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간의 힘: 상이한 것의 동시성
“나에게 시간에 관해 물어보는 이가 아무도 없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막상 이렇게 묻는 이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우리는 별반 깊게 고민함이 없이 시간을 측정 가능한 ‘지금’ 또는 ‘현재’의 흐름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에 따르면 시간은 없는 것이거나 환영幻影과 같다. 지나간 과거는 이미 없고(nicht mehr) 다가올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없다(noch nicht). 지속적인 시간이 설사 ‘지금’의 단위로 나눠질 수 있다 해도 ‘지금들’은 그때그때 각기 유일한 시점에 놓인 것으로서 서로 다르다. 어떤 두 개의 지금도 동일하지 않으며, 동시에 있을 수도 없다. 이 또한 시간은 어디에서도 하나의 사물과 같은 것으로서 발견될 수 없다는 점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존재하는 데는 동일성과 단일함이 필연적으로 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 철학의 시간 담론 역시 지금을 중심으로 ‘더 이상 아닌 지금’과 ‘아직 아닌 지금’으로 뻗어나가는, 다시 말해 시간을 잇달아 흘러가는 비가역적非可逆的인 지속으로 보는 통속적 이해의 차원을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서양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시간의 문제를 천착穿鑿한 아리스토텔레스도 예외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운동과 관련하여 탐색한다. 시간이 운동 자체는 아니지만 운동이 있는 곳에 드러나는 것으로서 ‘운동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시간을 운동하는 물체는 아니고 운동에 있는 어떤 것, 더 정확히는 운동에서 헤아린 것이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운동의 가장 일반적 형태는 ‘이동’, ‘변화’이다. 따라서 운동은 단순히 ‘저기’와 ‘여기’들의 끊고 이어지는 병렬이 아니라 ‘저기서 이리로’라는 이행이나 경과, 구간의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다시 ‘저기서 이리로’는 공간의 폭인 동시에 ‘앞서’와 ‘나중’ 혹은 ‘이전’과 ‘이후’라는 시간의 동안을 의미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에서 헤아린 시간은 ‘저기서 이리로’라는 공간적인 폭[Weite]과 ‘이전에서 이후’의 시간적 머묾[Weile]이 한 겹으로 포개져 있다.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은 운동에서 이전과 이후의 지평에서 만나게 되는 운동에서 헤아린 것”으로 밝혀진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개념은 ‘지금’[현재]을 중심으로, 또는 지금의 지평에서 이전[과거]과 이후[미래]가 폭을 벌리는 운동의 측정가능한 흐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시간과 공간의 동근원성을 의도치 않게 내비치지만 그의 시간론에서 이에 대한 발전된 논의는 이뤄지지 않는다. 논의를 막은 것은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시간을 지금의 연속적 흐름으로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다른 차원으로 간주하는 통상적 시간이해를 의심해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이해에 함의된 시간의 공간적, 지평적 성격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자가 시간 안에 있다’는 말은 존재자가 시간에 의해 헤아린 것으로서 시간 안에서 시간을 통해 “움켜쥐어져 있음”(Umgriffenwerden)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시간이 존재자를 감싸 쥐고 있는 한”, 시간은 “어떤 포괄적인 지평”(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실은 시간을 모든 사물들이 부단한 변화 속에 그 자신으로 존립하는 기반이나 장소로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 경우 시간은 존재자를 “담는 용기容器”(“behälter”)(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와 같은 것으로서 어떤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론적으로 앞서며 어떤 객관적인 것들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다.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 인간의 영혼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헤아려진 시간은 헤아리는 영혼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은 일정한 방식으로는 도처에 있지만 그렇지만 그때그때 시간은 언제나 다만 영혼 안에 있다.”(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 그렇다면 사물과 사건들을 움켜쥔 시간은 “어떤 객관적인 것보다 객관적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이다.”(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가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개척한 탐구 가능성을 따라 시간을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과 관련지어 심층적으로 토의한다. 그 역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차원을 갖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고 여기는 자연적이며 일상적인 시간 이해를 일단 긍정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묻기를 ‘그러면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 시간의 장소는 어디인가?’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물음 앞에서 시선을 우리의 내면으로 돌린다. 그는 시간의 ‘장소’를 바깥이 아닌, 시간을 지각하고 비교하고 측정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시간 이해[정신이나 영혼]에서 구한다. 