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패자 거란제국

거란제국의 흥기

11세기 중반 거란제국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 편찬된 중국 사서 《신당서》 북적전北狄傳에 의하면 거란은 선비족에서 갈라져 나왔고, 그들의 생활 방식은 돌궐과 비슷했다고 한다. 삼국시대 말, 선비족의 우두머리 가비능이 조조의 위나라에 살해된 후 거란족은 시라무렌강 남쪽으로 도망쳤다. 이들은 후일 북위 시대(386-534)에 와서 ‘거란契丹’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거란契丹은 ‘키탄’을 표기한 것이다. 당시 거란은 동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해奚, 남쪽으로는 중국의 영주營州, 북쪽으로는 말갈과 실위에 맞닿아 있었다. 거란이라는 이름 처음 등장한 중국 사서 《위서魏書》에 따르면, 4세기 말 북위의 도무제道武帝가 군대를 보내 거란족을 토벌한 후 이들은 북위에 공납을 바치고 예속되었다. 당시 거란족이 살던 지역을 중국인들은 ‘송막松漠’이라고 불렀는데, 소나무 숲과 사막이 있던 지역인데 사막이라기보다는 풀들이 자라는 초원이 있었다. 주변에는 ‘황수潢水’라 불린 시라무렌강이 있었다. 시라무렌강은 요하遼河의 상류다.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를 거쳐 10세기 초까지 거란은 세력이 미미한 변방의 부족이었다. 당나라 초기에 당은 이 지역에 송막도독부를 설치하여 거란족을 통치하였다.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 907~979)에 접어 들면서 당이 혼란에 빠지자 질랄부迭剌部의 수령인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8개 부족을 통일하여 거란의 우두머리인 가한可汗이 되었다. 주변의 해奚, 실위室韋, 조복阻卜 등의 유목민 부족도 곧 정복하였다. 그러자 916년 야율아보기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다. 본래 거란의 8부족은 3년마다 연맹의 대표인 가한을 선출해왔으나, 야율아보기는 이런 체계를 바꾸어 나머지 부족들을 질랄부에 복속시키고 자신을 황제로 칭함으로써 거란부족 연맹을 세습군주제 국가로 만들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 2년 전의 일이었다.

야율아보기는 북방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지배하에 넣고 거란국을 선포한 직후 당시 만주 일대에 큰 세력을 펼치고 있던 대진국 즉 발해 원정에 나섰다. 발해 원정은 짧고 빠르게 끝났다. 925년 12월 거란군은 발해를 기습공격하여 한 달만에 발해의 수도 홀한성을 함락하였다. 야율아보기는 정복한 발해 땅에 동단국東丹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태자인 야율돌육에게 인황왕人皇王이라는 칭호를 주어 그 왕으로 앉혔다. 야율돌육은 중국사서에서는 야율배耶律倍로 나오는데 성품이 부드럽고 독서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야율아보기가 발해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제위 계승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결국 야율배는 동생 야율요골에게 황제의 자리를 빼앗기고 투르크계 사타沙陀족이 세운 후당後唐으로 도망쳤다.

야율요골은 야율덕광으로도 불리는데 묘호로는 거란의 태종(재위 927-947)이다. 태종은 형과는 달리 사냥을 좋아하고 전투에 능한 인물이었다. 당시 후당의 하동절도사 석경당石敬瑭이 후당 황제의 인사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생각으로 거란에 도움을 요청하자, 태종은 5만 기병을 이끌고 중원으로 쳐들어가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後晉(936-946)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태종은 사타족 출신의 무장인 석경당을 그 왕에 앉히고 대가로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할양받았다. 연운십육주는 오늘날 텐진으로부터 다퉁에 이르는 지역으로 하북성과 산서성을 일부 포함한다. 옛 연나라 땅과 운중현 지역에 위치한 곳이라 그렇게 불렸다. 이후 태종은 국호를 거란에서 중국식 국명인 ‘대요大遼’로 바꾸었다. 거란의 본거지가 요하 근처에 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960년에 건국된 송나라는 979년, 거란과 송 사이에 완충 역할을 하던 산서성 지역의 북한北漢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연운십육주를 수복하기 위한 공격에 나섰으나 거란군에 패배하였다. 송이 연운십육주 회복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자, 1004년 요나라의 성종은 2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벌南伐’ 즉 송나라 원정에 나섰다. 송나라는 중원에 요나라 군대가 들어오자 싸우는 것을 멈추고 협상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체결된 협약이 중국사에서 유명한 ‘전연澶淵의 맹약’이다. 전연은 황하 북변의 도시로 오늘날 허난성 푸양시에 위치한다. 이 조약에서 송나라는 요나라에 군비지출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보내기로 약속하였다. 사실상 조공이었다. 또한 황하를 경계로 삼고 송과 요는 형제관계를 맺는다고 하였다. 당시 송의 진종眞宗이 요의 태종보다 나이가 많아 형이라 하였지만, 이는 송이 거란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연의 맹약 이후 거란은 더 이상 송의 영토를 넘보지 않았다.

