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청명함, 고요함!
최근에 다시 아침잠이 없어졌다. 일찍 일어난 나는 벌써 식구들이 깨기를 기다리며 호텔 주위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러다 핸드폰을 꺼내 구글 맵에 한 주소를 집어넣는다. 도로 위 이정표에서 본 지명이다. 왠지 이곳에서 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과연 맵이 알려주는 바로는 불과 수분 거리이다. 그렇다면 이곳을 경유해서 오늘의 목적지로 가도 될 것 같다.
아침을 먹고 차에 올랐다. 내 얘기를 들어 아는 터라 딸애가 능숙하게 차에 장착된 큼직한 디스플레이에 제 핸드폰을 연결하고 알려준 주소를 찍는다. ‘Rotlaubweg 46, 79108 Freiburg-Zähringen’ 이곳에 하이데거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시 또 은퇴 후에도 살던 집이 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아내의 즐거운 웃음, 가족의 경사와 애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무엇보다도 그의 영광과 좌절, 세상에서 환대받던 주인의 즐거움과 세상으로부터 차가운 눈에 놓인 주인의 비애를 말없이 품어주고 덮어준 집이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내비게이션이 목적지 근처라고 알려준다. 일단 내려서 주소의 집을 찾는다. 정원을 갖춘 규모 있는 3층집. 선입견 때문일까. 집은 세월의 흔적에도 의연하게 서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입주해 살지 않아도 정기적으로 관리가 되는 듯하다. 현관문은 열쇠로 닫혀 있지만 정원의 꽃들도 싱싱하고 어디에도 버려져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한쪽 창문으로 낡은 책상이 보인다. 아마 그곳이 서재인가보다. 그사이 변하지 않았다면 하이데거는 이곳에서 강연을 준비하고 원고를 작성했을 것이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는데. 돌로 단단히 지은 그의 집은 아직 의구하다.



오늘의 목적지 슈바르츠발트 속 토트나우베르크도 멀지 않았다. 자동차로 1시간 남짓 거리였다. 토트나우베르크를 둘러싼 산에 하이데거의 산장이 있었다. 그가 은퇴 후 세상과 소란스런 접촉을 피하고 들어앉은 곳이다. 산 정상에 주차장이 있었다. ‘해피 700 평창’을 생각을 나게 하는 곳이다. 우선 그의 산장을 찾자. 임도로 보이는 오솔길이 한쪽으로 나있었다. 주차장에 선 이정표를 보니 짐작대로 그곳이 ‘하이데거의 길’이었다. 산장에 거처하던 하이데거가 자주 산책한 길이 아예 그렇게 불리고 알려져 있었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살던 산장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푸른 나무와 숲이 주는 청정한 공기를 즐기며 얼마를 걸으니 산장 이정표가 보였다. 그러나 산장은 보이지 않았다. 구글 맵도 더 이상 진전이 없다. 그렇다면 이곳인데,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고개를 기웃기웃하며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마침 지나가던 한 네덜란드 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얼떨결에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데 딸아이가 붙임성 있게 우리 사정을 이야기한다. 공교롭게도 세계를 여행하며 트래킹을 즐기던 이 부부에게 오늘의 여정은 ‘하이데거의 길’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계획에도 하이데거의 산장이 있었다. 유럽 전용의 맵 어플을 가지고 있는 남편이 자신 있게 이곳이 산장이라고 하며 그 자리에서 바로 비탈진 산등선 아래로 앞장서 내려간다. 그때 보니 길가에 철조망도 있었다. ‘아 사유지 표시구나? 그렇다면 이곳이 하이데거네 땅이겠네’ ‘아니 사유지라 철조망을 쳐났는데 들어가도 되나?’ 네덜란드 남편은 웃으며 ‘괜찮다’고 하면서 대신 조용히 하자고 한다.
