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종말과 새로운 사유 2

2. 구원과 치유의 새 사유

시원적이자 새로운 장의 사유가 하이데거 존재 물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간략히 살펴보자. 하이데거에게 모든 것을 하나로 감싸는 존재[一者]의 본질(Wesen)은 밝게 트이며 우리 가까이(an) 머묾(wesen)[현존現存; Anwesen]이다. 현존의 존재는 밝게 트임의 동안이자 곳, 곧 시간-공간의 영역으로서 펼쳐진다. 모든 머묾에는 때와 마찬가지로 장소가 필요한 까닭이다. 하이데거에서 존재 자체는 비개념적인 것으로서 “일체의 개념적 이항대립을 넘어 그리고 그 사이에 일어나는 존재론적 지평-영역 이외 다른 것으로서는 이해될 수 없다.”(Xianglong Zhang,「Heidegger and Taoism on Humanism」) 이에 짝하여 인간의 고유함은 사유로써 저 존재가 난연爛然히[빛나는 것이 밝다; 눈부시게 아름답다] 열리는 장으로 들어서서 존재의 진리를 지키는 “존재의 이웃”이며 “존재의 목자”라는 데 있다. 이와 같이 존재는 인간을 향해 환히 트이며 인간은 그 밝은 존재 진리로 자신을 바침으로써, 둘은 시간으로 일어나고 공간으로 펼쳐지는 사이, 중심의 영역에서 함께 속한다. 또한 동시에 각기 저의 본질에 이른다. 즉 존재는 비로소 밝게 열리며 가까이 머물고 인간은 존재와 가까운 이웃, 존재를 지키는 목자로서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그리고 이때’ 모든 것들이 참답게 존재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 따름이다. 한 송이 장미는 누구를 위해 피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이론적, 실용적, 심미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장미는 ‘이유 없이’ 핀다. 존재를 그 자체로서 순수하게 맞이하는 사유는 모종의 셈법 속에 존재자에 인위적인 것을 덧붙이려는 일체의 의지를 내려놓고 단순 소박한 존재의 진리로 마음을 챙기며 그리로 내맡김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내맡김은 또한 아무 것도 함이 없이 존재로 하여금 비은폐로 현성現成하도록 하는 ‘기다림’과 같다.

하이데거보다 오래되고 또 그와의 비교 가능성을 묻게 하는 인도의 영성적 사유는 존재를 ‘순수 자각의 장’ 또는 ‘보편적 의식’으로서 제시한다. 이 자각의 장은 빛(Prakasha)으로서 시원적 영역 혹은 공간(Kha)을 채우며 신성(Shiva/Bragman)의 본질을 구성한다. 이에 맞갖은 인간의 응대는 모든 개념화의 의지를 버리고 고요히 마음을 그리로 집중하는 일이다. 하이데거와 인도 사유의 비교를 가장 먼저 시도했던 카푸토(Caputo, John D.)는 선불교,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하이데거 사이의 공명共鳴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선禪에서 자아는 전적으로 에고와 의지가 없어질 때 ‘사토리(さとり)’에 든다. 하이데거에서는 현존재[인간]가 존재의 진리, 즉 발현에 들어선다. 그리하여 현존재는 진리의 발현을 위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밝게 트임이 열리는 과정과 관련을 맺으면서 ‘사토리’, 즉 깨달음의 상태에 이른다. 영혼이 가장 내적인 기반(Seelengrund; Eckhart)으로 들어가고 선에서 자아가 불성佛性, 혹은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존재는 그러한 ‘사건’ 안에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가장 고유한 본질에 들어선다.”(John D. Caputo, The Mystical Element in Heidegger’s Thought)

 

순수 자각의 장 자체와 합일을 목표로 하는 인도의 명상 수행에서 최고의 주문은 ‘케차리(Khechar) 무드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케(카)’는 ‘하늘, 공간’이며 ‘차리’는 ‘움직이다’로서 케차리는 문자적으로 하늘을 날고 있는 상태(moving in the void)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공간 속 움직임’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케’는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이나 물리적 의미에서 그것이 아니며 단순히 텅 빈 공간이 아니다. 앞에 언급했듯 빛으로 가득한 시원적 영역인 순수 자각의 장이다. 그래서 케차리의 보다 내밀한 의미는 “궁극의 비-지역적 자각의 장 안에서 움직임이며 그 장의 자기 영역화이다.”(Peter Wilberg,「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

인도의 영성적 지혜는 인간이 명상적 사유로써 저 순수 자각의 장에 동화同化되는 것이 참나라고 가르친다. [아마도 『환단고기』란 사서史書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삼성기三聖紀』에 나오는 ‘승유지기乘遊至氣’(하늘, 허공으로도 불리는 지극한 기운을 타고 노심)란 말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이런 이해 위에서 Peter Wilberg는 하이데거에서 “영역화는 것으로의 내맡김은 케차리 무드라의 알려지지 않은 해석”(Peter Wilberg,「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이라고까지 평가한다.

