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25대 왕인 충렬왕(재위 1274~1308) 시대에 국존國尊을 지낸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1289)이 1280년 무렵에 편찬한 『삼국유사』에는 고대 사회의 역사, 종교(불교)와 함께 문학, 예술, 풍속, 언어 등과 같은 다양한 사상事象들이 기록되어 있다. ‘유사遺事’의 사전적 의미는 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사적事跡을 가리킨다. 『삼국유사』에는 고려 전기의 문신 김부식金富軾(1075~1151)이 1145년(인종 23)에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내용, 이른바 유사들이 편찬자의 불교적 체험과 함께 다양한 풍경으로 기록되어 있다.
흔히 『삼국유사』를 『삼국사기』와 비교한다. 극명한 차이는 『삼국사기』가 왕명에 의해 편찬된 삼국시대의 역사서라면,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이 편찬한 사찬私撰이라는 점이다. 『삼국유사』가 그만큼 자유롭게 편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김부식이 유학자로서 유교적 합리주의와 인본주의에 따라 공자가 주창한 술이부작述而不 作의 태도를 보인 데 반해 일연은 불교적 초월주의 내지는 신화적, 종교적 세계관에 의해 세속계와 신성계가 접합한 사건을 중시했다는 점을 차이로 들기도 한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지적이지만, 다른 문제도 지적할 수 있다.
일연이 역임한 ‘국존’은 고려시대의 원간섭기에 승려에게 내린 관직 가운데 하나이다. 국사國師의 다른 명칭이다. 고려는 물론 신라 시대부터 고승을 임금의 스승으로 책봉한 제도였다. 즉, 신라·고려시대에 있었던 승려의 최고 법계였다. 왕의 스승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다는 것은, 개인의 학문적 취향도 없지 않았겠지만, 과연 ‘사찬’의 자유로움에만 한정될 수 있었을지, 어떤 다른 깊은 의도가 없지 않았을까,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이 경우 토착적이고 무속문화적 신이담神異譚의 가치를 인정하는 한편 『삼국사기』에서 빠진 상고 역사 기록을 『삼국유사』 권1, 2의 「기이紀異」편에 집대성한 풍경에서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를 어떻게 읽을까
『삼국유사』는 편찬자를 비롯하여 내용과 체제 및 문헌적 성격을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는 불가능하다. 이 경우 『삼국유사』는, 좀 거칠게 정의를 내리면 하나의 텍스트다. 여기서 ‘텍스트’는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해체주의 비평 전통에서 주장하는 의미이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작품에서 텍스트로」라는 논문에서 작품(work)과 텍스트(text)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바르트는 총 일곱 개 항에 걸쳐 텍스트의 본질을 규정짓는다. 그중에 몇 가지만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텍스트는 모든 장르와 관습적인 위계질서를 넘는다. 즉, 합리성과 읽을 만한 형태가 취하는 제한과 규칙들에 대항한다. 2. 텍스트는 중심을 정하거나 종결될 수 없는, 철저히 파괴적인 기표들의 자유로운 놀이를 통해 기의를 무한히 연기시킨다. 3. 텍스트는 이름도 없고 추적할 수도 없는 상호 텍스트적 인용과 지시, 반향음, 문화적 언어들로 이뤄진다. 즉, 피할 수 없이 수많은 의미를 산출하며 진리가 아닌 산종(散種)을 낳는다. 4. 텍스트는 협동의 장에서 독자에 의해 탄생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텍스트는 단일한 의미가 오고 가는 매개체가 아니라 다양한 해석의 유희가 펼쳐지는 장으로 규정된다. 『삼국유사』는 이 텍스트로서의 읽기에 충분히 부응한다. 독자들(이 경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삼국유사』를 역사서, 불교서, 설화집, 민족지로 규정하고 연구하거나, 향가나 이두 연구의 자료집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독자들이 각자 처해 있는 입장에 따른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
『삼국유사』 읽기의 흐름을 좀 더 추적하면 일찍이 최남선 이른바 순암수택본順庵手澤本(1512,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 임신년 간행)과 조선광문회본(조선 초기 간행)을 교감하여 『계명』(제18호, 계명구락부, 1927.3)에 소개한 이래, 『삼국유사』는 국사학· 불교학· 신화학· 국문학· 국어학· 고고학 등 여러 분야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삼거나 자료집으로 활용하였다. 각자 전공하는 학문 분야를 가지고 『삼국유사』를 천착하여 연구한 학자들은 이 저술의 다층성과 복합성 앞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삼국유사』는 “신화학· 국문학· 민속학· 불교학 내지 역사학의 성전”이라든지 “『삼국유사』는 역사·문학· 철학· 종교· 민속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취급할 수 있는 광범위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힘으로 전모를 밝히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든지, “『삼국유사』는 사찬으로 문헌자료를 비롯하여 금석문, 고문서, 민간설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수록했다는 점에서 한국 고대의 문화 전반을 폭넓게 담고 있는 민족지라 할 수 있으며, 역사서이며 문학서이고, 종교사이며 문화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라든지, 하는 지적들이 저간의 사정을 반영하는 목소리들이다.
