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국에서 대한 천자국으로 2

국호(國號), 대한(大韓)

1897년 10월 11일 오후, 고종은 경운궁을 출발하여 회현방 소공동 환구단으로 행차하였다. 다음날 행할 고유제를 올릴 제단, 제사에 사용할 제기(祭器)와 희생(犠牲) 등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이를 마친 후 고종은 환구단에서 심순택, 조병세, 민영규, 김영수 등 측근 신하들을 입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호(國號)를 논의했다. 『승정원일기』·『고종실록』에 실린 당시 현장 대화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고종 : “경들과 의논하여 결정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는 지금에 모든 예가 새로워졌으니 원구단에 처음으로 제사를 지내는 지금부터 의당 국호(國號)를 정하여 써야 한다. 대신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심순택 : “우리나라는 기자가 옛날에 봉해진 조선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칭호로 삼았는데 애당초 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나라는 오래되었으나 천명이 새로워졌으니 국호를 정하되 응당 전칙(典則)에 부합해야 합니다.”

조병세 : “천명이 새로워지고 온갖 제도도 모두 새로워졌으니, 국호도 새로 정해야 마땅합니다. 앞으로 만억년토록 영원할 나라의 터전이 진실로 지금에 달려 있습니다.”

고종 : “우리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통합하여 하나가 되었으니,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니다. 또한 종종 각 나라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도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을 기다린 것이니, 천하에 공표하지 않더라도 천하가 모두 대한(大韓)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는 것이다.”

심순택 : “삼대 이래로 국호는 예전 것을 답습한 경우가 아직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바로 기자가 옛날에 봉해졌을 때의 칭호이니, 당당한 황제의 나라로서 그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대한이라는 칭호는 황제의 계통을 이은 나라들을 상고해 보건대, 옛것을 답습한 것이 아닙니다.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시니 감히 보탤 말이 없습니다.”

조병세 : “각 나라의 사람들이 조선을 한(韓)이라고 부른 것은 그 상서로운 조짐이 옛날에 싹터서 바로 천명이 새로워진 오늘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또한 ‘한’자의 변이 ‘조(朝)’자의 변과 기이하게도 부합하니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만세토록 태평 시대를 열 조짐입니다. 신은 흠앙하며 칭송해 마지않습니다.”

고종 :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頒詔文)에 모두 ‘대한(大韓)’으로 쓰도록 하라.”(『승정원일기』 고종 34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11일])

고종은 삼한을 하나로 통합했다는 의미를 함축한 ‘대한(大韓)’을 새 국호로 정했다. 그러나 대한이라는 국호는 이때 결정된 것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황제 등극의(登極儀) 때 올릴 ‘대한(大韓)’이라는 한자가 들어간 어보(御寶)·국새(國璽) 제작이 이미 수일 전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이날 오후 4시쯤 환궁하였다.

 

환구단에서 친제를 올리다

그렇다면 황천상제에게 올리는 환구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먼저 환구제를 앞두고 고종이 한 말을 들어보자.

 

오직 상제(上帝)가 날마다 여기를 내려 보고 있으니 마땅히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하며 털끝만큼이라도 정성스럽지 못한 뜻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상제가 내려와 그대를 보고 있으니, 그대는 딴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사람들은 다만 하늘이 아득히 멀고 귀신이 은미하다는 것만 알 뿐이지 구석구석 훤히 살펴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대체로 정성이 있으면 감응이 있고 정성이 없으며 감응이 없으니, 제계하고 깨끗이 하며 의복을 성대히 하여 제사 받들기를, 마치 하늘이 위에서 굽어보고 있는 듯이 하여야 한다. 이것이 옛날의 성스럽고 밝은 제왕들은 하늘을 공경한 까닭으로 그 내용이 문헌에 상세히 실려 있다. 하늘과 사람은 원래 두 가지가 아니니, 성인은 바로 말을 하는 하늘이며 성인의 말은 곧 하늘의 말이다. 공경은 한결같은 것을 위주로 하며 한결같으면 정성스럽고 정성스러우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다. 지금 대사(大祀)를 당하여 백관과 집사들은 각자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다.(『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0월 9일 양력 2번째 기사 )

 

1897년 10월 12일 새벽, 고종은 환구단에 나아가 황천상제에게 고하는 친제를 올렸다. 『대례의궤』에 실린 원구 천제의 핵심 과정을 보면 아래와 같다.