한편, 거란의 서쪽에는 서하西夏가 있었다. 오늘날의 칭하이성과 간쑤성 그리고 싼시성(섬서성) 일대에 걸쳐 있었던 나라로 티베트계의 탕구트(黨項)족이 세운 나라였다. 서하의 뿌리는 당나라 말기의 탁발사공拓拔思恭이라는 인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탁발’이라는 성을 사용하면서 자신이 선비족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티베트계 출신으로서, 명망이 높은 탁발씨를 자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황소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당 왕실의 성인 이씨를 하사받고 하국공夏國公에 봉해졌다. 오대십국시대에 들어와 그의 자손들이 스스로 왕을 칭하였는데 역사에서는 이 나라를 ‘서쪽에 있는 하나라’라는 뜻으로 ‘서하西夏’로 부른다. 그 통치왕가가 티베트계였지만, 서하는 한족과 위구르족을 포함한 다민족국가였다.

서하를 건국한 이원호李元昊(재위 1038-1048)는 국명도 거창하게 ‘대하大夏’라고 하고 황제를 칭했다. 송나라는 이를 무척 불쾌해하여 매년 서하에 보내주던 은과 비단, 차 등의 세사歲賜를 중단하고 국경지역에서 이뤄지던 호시互市(공식적인 국경 무역장)도 폐지해버렸다. 송의 이러한 경제적 압박은 효과를 거두어, 결국 대하는 신하의 나라가 되라는 송나라의 요구를 수용했고, 그 대신 송은 서하에 세사 지급을 재개했다. 요나라도 서하와 때로는 전쟁을 벌였지만 서하를 정복하려 하지는 않았다. 송나라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서하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려와의 관계

거란은 송과 서하뿐 아니라 동남방으로는 고려와도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고려가 건국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22년, 거란은 사신을 파견하여 낙타와 말, 모직물을 선물로 보내왔는데 고려가 이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로부터 20년 뒤인 942년, 거란은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낙타 50마리를 보내왔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친선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하면서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는 모두 굶겨죽였다. 이는 거란 입장에서는 엄청난 도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거란은 중국방면 사정이 급했는지 고려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980년대에 들어 발해 유민들의 발해 부흥운동이 본격화하면서 거란은 이 지역 정세에 민감해졌다. 발해 유민들은 후발해와 정안국定安國 등을 세워 발해를 부활하려 하였으며 송과 고려를 포함한 반거란 동맹을 추진하였다. 고려는 거란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이에 거란은 고려를 잠재적 위협으로 보기 시작했다.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80만 대군 — 실제 병력은 이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이 고려를 침공했다. 이는 송과의 전쟁을 준비 중이던 거란이, 송과 손잡을 가능성이 있는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려를 정복할 뜻은 없었기 때문에 청천강 근처의 안융진 전투 후 고려에 회담을 제안하였다. 고려의 서희가 나서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그 결과 고려는 거란을 상국으로 섬기기로 하고 그 대신 거란은 당시 여진족이 살고 있던 강동6주를 고려에 넘기기로 합의했다. 고려는 회담 후 곧 여진족을 소탕하고 강동6주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거란의 연호를 시행하고 혼인동맹도 제안하였다.

1004년 전연의 맹약으로 거란과 송의 평화적인 관계가 확립되자 거란은 고려가 차지한 강동6주를 다시 빼앗고자 하였다. 강동6주 지역에는 교역을 위한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이러한 시장은 ‘각장榷場’이라 하여 당국의 통제하에 거란, 여진 등 북방민족과의의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거란은 고려가 각장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것이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2차전쟁의 한 원인이었다. 물론 거란이 내건 명분은 강조康兆가 고려의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옹립한 죄를 묻겠다는 것이었다. 강조가 30만의 고려군을이끌고 성종이 직접 지휘하는 40만 거란군에 대항하였지만 패배하였다. 거란군은 개경을 일시 점령한 후 고려가 강화를 요청하자 현종이 직접 거란에 가서 항복하는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철수하였다.(1011년) 그러나 고려 현종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송나라와 다시 외교관계를 맺자 거란은 1018년 3차침공을 하였다. 거란은 이번에는 개경을 점령하지 못했으며 강감찬 장군의 반격으로 귀주에서 큰 패배를 당하고 물러났다. 이 전쟁 이후 거란이 여진족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고려와의 관계도 정상화되었다.

