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무 그리고 그 사이의 ‘와’ 1

1. 무는 존재의 베일

 

“무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함이며,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그 충만함은 이름 지을 수 없다.”

“그것이 내가 평생 동안 말해왔던 것이다.”

 

 1964년 하이데거는 태국에서 온 마하 마니(B. Maha Mani)란 스님과 TV 대담을 가진 적이 있는데, 앞의 말은 문맥을 고려해 설명을 보탠 태국 승려의 말이고 뒤의 말은 하이데거의 대답이다. 이 짧은 문답은 적어도 두 대화자가 무를 존재자 전체의 부정否定이나 존재에 선행하는 모종의 절대적 상태로 여기지 않고 존재와 결속하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동양에서는 무가 철학의 주제로서 진지하게 논의된 반면 서양에서는 하이데거의 무 개념이 제시되기 이전에는 철학 담론에서 비켜 서있었다. 그들에게 무란 논리가 닿지 않는 비이성적이며 심지어 불길하기까지 한 것이다. 물론 헤겔이 하이데거에 앞서 “순수 존재는 순수 무와 같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존재와 무는 무엇이라고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없고 둘 사이에 매개가 없는 무규정성과 직접성에서 일치한다는 논리적 동일성을 밝혔을 뿐이다. 이런 사정 속에서 하이데거가 존재와 무는 하나로 함께 속한다고 애기했을 때 서구 지성은 그의 주장을 무의미한 것으로, 기껏 허무주의의 문맥으로 이해했을 뿐이다. 아마도 이런 식의 부정적 반응 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는 하이데거의 무에 대한 사유를 “무의미한 담론의 극단적 경우”라고 밝힌 카르납의 비판이겠다.

하이데거는 1929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가진 강연인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같은 해 출간하는데 거의 유일하게 이곳에서 무를 다룬다. 그런데 당시 일본 학자들이 책에 대해 보인 반응이 흥미롭다. “우리 일본인들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접하게 됐을 때 즉시 그것을 이해했다. 당신이 말하는 무를 유럽인들이 허무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우愚를 범할 때 놀라웠다. 우리에게 공空은 당신이 ‘존재’로써 의미하는 것을 가리키는 최상의 말이다.”(David Storey, 「Zen in Heidegger’s Way」)

불교 및 인도 철학자인 Zhihua Yao는 지금까지 동서 사유에서 다뤄진 무 개념을 다음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Zhihua Yao, 「Typology of Nothing: Heidegger, Daoism and Buddhism」) 1) 일반적으로 부재不在로 알려진 결여적缺如的 무 2) 부정적인 무 혹은 총체적 무 3) 본래적 무, 즉 존재와 존재론적으로 등가等價인 무. 그는 이러한 자신의 구분은 Pang[庞朴]이 중국 철학의 풍부한 문헌들에서 논의된 무 개념을 ‘부재로서의 무’, ‘절대적 무’, ‘존재로서의 무’의 세 가지로 나눈 것과 상통한다고 밝힌다. 또 Pang에 따르면 무를 표기하는 각기 다른 글자인 ‘wang’(亡)과 ‘wu’(无) 그리고 ‘wu’(無)가 차례대로 세 가지 종류의 무를 의미한다고 한다.

1)의 무는 예컨대 ‘그림자’, ‘차가움’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결핍의 그것이다. 그림자는 빛의 결여이고 차가움은 따뜻함의 부재不在이다.

2)의 무는 ‘논리적 불가능성’을 말한다. 예컨대 ‘불임不妊인 여자의 아들’, ‘둥근 사각형’ 등.

마지막으로 3)의 무는 텅 비어있지만 동시에 존재 분만分娩의 가능성으로써 가득 차있다. 존재로서의 무이다. 동아시아의 도교나 선불교에서 지배적인 이러한 무 이해에서는 무나 공이 단순히 부정적인 게 아니다. 오히려 공간을 공간으로서 열어 일체의 사물들로 하여금 제각기 제자리에 있도록 하는 존재 충만한 하나(一者; hen)이다. 현묘한 유[妙有]인 텅빔[眞空]이며 텅 빈 현묘한 유이다. 이런 묘한 이치 혹은 역설은 다음의 말로써 훨씬 더 쉽게 풀이될 수 있다. “‘뷔’(無, 空)는 사물을 잉태하는 붸(胎)의 상태이기 때문에 뷔는 비롯함(始)인 것이다.”(김상일, 『한철학』) 글머리에 등장한 대화나 교수 취임사에 나타난 하이데거의 무 이해는 세 번째 유형의 무에 속해야 할 것이다.

