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운 스키타이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국립박물관 입구 황금인간 기마인물상

 

현재 유라시아 초원 지대에서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역사의 주류에서 밀려나 러시아나 중국 같은 나라의 소수 집단으로서 또는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민으로서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살펴보면 유목민들이 초원지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루어 주변의 농경정착민들의 국가를 공격하고 정복한 이야기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동서양의 큰 나라들도 그런 유목민의 공세를 피하지 못하였다. 유목민들의 움직임이 역사의 일대 전환점을 가져온 경우도 드물지 않다.

서양의 경우 서로마제국은 훈족에 밀려난 게르만족의 이동과 그 여파로 인해 멸망하였으며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 제국은 그로부터 천년 뒤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서양의 고대가 막을 내리고 중세가 시작되었으며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 서양의 근대의 여명이 열렸다.

동양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 중국의 진나라와 한나라는 유목민 집단인 흉노의 공격에 시달렸으며 한나라는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기까지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흉노와 또 다른 유목민 집단인 선비족은 소위 오호십육국 시대(304-439)에 양쯔 강 북의 중국 땅에 자신들의 여러 나라를 세우고 한족을 지배하였다. 송나라 때의 거란도 중국 북부를 지배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등장한 몽골은 13세기에는 아예 중국 전역을 지배하였다. 몽골은 중앙아시아를 넘어 동유럽까지 진출하여 러시아를 두 세기 반 동안 지배하였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기마유목민들이 정착 농경사회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대략 BCE 8~7세기 경이었다. 이 시기부터 흑해 북부 초원지대로부터 중동 지역에 진출한 킴메르족과 스키타이족, 중국 주나라를 공격한 여러 이름의 융족 집단이 기록에 등장한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역사가들이 스키타이에 대한 상당히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리스인들은 일찌감치 흑해 북안과 크림반도 해안 지역에 여러 식민 도시들을 세웠는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BCE 484-425)는 이 지역으로 직접 답사여행을 갔다. 그는 이 지역의 그리스인들을 통해 스키타이인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오늘날의 남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으로부터 밀과 생선, 꿀 등을 수입하고 포도주, 올리브유, 수공업품 등을 수출하였다. 상품교역이 두 민족 간의 접촉을 촉진하였는데 스키타이인들은 그리스 문화로부터 상당히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스키타이인 고분에서는 그리스에서 만든 부장품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페르시아 제국 사이의 전쟁 즉 ‘페르시아 전쟁’을 줄거리로 하여 서술된 책인데 전쟁사만 서술한 것은 아니고 그 전쟁에 관련된 많은 족속들의 역사와 풍습 등 민족지적 서술을 많이 담고 있다. 이 책의 제4권은 스키타이에 관한 서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재위 BCE 522-486)은 군대를 직접 이끌고 스키타이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시도하였다. 원정의 구실은 스키타이가 메디아 지방을 침략하여 저항하는 자들을 무찔렀기 때문에 그들의 도발을 응징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였다. 그는 스키타이 원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정을 감행하였다. 서쪽으로는 에게 해의 그리스 도시들로부터,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서북부까지 엄청난 영토를 다스린 ‘왕중의 왕’이었던 다리우스가 자신의 영토를 침범한 스키타이인들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키타이인들은 아마도 남러시아 초원지대로부터 카프카즈 산지의 협곡을 건너 메디아 지역으로 쳐들어왔을 것이다. 다리우스는 이 통로로 가는 대신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들어가 이스트로스 강(다뉴브 강)을 도하한 후 흑해 연안을 따라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가는 방안을 택했다. 무려 70만 명의 병력을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다리우스 군대는 스키타이를 정복할 수 없었다. 스키타이 기마부대는 페르시아 군대와 정면대결을 피하고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초지와 우물을 파괴하며 적을 초원 깊숙이 유인하였다. 페르시아 군대는 도시와 인가가 없는 광활한 초원에서 식량과 식수를 확보하는 것이 어려웠다. 보급선과 퇴각로에 대한 걱정 때문에 다리우스 대왕은 군대를 결국 철수하게 되었다.