『삼국유사』, 종합적 검토가 필요하다
학계에서 『삼국유사』 읽기에 대한 선행연구의 반성과 극복에 대한 목소리들이 울려 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삼국유사』 이해는 궁극적으로 전체상이 구명되어야 온전해질 수 있다. 이런 인식 위에 개인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 연구가 모색되었다. 첫 번째 움직임은 1973년에 진단학회에서 한국고전연구 심포지움의 첫 번째 주제로 『삼국유사』의 종합적 검토」를 채택하여 종합적 연구의 단초를 마련했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학술발표회가 개최되었고 다양한 분야에서 심도 있는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1980년 경주시 신라문화선양회에서 ‘『삼국유사』의 신연구’를 주제로 개최한 제1회 학술발표회, 1986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삼국유사』의 종합적 검토’ 주제로 연 제4회 국제 학술회의, 같은 해 경주시 신라문화선양회에서 ‘『삼국유사』의 현장적 연구’라는 주제로 연 제11회 학술회의 등이 이 노력의 일환들이다. 이밖에도 여러 곳에서 『삼국유사』 자료집 발간도 이어졌다.
여기서는 1997년 한국학술진흥재단 인문· 사회과학분야 지원에 의한 결과물로서 ‘『삼국유사』의 종합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3차에 걸쳐 발표된 논문에 주로 의지하여 『삼국유사』를 검토한다. 이 기획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특히 제1차에서 편찬자의 생애와 사상, 편찬 배경과 과정, 내용과 체제, 기술태도와 서술원리, 사체와 사관에 대해 재검토하였다. 작자 일연의 체험과 정신과 시대적 배경이 『삼국유사』의 편찬 과정에서 어떤 양상으로 형식과 내용에 작용하고 용해되었는지 그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구명하고, 나아가선 우리의 기본적인 관점과 시각을 정립시킨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삼국유사』의 작자 일연은 누구인가
『삼국유사』 편찬자 일연이 활동했던 13세기 고려 후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대내적으로는 무신란이 일어나 100년간 전횡을 일삼았던 무신정권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여진·거란· 몽골의 잇다른 침입으로 나라는 혼란에 휩싸였고 민심은 피폐해졌다. 따라서 일연이 활동한 시기는 무신 정권기와 대몽항쟁기를 거쳐 원지배기로 이어지는 대내·외적으로 격동과 혼돈, 암흑의 소용돌이 시기였다.
일연은 무신정권 시대의 한복판인 고려 희종 2년(1206), 경주 장산군(현 경북 경산군)에서 출생하였다. 이름은 견명見明이었다. 뒤에 일연으로 바꾸었다. 자는 회연 晦然, 호는 목암睦庵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였고 예절을 잘 지켰다. 아홉 살 때(1214) 해양海陽의 무량사無量寺로 들어가 공부하였다. ‘해양’은 지금의 광주로 알려졌으나 경북 영해 또는 영일이라는 견해도 있다. 14살 때 설악산 아래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였다. 대웅장로大雄長老 문하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출발은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加持山門 권속이었으나 이후 여러 선문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1227년 승과의 최고 시험인 선불장選佛場에서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다. 그는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후 비슬산 보당암寶鐘庵에서 정진하였다.
