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시간은 둥글다
“모든 직선적인 것은 기만적이다. … 참된 것은 굽어 있다. … 시간 자체는 하나의 원이다.”(니체)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은 언제, 어떤 식으로 표현되든 다만 존재가 참됨으로 생기生起하는 장을 문제 삼는다.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하이데거는 이 ‘어디에’란 물음으로써 시공간의 시간을 겨냥한다. 하이데거는 일찍이 『존재와 시간』 서문에서 시간을 존재 이해의 가능한 지평으로서 밝히는 게 책의 의도라고 기술한 바 있다. 존재와 무의 관점에서 말하면 두 상이한 존재와 무가 차이 가운데 함께 속하도록 하는 둘 사이의 사이, 중심이 시간이란 말이다. ‘존재의 의미’, ‘존재의 진리’로도 호명되는 사이의 영역은 시간이자 공간인 시간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한편 무의 어둠으로부터 밝게 트이며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드러내는 존재가 머무는 존재 이해는 인간의 고유한 존재에 속한다. 인간은 존재자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자와 관계 맺으면서 어떤 식으로든 그것의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사이-영역으로서의 시간은 존재의 진리와 인간 본질을 함께 짊어지고 있는 중심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을 중심으로 한 사유 초기에서는 그런 의미의 시간을 “근원적 시간의 현상”으로 여기며 “시간성”(Zeitlichkeit)이라 부른다.(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 일상적 시간 이해는 이로부터 길어 나온다.
시간성의 시간에서는 과거, 미래, 현재란 시간 계기들이 ‘지금의 연속적 흐름’과는 다른, 보다 근본적 의미에서의 단일함을 형성한다. 이때 하이데거는 과거, 미래를 통속적인 방식으로 각기 이미 사라지고 없는(nicht mehr) 것, 아직 오지 않아 없는(noch nicht)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과거란 여직 있어온 것이며 미래는 벌써 미치고, 이르는 것이다. 이를 고려해 하이데거는 과거, 미래 대신 각각 ‘기재旣在’(Gewesenheit), ‘도래到來’(Zukunft)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또 현재는 기재와 도래와의 통일 속에 현재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상적 시간 이해에서 ‘지금’, ‘그 전에’, ‘그 후에’라는 현재, 과거, 미래의 시간 규정들은 각기 눈앞의 것을 현재화함, 지나간 것이 여전히 남아 있도록 유예하는 간직함, 이미 도래하는 것을 기대함이란 인간의 태도에 바탕을 둔다. 다시 말해 시간성의 시간에서 근원적 단일함은 ‘[아직 있어온 기재를] 간직하며 [이미 미치고 있는 도래를] 기대하는 현재화함’이다.
이에 따라 하이데거는 시간성의 통일성은 ‘자기 밖으로(Außer sich)’라는 ‘탈자脫自’로부터 규정된다고 밝힌다. 시간성에서 도래(미래)의 본질은 ‘자신으로 다가감’(Auf-sich-zukommen), 기재(과거)의 그것은 ‘무엇으로 되돌아’(Zurück-zu), 그리고 현재의 그것은 ‘무엇 곁에 머묾’(Sichaufhalten bei)에 있다. ‘무엇으로 향해’(auf), ‘무엇으로 되돌아’(zu), ‘무엇 곁에’(bei)에서 시간성의 시간은 ‘자기 밖으로’ 나가 있다. 근원적인 시간인 시간성은 “탈자(Außer-sich) 자체”이며, 모든 탈자의 본질에는 “~를 향해, 어떤 것으로 마음이 향해 있음”(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이 놓여 있다.
탈자는 미리 기대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동시에 아직 간직하며 되돌아가면서 어떤 것을 현재화하는 단일함을 끊임없이 붙잡음으로써 수행된다. 이때 탈자의 ‘~(으)로’라는 방향성은 개방된 여지를 연다. “‘자기 밖으로’와 함께 주어지는 고유한 ‘개방성’이 탈자에 속한다. 모든 탈자가 일정한 방식으로 그 자체에서 개방돼 있는 ‘어디로’를 우리는 ‘탈자의 지평’이라고 부른다.”(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 “도래, 기재, 현재의 탈자적 단일함인 시간성은 탈자를 통해 규정된 지평을 갖는다.”(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 그리하여 시간성의 시간은 그 자체 탈자적이며 지평적인 것, 즉 “근원적인 탈자적-지평적 단일함”(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으로 밝혀진다. 이로써 하이데거가 본래적 시간이라고 말한 시간성은 보다 근원적으로는 스스로 지평화, 영역화하는 시공간의 시간으로서 밝혀진다.
이러한 ‘시간성’의 영역에서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드러내는 존재가 어둠과 숨김의 무로부터 현성한다. 그리고 이 존재 진리 영역은 밝게 트이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마중과 함께 이뤄진다. 이로써 시간은 존재와 인간 본질을 동시에 떠받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간성의 시간은 스스로를 환히 열어 밝히며 우리 가까이(an) 머무는(wesen) 현존(Anwesen)인 존재의 진리 장소(‘an’) 또는 “도대체 존재와 같은 것이 그리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지평”(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이다. 이 장은 또한 동시에 존재를 향해 열려 있는 인간 현존재(Dasein)의 ‘거기에’(‘da’)이다. 여기에는 (존재의) ‘an’과 (인간의) ‘da’가 동일하며 이 동일성은 시간을 중심 자리로 삼아 일어난다는 점이 고지돼 있다.