십여 미터 내려가니 덜컥 산장 지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말한 슈바르츠발트 지방의 집답게 지붕이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다. 집 근처에 우물이 있었다. 사진에서 본 그 모습이다. 하이데거와 시인 파울 첼란이 우물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개조도 훼손도 없이 그대로 남아 세월의 풍화만을 맞았을 뿐이다. 집은 오두막으로도 소개될 만큼 작았고 장식을 최소화한 질박한 모습이었다. 사진 속에 집에 비하면 지붕이 좀 더 개량된 형태로 바뀐 것 같다. ‘What a humbie house!’ 다소 유머라고 생각하며 내뱉은 멘트에 네덜란드인은 웃지 않고 딱 그 표현이 맞다는 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날에 산장 내부를 공개하기도 한다지만 문은 닫혀 있었고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다만 한 쪽 창문을 통해 서재로 보이는 공간이 언뜻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아니 그런 만큼 산장은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을 하이데거를 대신해 맞이하기라도 할 것처럼,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산장의 이정표는 “이 구조물은 특별하면서 자의식 강한 단순함을 지니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1956년 그를 찾아온 한국의 네 손님을 이곳에서 만났을 것이다. 서울대 철학과 박종홍 교수는 다른 일행 세 명과 함께 하이데거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 또한 하이데거가 산장에서 유지하던 하루의 루틴 안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아침 6시 30분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부인과 함께 아침을 먹는다. 8시 30분부터 12시까지는 연구실에 들어 앉아 사유에 잠기거나 글을 쓴다. 이 시간에는 그의 부인도 그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12시경쯤에 부인이 그에게 우편물을 가져다주고 오후 1시에 그를 불러 점심 식사를 한다. 잠깐 낮잠을 잔 후 그는 2시부터 5시까지 다시 연구에 몰두한다. 오후의 연구가 끝나면 그를 찾아온 방문객들을 만나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그가 가려서 만나고 있는 방문객들은, 말하자면 은둔하고 있는 위대한 사상가를 경배하기 위해 찾아 온 순례자들인 셈이다. 그리고 저녁 6시부터 7시까지는 그가 매일같이 어김없이 하고 있는 산책 시간이다.

저녁 식사 시간은 대략 8시 경쯤이다. 두 부부는 레코드 음악(바하와 모차르트)을 들으면서 상대방에게 시를 낭독해주며 하루의 휴식을 취한다. 하이데거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 횔덜린의 시 구절을 들려주는 한편, 그의 아내는 그녀가 좋아하는 괴테와 슈티프터의 작품들을 읽어준다. 10시가 될 때쯤이면 으레 부부는 잠자리에 든다.
하이데거는 신문을 거의 보지 않으며 텔레비전은 아예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중요한 축구경기 중계가 있는 날은 그가 옷을 맞춰 입는 재단사 집으로 가서 TV 중계를 시청하고는 한다. 축구는 그의 루틴을 깨고 저술과 사색마저 방해한 것이다. 한 학자의 증언 내지 유감이다. 그는 비로소 동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하이데거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기대에 차서 대가의 입만을 쳐다보고 있는데 하이데거는 베켄바우어에 대한 애기만 잔뜩했다고 한다. 베켄바우어는 1974년 당시 서독팀을 주장으로서 이끌고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고. 두 해 전에는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 우승했으며 세계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발롱도르 상을 2회 수상한 한 독일의 위대한 축구선수이다. 펠레나 마라도나의 반열에 설 레전드이다. 그는 최종 수비이면서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하는, 소위 빌드업 축구의 꼭지점 역할을 하면서 팀을 조율하는 혁신적인 플레이로 리베로 포지션을 새롭게 정의한 선수이다. 그렇지만 그날만큼은 그 학자에게 실망스런 애기였을 것이다.
산장은 아내가 마지막 남은 저금을 털어 남편을 위해 구입한 언덕 위의 땅에 지어진 것이다. 아내는 남편을 대신해, 또 그를 위해 전력회사와 시장에게 전기 설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웬만한 스트레스를 아예 끊고 이 공기 좋은 곳에서 아내의 헌신적 내조로 몸에 좋은 물과 음식으로 섭생을 한 탓인지 하이데거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하였다. 하이데거는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이 전집으로 출간됐을 때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헌사를 직접 써 넣었다. “긴 여정에서 그녀의 한결같은 내조는 내가 필요로 했던 도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부인은 남편 뒷바라지의 부담마저 내려놓을 수 있어서일까, 남편이 죽고 나서도 16년을 더 살아 한국 나이로 백수(1893-1992)를 하였다. 하이데거는 1976년 5월 26일 부인이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전혀 예기치 못하게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부인에게 남긴 말은 ‘감사한다’였다.