때가 되자 장례가 외판(外辦)을 무릎 꿇고 주청하니, 상이 면복(冕服)을 입고 나와 규(圭)를 잡고, 좌남문을 거쳐 요를 깔아 만들어 놓은 임금의 자리로 가서 북향하고 선다.

협율랑이 중화지곡(中和之曲)을 연주하면 나무를 태우고 요단(燎壇) 위에 소머리를 굽고, 음악이 따른다. 상이 국궁(鞠躬) 사배(四拜) 흥(興) 평신(平身)을 한다.

음악이 그치면 상은 관세위(盥洗位)로 가서 손을 씻은 후 황천상제 준소(尊所)에 가서 서쪽을 향해 선다. 협률랑이 숙화지곡(肅和之曲)을 연주하는 가운데 울창(鬱鬯)을 올린다. 상은 다시 황지지(皇地祗) 준소에 가서 역시 울로를 올린다. 상은 다시 황천상제 신위로 가서 북향하여 엎드려 규를 꽂고 세 번에 걸쳐 향을 올린 다음 찬(瓚)을 잡고 술을 따른다.

다음에 옥백(玉帛)을 신위 앞에 올리고, 규를 잡고 부복했다가 일어난다. 상은 다시 황지지 신위 앞에 가서 황천상제 신위에 한 것과 똑같이 한다.

상은 응화지곡(凝和之曲)이 울리는 가운데 황천상제 신위 앞에서 조(俎)를 올리고 규를 잡고 부복했다가 일어난다. 상은 다시 황지지 신위 앞에서도 똑같이 한다.

상은 황천상제 준소에 가서 서향하고 서서 수화지곡(壽和之曲)이 울리는 가운데 술을 올린다. 황지지 준소에서도 그렇게 한다.

상은 황천상제 신위로 가서 북향하고 서서 신위 앞에 작(爵)을 올린 다음 부복했다가 일어난다. 황지지 신위에서도 그렇게 한다.

그 다음에는 대축이 신위 오른쪽에서 동향하여 축문(祝文)을 읽고, 끝나면 상은 부복했다가 일어난다.

상은 황천상제 준소에 가서 예화지곡(豫和之曲)이 울리는 가운데 아헌례(亞獻禮)를 한다. 그 다음 황천상제와 황지지 준소에 가서 종헌례(終獻禮)를 행하고, 두 신위에게도 종헌례를 한다.

이어 음복과 변두(籩豆) 철거와 망료(望燎)로 이어진다. 이때 옹화지곡(雍和之曲)이 연주된다. 요화(燎火)가 반쯤 타면 모든 제사가 끝난다.

 

고유 천제는 황제 입장 –> 국궁 사배 흥 평신(鞠躬四拜興平身) –> 신관례(神祼禮) –> 삼상향(三上香) –> 전옥백(奠玉帛) –> 진조(進俎) –> 초헌례 –> 독축(讀祝) –> 아헌례 –> 종헌례 –> 음복례 –> 국궁 사배 흥 평신 –> 변두籩豆 철거 –> 망료(望燎)의 순으로 이루어졌다.

환구단에서 올린 제사의 궁극 대상은 황천상제皇天上帝이다. 지금의 서울 황궁우에는 황천상제皇天上帝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자금의 황궁우(皇穹宇)와 황궁우 내 황천상제(皇天上帝) 위패

 

황천상제는 천지만물을 주재하고 천명을 내리는 궁극적 존재이다. 대한제국 환구제는 사라진 상제를 모시는 전통, 상제문화를 수백 년 만에 부활시키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황제로 등극하다

등극의(登極儀)는 고종이 환구에서 황천상제, 천지에 제사한 뒤 황제위(皇帝位)에 등극하는 의례이다. 1897년 10월 12일 새벽, 고종은 천지에 고하는 고유제를 마쳤다. 그리고 묘시(卯時)(오전 6시)에 황제 자리에 오르는 의례를 행하였다. 『대례의궤』에 기록된 절차를 정리하면 이렇다.