나라는 몽고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웠다. 1232년 4월 대몽항쟁 중 부인사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다. 강화도로 천도한 조정에서는 1236년 강화도 선원사에 대장도감을 설치하였다. 1236년 나라에서는 일연에게 삼중대사의 승계僧階를 내렸고, 1246년에는 선사禪師를 제수했다. 1249년에 일연은 남해의 정림사定林社로 옮겨 경판조조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 작업에 참여하여 3년만인 1251년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1259년에는 대선사의 승계를 제수받았다. 1261년에 원종의 청을 받아 강화도의 선월사禪月寺에 주석하였으나 3년 뒤에
경북 영일 운제산雲梯山의 오어사吾魚寺로 옮겼다가 다시 비슬산 인홍사仁私寺로 옮겨 후학을 지도하였다. 1277년 칙명에 따라 청도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학계에서는 이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을 만났고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경주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듬 해 왕명에 의해서 개경으로 가서 광명사廣明寺에 주석하였다. 1283년 국존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仲照라는 호를 받았고,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摳衣禮(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 뒤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284년에 타계하자, 경북 군위군 화산의 인각사麟角寺로 옮겨 주석하였다. 5년 뒤인 1289년 나이 84세, 법랍 71세로 입적했다. 시호는 보각普覺, 탑호塔號는 정조靜照였다. 제자로는 혼구混丘와 죽허竹虛가 있다. 주요 저작으로 『화록話錄』 2권, 『게송잡저偈頌雜著』 3권,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 『조파도祖派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그리고 『삼국유사』 5권 등이 있다.
『삼국유사』, 어떻게 구성되었나
『삼국유사』는 ‘유사遺事’라는 제목이 나타내듯 유문일사遺聞逸事를 모아서 편집한 서책이다. 따라서 정연한 체재 아래 짜여졌다고 볼 수가 없으니 완전하게 틀을 갖춘 역사서라고 할 수 없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불교의 문화사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삼국유사』는 역사서로서 그 나름의 체재와 성격을 뚜렷하게 가졌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삼국유사』의 전체 구성은 5권 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에서 제1 「왕력王歷」과 「기이紀異」를, 권2에서 제2 「기이紀異」로 배치하였다. 권2에는 편목의 이름이 없다. 『삼국유사』를 5권으로 나누어 보기보다는 9개의 편목으로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읽기에도 편다. 권과 함께 편목을 살펴보자. 권3은 제3 「흥법興法」, 제4 「탑상塔像」, 권4는 제5 「의해義解」, 그리고 권5는 제6 「신주神呪」, 제7 「감통感通」, 제8 「피은避隱」, 제9 「효선孝善」이 배치되어 있다. 제1 「왕력」편에서 특이한 『삼국유사』라는 제목과 달리 고려 태조의 통일에 이르는 부분까지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력」의 윗 부분과 끝 부분에 중국의 역대 왕조와 연호를 드러내고 시대별로 대응시켜 중국과 나란히 가는 작자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작자 일연의 역사인식과 불교문화사의 확대 해석, 그리고 민족문화의 정통성을 정립하려는 그의 의지와 열망이 전편에 녹아 흐르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고대 역사서이다
『삼국유사』 권2, 제2 「기이」편에서는 고조선에서 신라의 통일 전인 태종무열왕까지 36항목으로 기술하였다. 권2에서는 문호왕 법민法敏에서 「가락국기』를 포함한 23항목, 모두 59항목을 수록하였다. 이른바 역사에 해당하는 항목인데, 권3에서 권5에 이르는 분량과 거의 맞먹을 정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했다. 내용도 그렇지만, 분량면에서도 『삼국유사』가 역사서로서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결과물이다.