 

거란의 통치체계와 멸망

거란은 몽골초원으로부터 황하 이북과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서쪽으로 고비사막 일대에 걸친 넓은 영토를 지배하였다. 그 지배하에 들어간 족속으로는 한족은 말할 것도 없고 발해인, 해족奚族 등이 있었다. 해족은 고막해庫莫奚라고도 불리는 선비족 계통의 유목민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해를 투르크계라고 보기도 한다) 생활방식이나 문화면에서 거란과 가장 가까운 족속이었다. 발해인 가운데에는 고구려계뿐 아니라 말갈족의 후손인 여진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진족은 유목보다는 수렵과 어로를 위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족속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거란은 태조 야율아보기 때부터 ‘인속이치因俗而治’ 즉 각 족속의 전통적 제도를 존중하여 다스린다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는 행정면에서는 체계로 구성되어, 정착민인 한족과 발해인의 통치를 위한 남면관南面官과 거란 및 유목, 수렵 민족의 통치를 위한 북면관北面官 제도로 나타났다. 남면관은 도성의 남쪽에 설치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인데 중국식 행정기구들이 설치되었다.

거란은 족속에 따른 통치를 염두에 두고 다섯 개의 수도, 즉 오경五京도 설치했다. 거란족의 본거지에는 상경 임황부가 세워졌으며 그 뒤를 이어 동경 요양부가 발해 지역에 세워졌다. 동경 요양부는 한족과 발해인들을 다스리기 위해 요동 지역에 세워졌으며, 고려와의 분쟁에 대비하는 군사적 요충지 역할도 하였다. 중경 대정부는 내몽골의 해족 거주지역에 세워졌다. 남경은 유도부幽都府라 하여 오늘날의 북경(베이징) 지역에 세워졌다. 베이징 지역이 예전에는 ‘유주幽州’라 불렸기에 그 이름을 딴 것이다. 서경은 사타족의 통치를 위해 설치되었다. 오경은 한꺼번에 설치된 것은 아니고 필요에 따라 순차적으로 설치되었는데, 가장 마지막으로 세워진 서경 대동부는 건국으로부터 120년이 흐른 1044년에 오늘날의 산서성 다퉁 지역에 설치되었다.)

거란은 송과 고려, 서하와 때때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만주의 여진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거란의 마지막 황제인 9대 천조제天祚帝(재위 1101-1125)는 여진족에게 해동청(매), 진주, 담비가죽 심지어 미녀까지 바치라는 요구를 하였다. 옛 흑수말갈의 후예인 생여진生女眞의 완안부 출신인 아골타가 이러한 가혹한 요구에 분노한 여진족을 규합하여 1115년 금나라를 세우고 거란을 공격하였다. 천조제는 여진의 공격을 물리칠 수 없자 장춘과 요동을 넘겨주고 매년 은과 비단 25만 냥을 바치는 조건으로 강화를 하였다.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아골타는 송나라와 손잡고 요나라 상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천조제는 서쪽으로 도주하였고 남경의 신하들은 거란 7대 황제의 손자인 야율순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였다. 천조제는 친왕親王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연운16주, 요서 및 요동 등 야율순의 통치하에 있던 지역은 ‘북요北遼’라 불렸다. 야율순이 즉위한 지 백일도 되지 않아 병사한 후 송의 휘종은 군대를 보내 남경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곧 아골타의 금나라 군대가 남경으로 들이닥치자 야율순의 부인이었던 섭정 덕비와 당시 군대를 지휘하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달아나 천조제를 서하 변경에서 만났다. 그러나 천조제는 덕비를 죽이고 야율순의 이름도 황족 명부에서 지워버렸다. 그는 병력도 없는 상황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려는 무모한 고집을 부렸다. 1125년 금나라의 공격으로 도주하던 천조제는 금나라 군대에 붙잡혀 금의 중도中都에 구금되었다. 오늘날의 베이징시 지역인 중도에는 송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흠종도 붙잡혀와 있었다. 두 사람은 격구(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경기) 시합을 벌였는데 흠종은 낙마하여 말들에 밟혀죽고 천조제는 그 틈을 타서 도망치려다 금나라 군의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카라 키타이