 

천지에 고하는 제사가 끝나자 의정(議政)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망료위로 가서 고종에게 “고제례(告祭禮)가 끝났으니 황제위에 오르소서”라고 청하였다. 고종은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壇)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옥좌에 앉았다. 백관들이 먼저 품계에 맞추어 늘어선 가운데, 집사관이 면류관과 십이장복을 올려놓을 탁자[冕服案]과 옥새를 올려놓을 탁자[寶案]를 들고 왔다. 의정이 곤면(袞冕)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면복안 위에 올려놓았다. 의정 등이 12장문의 곤면을 들고 황제에게 입혔다.

의정 등이 제자리로 들어간 뒤, 찬의(贊儀)가 ‘배반(排班)’을 창하였다. 반(班)이 정렬되고 사배를 올렸다. 그 사이 음악이 연주되었다.

찬의가 “반수(班首)는 앞으로 나오시오”라고 하자 주사(主事)가 의정을 인도하여 황제 앞으로 갔다. 찬의가 “무릎을 꿇고 홀(笏)을 꽂으시오”라고 하자 의정은 엎드려 홀을 꽂았다. 백관이 모두 무릎을 꿇고, 봉보관(捧寶官)이 보를 담은 상자[菉]를 열고 옥보(玉寶)를 꺼내 무릎을 꿇고 의정에게 주었다. 의정이 보를 받들고 “황제께서 대위(大位)에 오르셨으니 신 등은 삼가 어보(御寶)를 올립니다”라 하였다. 비서경(秘書卿)이 보를 받아 녹 안에 넣었다.

찬의가 “자리로 가서 배(拜) 흥(興) 평신(平身)하시오”라고 창하였다. 백관들이 그렇게 하였다. 찬의가 “자리로 돌아가시오”라고 하자, 주사가 의정을 인도하여 서쪽으로 내려와 자리로 갔다.

찬의가 “국궁 배 흥 평신”이라고 하자, 홀을 꽂고 국궁(鞠躬) 삼무도(三舞蹈)하고, 왼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三叩頭], ‘산호(山呼) 산호(山呼) 재산호(再山呼)’를 외치고, 오른쪽 무릎을 꿇고 홀을 꺼내고, 부복한 뒤에 일어나 평신하고 국궁 사배하고 일어나 평신하였다.

찬의가 ‘권반(捲班)’이라고 하자 백관들이 물러났다. 좌우 장례가 황제를 인도하여 대차로 들어갔다.

 

고종의 황제 등극으로 대한제국은 천자국·황제국으로 자주·독립국가가 되었다.대한제국 선포 과정을 담고 있는 『대례의궤』는 천자국 의례를 담고 있다. 이러한 황제 즉위와 관련하여 당시 언론은 이렇게 보도하였다.

 

광무 원년 10월 12일은 조선 역사에서 몇 만 년을 지내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 천 년을 왕국으로 지내어 가끔 청국에 속하여 속국대접을 받고 청국에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이 있더니, 하느님이 도우시어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셔서 이달 12일에 대군주 폐하께서 조선 역사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지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는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뿐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다. 나라가 이렇게 영광이 된 것을 어찌 조선인민이 되어 하느님을 대하여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요.(<독립신문> 1897년 10월 14일)

 

고종황제 어진(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고종의 황제 등극을 계기로 대한제국은 자주독립한 황제국·천자국이 되었음을 보도하고 있다. 황제 즉위식을 마친 뒤 고종황제는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하는 등 여러 후속 의례를 집행하였다. 그 하나로 왕후 민씨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황제국에 걸맞게 제도를 개혁해나갔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다

1897년(고종 34년) 10월 13일 진시(辰時)(오전 8시), 고종은 국호를 대한으로 하고, 연호를 광무로 하며, 임금을 황제로 칭하고,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한 것을 선포하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과 기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마한·진한·변한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가죽·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을 차지하여 귤·유자·해산물을 공납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과 법도는 당요와 우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의 남쪽에서 천지에 고유제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光武) 원년으로 삼으며, 종묘와 사직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 민씨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이에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노라.(『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0월 13일 양력 2번째 기사)

 

이로써 500여 년 간 이어졌던 조선 왕조는 막을 내렸고 마침내 새로운 국가로서 대한제국이 열렸다. 고종황제의 근대국가로의 지향, 그것은 ‘조선’ 왕국의 ‘대한’ 천자국으로의 전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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