실체’, ‘표상’, ‘이성이나 정신의 의지가 자기 전개’ 속에 정립된 것’, ‘의지에의 의지’ 등 모든 타자他者를 주체의 이성이나 정신으로부터 설명하려는 철학의 집요한 의지가 그때그때 역사에서 내놓은 존재들이다. 존재를 과정이나 이행으로 이해하는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역시 이성적 판단과 추리, 개념과 원리로써 세계를 통틀어 파악하려 한다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의 반열에, 아마도 마지막 자리에 포함될 것이다. 한 분석철학자는 그를 두고 ‘마지막 형이상학자’, ‘마지막 체계적 형이상학자’라 부른다.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모든 존재자를 남김없이 자기 앞에 줄 세우는 형이상학의 시도는 타자인 존재자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며 자유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 자신을 포함한 전체성으로부터 고립이며 자기 본질로부터의 소외이다. 이는 형이상학의 완성인 오늘날 기술 과학 시대에 적나라하게 입증되고 있다. 이 과정은 또한 주객분리의 역사로서 진행된다.
사유하는 ‘정신’과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를 독자적인 두 실체로 봄으로써 주객분리를 결정적으로 심화시킨 이는 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이다. 그 이래로 주객 사이의 틈을 메워야 하는 일은 철학이 걸머진 과제가 된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주객분리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역사의 짐은 사유의 매 과정 속에서 현재적이다.” 기존 철학들의 해결 방식은 주체의 의해, 즉 대립의 한 항인 인간의 편에서 객체의 다름[他者性, 異種性]을 지양, 제거하여 주체 자신의 것으로 동질화시키려는 시도로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조화調和는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주객으로 아직 나뉘지 않은 본래의 고장[本鄕]으로 들어섬이 없이 주객으로 쪼개져 흩어진 잔해를 가지고, 주체 중심으로 결합시키려는 노력은 이미 드러났듯이 ‘쓸모없는 정열’로 그친다.
그것은 전통 형이상학의 한계를 예리하게 제시한 칸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선천적으로 지닌 개념과 원리를 통해 모든 것을 현상으로 정립하는 선험적 자아와 그 선험적 자아가 닿지 않는 ‘물 자체’ 혹은 ‘있는 그대로’의 간극을 남김으로써 주객대립은 여전히 존속한다. 이러한 구별은 칸트 철학 안에서 극복될 수 없다. 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는 주객관계에서 작동하며 세계를 인식하고 통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전통적 ‘인지적 합리성’ 대신 새로운 이성을 외친다. 그는 상호 이해와 합의를 통한 공동의 의미 형성에 방향 잡힌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근대성의 문제를 이성이 아닌 다른 것에서 대안을 찾기보다는 이성 개념을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러는 한 그 역시 이성 중심주의적 사유태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문제는 이성을 개조하고 수선하는 게 아니라 이성 이전, 이성 너머에서 대립을 치유할 새로운 사유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다.
주객을 포함한 서로 다른 두 항의 진정한 화해와 일치는 대립항들을 감싸면서 본래대로 있게 하는 둘 사이 ‘사이’ 영역(Zwieschen)의 매개에서 가능하다. 그럼으로써 제1第一, 제2第二에 이은, 동시에 둘을 아우른 제3第三이기도 한 사이의 장은 또한 전체로서 하나이며 중심이고 전체이다[一=中=多(全)]. 중국 송나라 시절의 성리학자 주렴계周濂溪(1017-1073)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나오는 첫 문장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놓고, 특히 ‘이而’의 해석을 둘러싸고 해석이 엇갈린다. 한편에서는 무극과 태극의 동일성이, 다른 한편에서는 무극이 태극을 앞서는 것으로써 양자의 차이가 제기된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이’는 양자를 하나로 모으는 동시에 각각의 고유함으로 있도록 함으로써 차이를 견지하는 둘의 사이, 중심이고 전체[1=3/ 3=1]이다. ‘이’는 무극, 태극 이전이면서 둘 너머의 시원적 영역이다. ‘서로 뒤섞이지도 않지만 서로 떨어지지도 않음[不相離不相雜]’, ‘둘도 아니지만 하나도 아님[不二不一]’ 등 ‘상이한 것의 동시성’을 밝히는 여러 표현들은 앞의 ‘이’의 경우처럼, 둘의 ‘와’(und)이며 ‘사이’인 영역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상이한 것의 동시성’을 견디는 ‘사이’의 역할은 서로 다름[부정否定]을 지양하는[부정] ‘부정의 부정’이며 또 ‘동일성과 차이의 동일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러한 ‘사이’는 서양 철학에게는 모호하거나 비이성적인, 나아가 신비에 속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서구 지성의 이러한 태도는 주관과 객관을 구별하고 서로 다른 두 항 사이에 나눔과 속함의 조화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의 고유한 논리주의적 틀에서 기인한다. 동일률과 모순율에 꼭꼭 갇힌, 논리 중심적이고 이원론적 형이상학 체계는 “유럽인들이 인도, 중국, 일본의 오래된 전통들 속에 사유된 것을 들을 수 없도록 막아 왔다.”(Lin Ma, 「Heidegger’s (dis) engagement with asian languages」) 뿐만 아니라 서구 사유와 논리에 학습된 아시아인들조차 그들 자신의 전통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왜 어린이처럼 말해서는 안 되는가?’ 동서를 망라해서 서구 합리성의 세례를 받은 ‘어른’의 언어로써는 저 현묘한 영역을 표현할 수 없고 재단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이데거는 “이성을 사유의 적대자로 경험했을 때”(Holzwege) 새로운 사유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본래적 사유를 “숙고”(andenken; sinnen; nachdenken)라 부르며, 명상적 사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주요한 하이데거 해석가 중 한 사람인 푀겔러(Otto Pöggeler)는 하이데거가 분석적 사유에서 명상적 사유 방식으로 전환함으로써 서구 형이상학의 2천 년을 극복하려 했다고 밝힌다. 세계는 이제 [서구 형이상학의 극단인] 기술문명의 위험에서 이성의 대안을 영성에서 찾고 있다. 그간의 철학을 이끌어온 이성을 잠재우고, “형이상학보다 더 근원적으로 사유하는” 영성적, 명상적 사유가 대립과 분열을 치유하는 새로운 사유로 부상하고 있다.
기존의 이성적 사유와 구별되는 모든 영성적, 명상적 사유의 공통된 특징은 ‘사이’, ‘중심’의 장[一者]에 대한 자각이고 사유라는 데 있다. 하이데거의 『내맡김』(Gelassenheit)을 영문으로 공동 번역한(Discourse on Thinking) 앤더슨(John A. Anderson)은 소개글에서 ‘내맡김’의 사유를 명상적 사유라 부르며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명상적 사유는 일상적 이해의 대상들이 아니라 그것들이 존재하는 장(field), 지평(horizon)에 대한 자각과 함께 시작된다.” 또 피터 윌버거(Peter Wilberg)의 경우 하이데거가 『내맡김』에서 “새로운 사유의 본질을 ‘명상적(meditative) 사유’로 그리고 ‘이 명상적 사유를 결국 사유거리를 자각 내에서 생기生起하도록 허용하는 사유로’” 인정하고 있다며 같은 주장을 내놓는다. 그리고 이 점에서 하이데거를 인도 사유 자체의 빛 안에서 이해하는 시도의 필요성이 공감과 동의를 얻으며 실제로 여러 관점에서 비교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Peter Wilberg, 「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