헤로도토스는 누구도 스키타이인들을 추격해서 잡을 수 없으며 반대로 스키타이인들이 작정하면 누구도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즉 기마유목민으로서 스키타이의 탁월한 군사적 강점을 칭찬하고 있다. 그리고 “스키타이인들은 도시도 성벽도 없고 집을 수레에 싣고 다니고, 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들의 여러 가지 관습을 소개한다. 제사에는 말과 소, 양, 염소 등을 사용하지만 돼지는 제물로 사용하지 않으며 사육도 하지 않는다. 돼지를 키우지 않는 것은 다른 유목민도 마찬가지인데 돼지는 유목 활동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키타이인들은 전쟁에서 맨 처음 죽인 자의 피를 마시며 죽인 적의 머리는 모두 왕에게 갖다 바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전리품 분배에 참여할 수 없다. 죽인 적의 머리 가죽을 벗겨 손수건이나 옷, 안장깔개 등으로 이용하기도 하며 두개골을 잘라 소가죽이나 금을 입혀 술잔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스키타이인들이 용맹을 과시하는 방법인데 흉노와 투르크 등 후대의 다른 유목민들에게서도 더러 찾아볼 수 있는 관습이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스키타이에는 예언자들이 많다고 한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점을 치는 점쟁이다. 이들은 버드나무 막대기를 이용하여 점을 치는데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하여 점을 치거나 굿을 하는 것은 동북아시아 샤머니즘에서도 널리 찾아볼 수 있는 관행이다. 또 스키타이인들은 맹약을 하는 경우 큼직한 항아리에 술을 붓고 거기에 계약 당사자들의 피를 섞는다. 그리고 칼이나 화살, 도끼, 창 등을 거기에 담그고 기도를 올린 후 항아리에 든 피가 섞인 술을 마신다.

스키타이인들의 장례관습도 기록되어 있는데 왕이 죽으면 시신의 배를 절개하여 깨끗이 비운 다음 향료를 넣고 봉합한다. 시신을 수레에 싣고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는데 시신을 맞는 사람들은 자기 몸에 칼자국을 내어 슬픔을 표시한다.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고 왕의 후궁, 요리사, 술 따르던 자, 마부, 집사, 사자使者 등을 한 사람씩 목 졸라 죽여 망자와 함께 순장한다. 그리고 말과 황금으로 만든 잔 등 부장품을 묻는다. 이러한 거대한 봉분을 ‘쿠르간’이라 하는데 신라 고분과 모습이 비슷하다. 쿠르간은 남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다수 남아 있다.

고고학자들은 스키타이인들의 무덤에서 황금으로 된 많은 부장품을 발굴하였는데 그들이 지닌 황금은 약탈만으로 획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알타이 지역은 옛날부터 많은 사금이 산출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러한 황금을 교역을 통해 벌어들였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유목민들은 그 생활방식 자체 때문에 주변 정착민들과의 교역이 필수적이다. 곡물이나 농산품과 수공업품 등은 직접 생산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족속들과의 교역에 개방적이었다. 스키타이는 우월한 군사력으로 주변 족속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공납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것도 스키타이 부의 원천 가운데 하나였다.

스키타이는 유목민족 가운데 가장 먼저 큰 나라를 세운 사람들로 일컬어진다. 흑해 북안 즉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역이 바로 그곳이다. 헤로도토스는 당시 스키타이 국가의 영토가 동서 4,000 스타디온, 남북의 길이도 4,000 스타디온이라고 하였다. 스타디온은 경기장의 길이로서 대략 180미터 정도인데 그렇다면 당시 스키타이 나라의 크기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영토와 비슷한 52만 평방킬로미터 정도가 된다.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황금인간상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페르시아인들은 스키타이인들을 ‘사카’라고 불렀다. 사카족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를 위해 그리스인들과 싸운 많은 페르시아 동맹 가운데 가장 용감하게 싸운 족속이었다고 한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에 참여한 사카족을 ‘아뮈르기온’ 출신 스키타이족이라 하였는데 아뮈르기온은 옥수스 강(오늘날의 아무다리야 강) 동쪽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일대에도 스키타이인들이 살았던 것이다. 물론 이들은 앞에서 말한 우크라이나 지역의 스키타이 국가에는 속하지 않았다.

이들 사카족 즉 아시아의 스키타이는 카스피해 동쪽,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으로부터 남부 시베리아, 파미르 고원, 알타이 지역에까지 널리 분포되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9년에 발견된 알타이 지역 파지리크 고분은 사카족의 고분으로 여겨지는데 스키타이 양식의 금속조형물들과 말을 탄 사카족 기사의 모습을 담은 모전 직물도 생생한 모습으로 발굴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파지리크 고분의 부장품으로 판단하건대 알타이 지역까지 스키타이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서는 1969년 알마티 근처의 이시크 고분을 발굴하였는데 황금 갑옷을 입은 유해가 나왔다. 이 고분에서 나온 황금장식품만 4천 점이 넘었다. BCE 5세기경의 사카족 수장으로 추정되는 이 인물을 카자흐스탄 정부에서는 ‘황금인간(알틴 아담)’이라 부르고 수도 아스타나를 비롯한 주요 박물관에 국가의 대표 유물로 전시를 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인들은 이를 통하여 기마유목민인 사카족 후예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사카족의 일부는 카자흐스탄을 넘어 중국의 서역 즉 신장 지역에도 정착하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이 사카족을 색종(塞種)이라 불렀다. 색塞은 삭으로도 읽혔는데 사카를 음차한 말이다.