갈 때는 보지 못한, 아니 보지 않고 지나친 마을의 풍경이 돌아오는 길에는 시야에 밝게 드러났다. 주차장이 있는 산 정상은 그 자체가 넓은 전망대였다. 해피 700. 내가 선 산과 마주한 산 사이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 “무와 존재는 산과 골짜기처럼 속한다”는 그의 말이 맥락 없이 떠오른다. 그리고 하이터레(Heitere), 에테르, 루에(Ruhe) … .



맞은편 산의 푸른 나무들과 초원, 거의 미동도 없이 한가로이 있는 소들, 골짜기의 마을, 마을의 지붕, 초여름의 밝은 햇빛과 청량한 공기, 빈 벤치 … 짧은 유럽 여행 기간 동안 느낀 거지만 유럽은 어느 마을, 도시나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자연은 자연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집은 집대로 하나의 그림이 되도록 만든 것 같았다. 산이나 강 호수, 집의 지붕, 비좁은 돌로 된 골목, 도로 위 연식 많은 클래식한 차들, 넉넉한 트램의 운행, 사이사이 바삐 지나다니는 자전거, 심지어 테라스의 꽃들마저 서로 조화를 이룬다. 웬만하면 어디나 그림엽서의 사진이다. 우리에게 이탈리아의 토스카나를 가이드한 젊은 청년이 이런 궁금증에 그 나름의 설명을 더한다. 그이가 사는 동네에 한 할아버지가 있는데 이분은 동네 수퍼를 가는데도 말쑥한 수트 차림을 한다는 것이다. 알지 않는가? 수트 입은 이태리 남자의 멋스러움이란. 그래서 이유를 물었더니 할아버지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차려입고 다니면 이 마을을 아름답게 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 아닌가? 유럽인들은 다 그런 마음인가?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한 마디로 ‘하이터레’한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진리를 맞갖게 표현하기 위해 여러 호칭과 표현을 사용했는데 ‘하이터레’는 그 중 하나이다. ‘하이터레’는 옛말로서 오늘날 형용사 ‘하이터’(heiter)는 ‘갠’, ‘맑은’, ‘밝은’, ‘시원한’, ‘명랑한’, ‘쾌청한’ 등의 뜻을 갖는다. 존재의 진리로서의 ‘하이테러’는 마친 비 갠 뒤의 맑음과 청량함, 나아가 그 정경과 하나로 조율된 그런 기분에 비교될 것이다. 또 “높은 하늘의 자유로운 공기와 정신의 열린 영역”인 에테르이다. ‘불멍’, ‘물멍’이니 하는데 하이데거 말로 하면 토트나우베르크 산과 마을에는 단순한 것의 동일함이 건네는 말 건넴에 귀 기울이는 고요함(루에)이 있다.
또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를 해명하면서 상주常住하는 것에는 청명, 청량함(Aufheiterung)과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한다. 상주하는 것은 단순한 것의 동일성이다. 횔덜린은 ‘일자’(Einer)로서의 신성한 신이 “성스러운 햇살의 유희를 즐기며 살고 있다.”라고 노래한다. 이 시구를 지배하는 것은 청명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 발현의 청명은 시인에게는 성스러운 것이고 성스러운 것으로서 지고한 것이며 모든 것을 본질로 존재하도록 하는, 즉 “고향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고향에 있도록 허락하는 것은 고향의 본질이다. 청명이 먼저 나타나는 기쁨 속에 이미 고향을 만난다.” 그리고 존재 발현에는 언제나 고요함이 깃든다. 탈은폐와 고요함은 마치 한 가지에 피어나 서로 어우러져 향기를 품어내는 두 꽃과 같다. 하이데거에 존재의 황홀은 “환히 빛나는 매료의 고요한 불러옴”, “불러 세우는 정적의 순수한 황홀이란 의미의 매혹적인 것(Anmu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