거란제국의 치욕스런 멸망 과정에서 야율대석이라는 인물이 눈에 띈다. 그는 거란 황족 출신으로 야율아보기의 8대손이다. 젊었을 때부터 중국의 학문도 익혀서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한림원의 승지가 되었다. 그때는 아굴타가 금나라를 세우던 시기였다. 문관이었지만 북요北遼 시기에는 해족 출신 장군 소간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의 침공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금나라 군대에 의해 남경이 함락되자 그는 7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천조제를 만났다. 천조제가 금나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고 무모한 고집을 부리자 야율대석은 그를 떠나, 자신을 따르는 수백 명의 무리를 데리고 고비사막을 건너 천산지역의 베슈발리크로 왔다. 그곳에서 야율대석은 위구르, 몽골의 메르키트, 옹기라트 등 여러 부족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는 ‘구르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몽골어로 ‘사해四海의 군주’라는 뜻이다. 아마 다양한 족속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 칭호를 사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야율대석은 처음에는 유목민 출신의 기마부대를 이용하여 금나라에 빼앗긴 거란의 옛 영토를 되찾으려 하였으나 이는 가능성이 낮았다. 서쪽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그는 당시 투르판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위구르족 왕에게 사신을 보내 대식국(이슬람제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고 하였다. 위구르 왕 빌게 카간의 협조로 야율대석은 서쪽의 카라한 왕국으로 진격하여 카라한 왕국의 동부 수도 발라사군을 점령하였다. 당시 카라한 왕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카를룩 및 캉글리 같은 투르크계 부족들이 야율대석을 도왔다. 야율대석은 곧 여세를 몰아 서카라한 왕국도 공격하였고, 이에 서카라한 왕국은 셀주크 투르크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야율대석의 군대와 셀주크 제국의 군대가 충돌하였다. 싸움이 일어난 지역의 명칭을 따라 ‘카트완 회전’(1141년)이라고 부르는 이 전투에서 야율대석은 셀주크 투르크 군대를 격파하고 그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 패전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에서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하게 된다.

야율대석은 아랄해 인근의 호라즘도 공격하여 조공을 바치게 만들었다. 호라즘은 공식적으로는 셀주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반독립적 왕국으로, 호라즘의 왕 즉 호라즘 샤는 셀주크 술탄의 총독으로 지배하였다. 카트완 회전 이후 파미르 고원 동쪽의 위구르 왕국은 말할 것도 없고 카라한 왕국과 호라즘이 모두 그의 속국이 되었다. 투르크족의 지역 즉 투르키스탄 전역을 장악했던 이 야율대석의 나라를 중국인들은 서쪽으로 간 요라는 뜻에서 ‘서요西遼’라 하였지만 이슬람인들은 ‘카라 키타이’라 불렀다. ‘검은 키타이’라는 뜻인데 야율대석의 군대가 내건 깃발이 검은색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또는 요나라가 숭상하던 오행五行의 수水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1157년 셀주크 술탄인 산자르가 사망하자, 당시 호라즘 샤였던 일 아르슬란은 호라즘의 영토를 급속히 확대하여, 카라 키타이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야율대석의 후계자들은 그리 유능하지 못해서 13세기 초에는 호라즘으로부터 조공도 더 이상 받지 못하고 결국 야율대석의 손자인 야율직고로 때 카라 키타이는 멸망하고 말았다. 무능한 인물인 야율직고로는 몽골의 나이만족 출신인 쿠츨루크를 사위로 삼았는데 쿠츨루크는 장인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 카라 키타이의 마지막 지배자가 된 쿠츨루크는 이슬람교도를 탄압하고 불교를 강요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1218년 몽골 군대가 카라 키타이를 공격하자 억압받던 회교도들은 몽골에 기꺼이 협조하여 도망가던 쿠츨루크를 잡아 몽골군에 넘겨주었다. 이로써 카라 키타이 즉 거란제국의 후예는 먼 중앙아시아에서 그 명을 다하고 이제 몽골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카라 키타이는 거란족과 한족, 위구르와 카를룩 등의 투르크족 및 몽골계 부족 등 다양한 족속들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였다.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있었던 만큼 주민 대다수는 회교도였지만) 카라 키타이 왕조는 요나라 왕조처럼 불교를 숭상하였다. 소수파인 불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은 왕조의 보호를 받았다. 그곳의 기독교도들은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에서 일어난 네스토리우스 교회 소속으로서 몽골족에 대한 전도에 열심을 내어 몽골의 케레이트와 나이만 부족 가운데서 많은 신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카라 키타이의 지배를 받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족속들과 주변의 아랍인들은 동아시아에서 온 카라 키타이 왕조를 중국 왕조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중국을 ‘키타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명칭은 주변의 여러 족속들에게 전파되어 오늘날 러시아어와 페르시아어에서는 여전히 중국을 ‘차이나’가 아니라 ‘키타이’라 부른다. 거란의 나라 키탄 즉 키타이는 이렇게 중국을 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또 십자군 시대 유럽에 전해져서는 ‘카타이’가 되었다. 오늘날 홍콩에 본부를 둔 유명한 항공회사 캐세이퍼시픽(Cathay Pacific) 사의 이름은 그 연원을 따라 올라가자면 거란족으로부터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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