이에 따르면 ‘현재 지나가고 있는 시간’은 시간을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지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이해 안에서 ‘지각되는 현재’로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시간은 지금의 현재에서 지난 일들을 끌어내 얘기하는 인간의 회상적 시간 이해에서 그리고 미래는 지금 앞일을 예견하며 바라보는 인간의 기대 안에서 ‘현재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는 지금 생생하게 지각되는 인상[心像]의 현존에 의해 성립하거니와, 과거와 미래의 시간 역시 각기 회상하고 앞서 내다보며 마음의 눈앞에 그리는 이미지의 현재적 현존에 의해 지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지각하고 기억하며 기대하는 의식 활동이 현재 진행하는 동일한 지각의 흐름에서 통일돼 있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존재와 본질을 정신의 통일적 활동 위에서 그때마다 지각되는 현재를 기점으로 하여 각각 과거지평과 미래지평으로 뻗어나가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기억 가운데 사라지지 않는 것과 기대 가운데 미리 다가오는 것을 지금의 현재에서 움켜쥐고, “지금의 것으로 이끌어가는 통일적 의식 활동으로부터 시간은 뻗어나감의 연장성[늘어나거나 길게 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연장성은 의식이나 주체가 현재와 과거, 미래로 향해 스스로를 여는 개방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방성은 시간이 일어나며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 심상心像으로서 들어서는 열린 장이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시간은 공간으로써 열린다는 것을 함축한다. 한편 칸트에게서도 시간의 공간성이 확인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게서 인식은 경험적인 것으로서 감성의 시간, 공간의 형식에 따라 외부로부터 들어온 자료들과 우리의 선험적 오성이 본래 지닌 개념과 원리들이 종합됨으로써 성립한다. 이에 따라 칸트 인식론은 두 상이한 것인 감성과 오성을 무엇이 어떻게 결합하도록 하는지 해명해야 하는 요구 앞에 놓인다. 적어도 이 제3의, 매개적 차원은 서로 다른 것, 즉 감성의 질료들과 오성의 범주들을 함께 속하게 하며 그것들을 고유하게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칸트는 이와 같은 종합을 매개하는 능력을 ‘선험적 구상력’(transcendental imagination)에서 찾는다. 그런데 선험적 구상력은 시간적 종합으로 구체화된다. 시간이 순수 구상력이 작동하는 토대로서 종합의 매개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초월적이며 비개념적인 시간은 감성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감성과 오성의 결합이 일어나는 존재론적 지평, 영역으로서 드러난다. 그래서 칸트에게 시간은 공간, 장으로써 일어나며 시공간으로서의 시간의 힘은 종합을 중재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의 본질을 정신이나 의식의 활동영역에서 파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도는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에게서 심화된다. 후설에게 시간은 우리의 내적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그는 시간의 내적 의식작용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한다. 이 말은 그의 시간 탐구가 방법적으로 시간을 지금의 연속이며 언제든 측정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일반적인 시간 이해를 일단 괄호 안에 넣고 시작된다는 점을 가리킨다. 기존 시간관의 모든 흔적을 비우고 순수하게 내재적 시간의식으로 소급해 가는 절차를 통해 시간을 구성하는 내적 의식은 본래 지향적 구조로 이뤄져 있음이 드러난다.
앞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외부의 대상과 내부의 정신을 나누면서 지각, 회상, 기대 등의 정신의 활동이 관계 맺는 시간적인 것을 내재적으로 주어진 표상이나 이미지라고 밝혔다. 이에 반해 후설은 지각하는 의식 활동을 지향적 구조에 따라 분석하면서 지각은 단순히 현재의 지각 심상, 즉 지각 대상을 대표하는 내적 표상이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지각 대상 자체에 이미 향해 있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그는 직접 시간적인 것으로서 지각된 대상을 ‘시간 객체’라 호명한다.
지향적 의식 활동은 현재의 지각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시간 의식에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지향적 의식은 더 이상 생동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것, 즉 생생하고 현실적인 지금으로부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지금으로 밀려나가는 객체를 붙잡아 의식 속에 간수한다[과거 지향(Retenton)]. 또한 동시에 아직은 아니지만 이제 곧 지금의 시점으로 존재하게 될 겻을 예상하며 앞당겨 내다본다[미래 지향(Protention)]. 후설에 따르면 현재적인 지각과 함께 과거 지향, 미래 지향이 통일성을 이루는 의식 작용이 의식내재적인 시간을 근원적으로 형성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객관적 시간은 바로 근원적인 시간 의식 속에 비로소 구성되고 정립된 것이다.
여기서도 주목할 것은 후설의 시간론은 시간 객체를 바로 눈앞에 내세우는 지금의 지각도 그렇지만 과거와 미래에서도 사라지는 것을 아직 간직하고(retenton) 다가오는 것을 이미 앞서 쥐는(pretentipn) ‘붙잡음’에서 시간의 본질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설에게서도 시간의 힘은 ‘상이한 것의 동시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다시 새롭게 사유되어야 시간의 사태를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지향적으로, 곧 스스로를 넘어 시간 객체를 붙잡는 의식 활동을 통해 그리고 그것과 함께 ‘지향적 의식’과 ‘지향된 것’의 ‘사이’이자 그 둘을 하나로 묶는 ‘와’의 개방적 영역이 트인다. 지향적 의식에서 생생한 현재가 과거로 흘러들어가는 동시에 미래로 뻗어나가면서 시간 객체와 관계 맺는 ‘사이’로서의 통일적인 시간 영역이 열리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내재적인 통일적 시간지평은 모든 시간 객체들이 그러한 것으로서 머물게 하는, 그래서 어떤 객관적인 것보다 객관적인 근본토대로서 작용한다. 다시 말해 의식의 통일성 또는 의식으로부터 통일된 시간 영역은 시간이 열리고 그리고 시간에 붙잡힌 시간적인 객체들이 들어서 체류하는 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머묾은 머물 때와 장소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주로 시간의 공간성을 의식하며 혹은 시간=공간이라는 하이데거의 시간론을 미리 내다보면서 시간에 대한 기존의 주요한 입장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이 확인되고 또 지시되었다. 철학의 기존 시간론은 크게 보면 일상의 시간 이해에 갇혀 있었다. 그러한 한계에서도 이들은 분명하든 분명하지 않든 시간을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드러나는 시공간으로, 또 시간의 본질이나 힘을 [상이한 것을 하나로] 붙잡음, 움켜쥠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에게서 영역으로서의 시간을 시간적인 대상이나 존재자와 주체[영혼, 의식]의 관계 맺음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윤곽적으로 드러난 시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장을 열고 견지하는 시간의 본질에 대한 구체적 해명을 이제 하이데거가 인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