다시 말해 사유와 존재, 특히 자아(Atman 혹은 제약된 영혼)와 보편적 의식인 빛(브라만 또는 시바로 불리는 자각의 장)의 본질적 동일성이 진정한 나 혹은 완성된 인간이다. ‘I AM THAT.’ 그리고 이렇게 ‘절대자에 먹혀 절대자와 하나가 되는’ 깨달음에서 자유와 안식, 지복을 얻고 고유함에 든다.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不死의 인간이 된다. 이때 불사나 무한은 “이 자아에 대해 죽음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정은해 「하이데거 사상과 동아시아 전통의 비교 연구」)는 의미이다.

후설, 특히 하이데거와 불교 사상의 비교를 선구적으로 시도한 고형곤高亨坤 교수(1906-2004)는 『선의 세계』에서 불교의 정수를 적조寂照라고 밝힌다. ‘적寂’은 고요함이고 ‘조照’는 비침이다. 그런데 적과 조는 하나도 아니지만 다른 둘도 아니다[非照非寂, 寂照不二]. 풀이하면 적寂은 고요해 아무 것도 생기生起하는 것이 없으나 ‘여기서 그리고 이때’ 밝은 빛이 현성한다. 분별과 번뇌의 망상을 일시에 내려놓으면 대상[객체]과 의식 일체[주체]가 사라지고 중지되는 고요함[寂] 속에 뚜렷하고 분명하게 열리는 빛의 트임이 불교가 이해한 존재의 본질이라는 설명이다. 고요함 가운데 환히 빛나며 두루 비치는 빛[照明]이 ‘진여眞如’[있는 그대로]이며 ‘반야般若’[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라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 밝은 빛[寂照現前]은 원래부터 스스로 있던 것이 실체가 없는 허깨비인 여러 형태 속에 은닉되었다가, 나고 죽음의 환영幻影이 걷힌 뒤에 전면에 드러난다. ‘동이 트다’는 말이 밝은 해가 나는 때이며 장소를 가리키듯 고요한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빛의 개화는 밝게 트이는 시공간의 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임에 분명하겠다. 그리고 우리는 적조의 장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꽂음으로써, 다시 말해 그 장에 고요히 물듦으로써 자신의 본성이기도 한 불성佛性을 구하는 길에 오를 수 있다.

은폐로부터 장차 도래할 새로운 사유가 될 명상적, 영성적 사유의 기원은 동아시아에서 찾는 게 온당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좁혀 대한민국을 지목해야 할 것이다. ‘형이상학 이전의 또 형이상학 넘어’의 영성적 사유가 갖는 특성은 한국 전통 문화와 사상의 고유성으로 밝혀진 것들이다. 분리 대신 조화의 사유 혹은 ‘3=1’의 사유; 우리말 ‘사이’, ‘가운데’, ‘판’, ‘마당’ 등에 간직된 시간과 공간의 동근원성; 장의 자각; 일체를 파악과 이용의 대상으로만 삼는 계산적 사유를 일찌감치 비우고 마음을 모아 진리의 장[神; 氣]과 일체를 이루는 사유 등 말이다.

한국의 고유한 경전인 「천부경」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이라 하여 우주의 근본인 일자는 유나 무로 확정할 수 없는 하늘, 땅의 신령한 기운이며 빛으로서 모습을 나타낸다고 한다. 또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라 하여 일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중심의 영역[中]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울리며 비로서 저의 참됨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런 인간이 빛의 인간이고 큰 하나[太一]며 완성된 인간이다. 이밖에도 한국의 유구한 역사 문헌으로서 「천부경」을 싣고 있기도 한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에 “소험유시 소경유공 인재기간所驗有時, 所境有空, 人在其間.”이란 말이 나온다. 앞에 나온 ‘험驗’과 ‘경境’, 즉 ‘실제로 드러난 바의 지경’은 글의 문맥상 감각적이거나 체험적인 것이 아니라 내 본성을 찾아 우주적 생명과 일체를 이루는 ‘깨달음’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소험유시 소험유공’은 깨달음이란 시간[時]이자 공간[空]인 장[間]으로부터 일어남이며, ‘인재기간’은 인간 본질[人]은 저 깨달음이 일어나는 ‘동안이며 폭인’ 영역에[間]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 역사만큼 오래된 말 ‘한’이란 단어가 스스로를 펼쳐가는 역사와 길에서 형성한 의미는 영성적 사유의 유래를 눈짓한다. ‘한’은 ‘크다’, ‘밝다’, ‘통일하다’, ‘일체이다’, ‘처음이다’, ‘온전하다’. ‘신’, ‘중심’, ‘희다’, ‘혹[불확정성]’, ‘완성된 인간’ 등을 의미한다. 이렇게 ‘조화’, ‘밝음’, ‘신성’, ‘깨달음의 인간’ 등 영성 사유의 키워드를 한 마디로 품고 있는 ‘한’은 대한민국의 ‘한’이고 한류의 ‘한’이다. 존재의 난연한 빛 아래 평화와 공존이 넘치고 모두가 참되게 존재할 세상 또한 빛의 나라며 한의 세상일 터이다. 이는 인류의 ‘또 다른 시원’을 열 새로운 사유가 길어 나올 창조적 샘은 한국에서 발견되리라는 희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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