다시 유럽 쪽으로 넘어가서 스키타이 제국의 흥망성쇠를 살펴보자. 알렉산더로스 대왕의 부친으로서 전그리스 세계를 통일한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 필리포스 2세(재위 BCE 359-336)는 그리스 폴리스들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한 준비단계로서 북쪽의 스키타이와 전쟁을 하였다. 스키타이인들은 숫자가 마케도니아보다 훨씬 많고 용맹하기도 하였지만 필립포스 왕의 뛰어난 전략에 밀려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역사가 폼페이우스 트로구스에 의하면 패전한 스키타이는 2만에 달하는 여자와 청년, 많은 소와 말을 마케도니아에 보내야 하였다. 암말만 2만기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마케도니아 기병대가 마케도니아 군의 핵심전력이 될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였다고 스키타이가 망한 것은 아니다. 스키타이는 BCE 2세기에 들어서 서쪽으로는 켈트족과 게르만계인 게타이족, 동쪽으로는 이란계 유목민인 사르마트(사우로마타이)의 공격으로 인해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 시기부터 흑해 북안에서 스키타이 고분들이 급속히 수가 줄어드는데 이는 스카타이족이 이 지역을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대거 이주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크림반도와 다뉴브 강 하구 지역이 이들이 옮겨간 지역인데 크림반도의 심페르폴 근처 네아폴리스 유적은 바로 이들이 세운 정착지로 새로운 수도였다. 후일 크림반도에는 게르만족인 고트족도 많이 유입되었는데 스키타이인들은 이 고트족에 상당히 동화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BCE 64-CE 24)은 그의 《지리학》에서 스키타이인들에 대한 기록을 약간 남겼는데 ‘말젖을 먹고 수레 위에서 사는’ 스키타이 유목민들이 부에 오염되지 않고 소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칭찬하였다. 스키타이가 스킬로루스 왕 지휘 하에 흑해 북안에서 이동하여 드네프르 강 하구와 크림반도 일대에 정착하였는데 스트라본은 이 나라를 ‘소小스키티아’라고 부르고 있다. 흑해 북안에 있던 예전 스키타이 국가보다 규모가 크게 줄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런데 당시 크림반도에는 케르손네소스 같은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들이 있었으며 마에오티스 해(아조프 해) 양안에는 보스포로스 왕국 같은 나라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기마전사였던 스키타이인들은 그리스 도시들에 대해 공납을 부과하였는데 시간이 가면서 그 공납은 더 무거워지게 되었다. 그래서 크림반도의 그리스인들은 바다 건너 폰투스 왕국의 왕 미트리다테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야심가였던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리스인들의 원조요청을 내세워 스키타이 왕국을 정복하였다. 소스키타이 왕국은 스킬루로스 왕의 아들 대에 미트리다테스에 의해 멸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 미트리다테스 역시 로마에 도전하여 싸움에서 패배하자 크림반도로 도망가 그곳에서 자결하였다. 이것이 로마 역사서에 나오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결말이었다.

스키타이인들은 크림반도로 내려온 후 차츰 유목생활을 버리고 정착생활로 전환하였는데 주변의 그리스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 그리스식으로 집을 짓는 등 그리스식 생활을 즐겼던 것 같다. 스킬로루스 왕의 영묘로 추정되는 석조건물이 크림반도의 심페로폴 근처에 남아 있는데 당시 스키타이 지배층이 그리스 문화에 크게 동화되어 갔음을 보여주는 증거의 하나가 될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사서에는 그리스 모친의 영향으로 그리스 말과 글을 배우고 그리스식 의복과 심지어는 그리스 종교인 디오니소스 비의에도 빠졌던 스퀼레스라는 스키타이 왕을 소개하고 있다. 그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인 것에 대해 스키타이인들은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그 때문에 그는 그의 살해당하고 말았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스키타이인들은 그리스인들의 관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몹시 꺼렸다고 한다. 유목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약화되는 것을 스키타이인들은 경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흑해 연안을 버리고 크림반도로 내려온 이후 이러한 스키타이인들의 태도는 점차로 바뀌었다. 유목민들이 초원을 버리고 정착생활을 영위하게 되면 그 생활방식 뿐 아니라 생각과 믿음, 관습도 바뀌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네아폴리스의 스킬로루스 왕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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