특히 「기이」편과 「왕력」편을 보면, 중국의 역사적인 사료를 가지고 비유 서술함으로써 실증적인 체재로 하였다. 그런데 ‘조선’이란 나라의 이름을 처음으로 쓰면서도 발해潮海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소홀하다. 뿐만 아니다 국호를 고구려 지향적으로 ‘고려高麗’라고 하면서도 발해를 적극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당시의 시대성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거란과 몽골의 침략이라는 시대의 분위기가 작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군왕검의 고조선을 출발점으로 하여 국통을 세우고 거기서부터 우리 역사의 가닥을 잡은 일은 『삼국유사』가 민족사서로서 기념비적인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제3 「흥법」편에서 제9 「효선」편에 이르는 내용은 모두가 불교문화에 관한 내용들이다. 『삼국유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류하고 있는 것은 민족 자주의 자존 및 고유신앙과 불교, 특히 밀교적 신비주의에 바탕한 삶에 대한 희망과 어떤 강력한 힘이다.
『삼국유사』, 어떻게 쓰여졌나
『삼국유사』는 다양한 성격의 사료들을 선별하여 인용하였다. 사료를 인용할 때는 그에 대해 편찬자의 의견을 덧붙이는 기술태도를 시종 유지했다.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을 엄격하게 구분한 것이다. 인용한 문헌의 경우 그 출처도 분명하게 밝혔다. 금석문도 가끔 인용했는데 편찬자가 대체로 직접 답사하여 조사한 자료들이다.
『삼국유사』의 전반부에서는 신이한 소재들을 적극 활용하며 역사를 기술했다. 특히 「기이」편에서 그러했다. 작자는 이런 기술태도를 처음부터 드러냈다. 「기이」편의 서문에서 기이하거나 신이한 것을 적극 수용할 것임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사찬 글쓰기의 자유로움도 작용하였겠으나 어떤 의도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침략자들의 간섭을 피하면서도 삼국의 시조가 중국의 시조와 다를 바 없다는, 우리의 역사가 중국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는 주체성의 발로가 그것이다. 이러한 편찬 동기를 바탕으로 하여 「기이」편은 고조선의 단군 일화부터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건국 일화를 전재했다. 물론 그 사이 사이에 현실적, 역사적인 이야기를 실었다. 이처럼 고대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 신이한 소재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역사가 중국의 그것 못지않게 유구할 뿐만 아니라 찬란함을 보여주었다.
『삼국유사』는 시대적 산물이지만, 또 작자 일연의 경험의 산물이다. 이 두 가지가 잘 어우러져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이 불국토사상이다. 우리나라가 아득한 과거세로부터 무한한 미래세에 이르기까지 불타의 정법과 가장 깊은 인연을 맺어온 땅이라는 의식이었다. 이것은 소박한 민족주의와 불교사상의 융합에서 우러난 국토의 신성화였다. 작자는 불국토사상을 수용하여 민족의 부흥을 의도했던 것이다. 즉, 불국토 사상이 통일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삼국유사』의 종합적 연구’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 몽골에 대한 뿌리깊은 복수심과 현실적으로 결코 그 복수심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무력감 사이에서 갈등을 느껴야 했던 당대인의 소극적인 피해의식을 집약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결론적으로 『삼국유사』는 민족 국가를 중시했고, 국왕의 권위를 높이는 지향을 관철시키기 위해 독특한 기술방식과 서술원리를 활용하였다. 그것은 『삼국유사』의 작자 일연을 비롯한 고려 사람들이 처했던 고려 후기의 민족사적 현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삼국유사』는 역사 기술을 통해 민족 국가의 자존과 왕실의 권위를 확립함으로써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관념적이고 정신적으로나마 민족을 지키려 했던, 참 안타까우면서도 기념비적인 기록물이다. 또한 작자 일연의 불교 사상과 경험 그리고 토착신앙과 문화를 통합적으로 기록한 아름다운 ‘불교 보감寶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