그리하여 시간은 존재가 생기하고 인간이 그리로 향해 나아가는 가운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존재의 밝음 안에서 저의 참됨을 얻는 존재 사건을 붙잡고 견디는 시공간의 장이다. 이렇듯 ‘상이한 것의 동시성’이라는 시간의 힘 또는 본질은 하이데거에서 보다 뚜렷이 나타난다. ‘상이한 것의 동시성’은 서로를 되먹이며 원을 이룬다. 여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시간은 둥글게 트이는 장이다. 니체는 모든 직선적인[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것은 기만적이고 굽은 것은 참이라고 하면서 시간 자체는 둥글다고 밝힌다.
니체가 존재자의 존재로서 말한 “동일자의 영원한 반복”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그래서 개념적 범주로 잡히지 않는다. 니체의 존재 이해에서는 ‘움직이는 가운데 단일함’, 또 ‘과정으로서의 전체’가 강조되며 ‘개별성이나 차이’의 중요성이 복원된다. 동일자의 영원한 반복은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관을 맺는 연관 자체 또는 일종의 우주적 연결망(cosmic web)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시작도 끝도 앞섬과 뒤섬도 없고, ‘이것이 저것’이다. 모든 것이 주변이고 부분이면서 또한 중심이고 전체이다. 이러한 동일성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은 이미 일어났던 것이다. 모든 것들은 동일성이 무한히 반복되는 과정의 부분들일 뿐이다. “내가 얽혀 있는 원인들의 복잡한 연관망은 되풀이 된다. 이것이 나를 다시 창조할 것이다. 나 자신이 영원회귀하는 원인들의 부분이다.”(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이에 따라 니체의 존재도 마땅히 비가역적인 직선의(linear) 시간이 아니라 둥근 원(circular)의 시간으로부터만 존립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철학에서 원의 유비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둥근 원은 파르메니데스가 밝힌 존재이며 헤리클레이토스가 말한 로고스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서구 시원에 파르메니데스는 ‘밝게 트이며 [우리 가까이] 머무는 존재를 영역적, 위상학적으로 이해하면서, “둥근 공”이라고 불렀다. 파르메니데스는 환히 열리는 존재를 “어디서나 동일한 것으로서 고유한 중심에 있으며 이 중심으로서 원”이라고 밝힌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또한 원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존재자의 존재로 파악한 로고스는 “근원적으로 불러 모으는 것”, “불러 모으는 모여 있음”(Einführung in die Metaphysik)을 의미한다. 로고스는 갈라서며 나눠지려는 것들을 움켜쥐고 근원적으로 하나로 모은다. 즉 그것은 “시작과 끝이 동일하며 그 자체로 모여 있는” 원의 둘레(단편 103)(Einführung in die Metaphysik)와 같다. 하이데거는 『동일성과 차이』(Identität und Differenz)에서 자세한 설명을 달지 않은 채, 형이상학은 시간의 숨겨진 본질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말을 받아서 니체에게 구했듯이 두 시원적 사상가에게도 그들의 존재는 둥근 시간으로부터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심문할 가치가 있다.
‘탈자적-지평적 단일함’이란 시간성의 시간은 하이데거의 사유 후기에 “시간-공간”(Zeit-Raum) 또는 “시간-놀이-공간”(Zeit-Spiel-Raum)으로 불린다. 그렇지만 양자는 이름의 차이에 상관없이 본질이나 힘에서 동일하다. 즉, 둘 모두 인간의 호응 속에 공간으로써 열리고 존재와 무, 존재와 인간, 존재와 존재자란 두 상이한 것의 공속성, 그런 의미의 동일성을 내어나른다. “시간-공간”의 시간에 대해서는 분량상 자세한 설명을 미룬다. 다만 다음의 사실만은 지적해둬야 할 것 같다. 시간성 논의는 유일하게 존재를 이해하는 인간의 존재 구조를 해명하는 실존론적 차원에서 이뤄진다. 반면 “시간-공간”의 시간은 후기에 들어 그의 사유가 ‘존재’의 ‘존재하게 함’에서 ‘존재를 줌’으로 보다 근원적으로 물어 들어가면서 존재가 내어지는 지평으로서 해명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시간은 무의 가림막을 열고 나온 존재가 머물고 그 밝음 안에서 존재자가 그 자체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은닉과 비은폐, 다시 말해 무와 존재를 동시에 움켜쥐는 ‘사이’ 또는 ‘와’의 영역이란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는 시간의 영역에 들어서 밝게 트이는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는 인간의 참여 속에 일어난다. 창조를 낳은 카오스는 본래 ‘하품’을 말한다고 한다. 입을 쩍 벌린 시간의 심연에서 모든 것이 나오고 들어간다. 그래서 시간을 ‘존재론적인’ 하품이라고 말해도 된다. 시간은 또 원래 장소를 의미하는 ’창끝‘에 비유할 수 있다. 시간은 아니, 시간이자 공간으로서의 시간은 모든 것을 밝게 드러내며 하나로 불러 모으고 동시에 그것들을 하나로 꿰뚫어 각기 저마다의 고유함으로 있도록 하는 창끝이다. 또 이렇듯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들의 본질이 유래하는 시원이기에, 우리가 그곳을 떠나며 유랑을 했지만 그 끝에서 다시 돌아가는 고향과 같은 곳이다. 그럼으로써 고향은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 새롭게 도래하는 또 다른 시원이다. 고향은 뒤로부터 넘어와 가까이 다가오면서 우리들의 기쁜 귀향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