 

“무는 하나의 대상도 아니고 도대체 어떤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무는 존재자에 대한 반대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존재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 존재자의 존재에 무의 무화無化가 일어난다.”(Wegmarken)

“존재와 무는 함께 속한다.”(Wegmarken)

 

따로 설명이 요구되는 말들이지만, 하이데거가 존재와 무를 함께 속하는 것으로 또는 등가적等價的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뚜렷이 나타나 있다. 나아가 이 공속성은 둘 사이의 ‘사이’를 이루는 존재 자체의 영역으로부터 성립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이데거의 「언어에 관한 대화로부터: 어느 일본인과 어느 질문자 사이」(1953/1954)(『언어로의 도상에서』)에서 ‘어느 일본인’이었던 독문학자이자 철학자인 데즈카 토미오(Tezuka Tomio)는 그때 일을 얘기하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떠올린다. “일본어 ‘ku’(空)[산스크리트어로는 ‘순야타’]에 대한 가능한 번역으로 ‘개방성’을 언급했을 때 … 하이데거는 정말로 기뻐했다. 그는 동과 서는 깊은 차원에서 대화에 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David Storey, 「Zen in Heidegger’s Way」) 하이데거는 그 자신이 무를 이해하듯 공을 열린 장으로 옮길 수 있다는 말에 크게 고무된 것 같다.

일본의 선사禪師(Zen master)이고 교토학파의 철학자인 히시마쓰(Hishimatsu Shinichi)가 1958년 하이데거와 사이에 진행된 ‘예술에 대한 대화’에서 밝힌 말도 같은 맥락의 지적이다. “서구에서 원천은 하나의 존재자이다. 모종의 형태를 갖는 어떤 것이다. 선불교에서 원천은 형태가 없는 어떤 것, 존재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아님’은 순수한 부정이 아니다. 이때의 무는 모든 형태의 규정에서 벗어나 있고 전적으로 형상이 없는 것으로서 늘 모든 곳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Cezary Wozniak, 「Heidegger and Buddism」) 하이데거는 이에 공감하면서 무의 영역성을 확인한다. “이 공空(emptness)은 부정적인 무無(nothingness)가 아니다. 우리가 공을 공간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이 공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불러 모으는 공간이라고 말해야 한다.”(Cezary Wozniak, 「Heidegger and Buddism」)

그렇다면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와 무 사이의 ‘사이’ 영역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에게서 존재는 본질적으로 은폐와 어둠, 즉 비진리로부터 비은폐와 밝음의 진리로 자신을 펼치는 일어남, 사건[aletheia]이다. 하이데거가 “존재가 무엇인지 보다는 존재가 하는 것[즉, 밝게 트임의 영역화]을 가리키는 용어를 사용”(Kreeft, Peter. 「Zen in Heidegger’s Gelassenheit」)하는,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형이상학의 존재 망각은 한 존재자를 그 존재에서 물으면서 존재의 본질을 명사적[무엇임Whatness]으로 규정하는 데 골몰한 채, 영역으로 트이며 생동하는 동사적 사태를 외면한 데 있다.

이에 따라, 하이데거에서 존재와 상반되는 무는 존재 진리의 숨김과 감춤을 의미하게 된다. 하이데거에서 무와 존재는 곧 감춤과 밝힘, 은닉과 발현發現의 문제가 된다. 때문에 무와 존재는 마치 산과 골짜기처럼 따로 떨어진 것일 수 없다. 존재는 은닉으로부터 비은폐로 환히 트임인 한, 언제든 다시 은닉과 부재不在로 달아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은닉은 발현의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존재 발현은 은닉으로부터 솟아난다. 은현동시隱現同時, 은닉과 비은폐, 무와 존재는 동시적이며 함께 속한다.

이로써 존재와 무의 사이를 이루면서 둘을 동시에 붙잡고 있는 것은 밝게 트이며 영역화하는 존재 진리, 그 비은폐성의 열린 영역 자체로서 밝혀진다. “존재자의 존재에 무의 무화無化가 일어난다.” 존재 자체가 어둠과 숨김[무]에서 스스로 환히 트이며 개방된 지평을 여는 것이다. 하이데거에서 존재 그 자체는 “일체의 개념적 이항대립을 넘어 그리고 그 사이에 일어나는 존재론적 지평-영역 이외 다른 것으로서는 이해될 수 없다.”(Xianglong Zhang, 「Heidegger and Taoism on Humanism」) 그리고 존재가 난연하게 열어 밝혀지고, 그럼으로써 존재와 무의 공속성이 일어나는 영역은 단순히 공간이 아니라 시공간으로서의 시간이다. 다시 말해 존재의 진리는 시간으로 일어나고 공간으로 펼쳐지는 시공간의 장으로부터 또 그리로 어둠의 무를 털어내며 밝게 현성한다. 지금까지 ‘사유된 것’은 이제 시간의 문제를 ‘사유되어야 할 과제로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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