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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은 어떤 책인가?
동서양에 전해오는 고전은 수두룩하다. 인류는 고통에 허덕일 때마다 힘든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고전에서 익혔다. 고전은 삶에 찌들어 심신이 고달픈 자에게 마음을 맑게 하고, 힘을 불어넣는 충전기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고전이 고전일 수 있는 이유는 문화와 역사의 길라잡이를 온전히 수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읽기 쉬운 고전이 어디 있으랴마는 『주역周易』은 가장 난해한 책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주역』에서 우러나오는 여러 감동 중의 하나는 인간 주체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논리의 간결성, 또는 도덕적 가르침을 넘어서 생명의 본원인 천명에 대한 소통 방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역』이 말하는 인간의 소통 대상은 자연과 역사와 인류사를 지배하는 하늘의 의지를 비롯하여 성인의 고매한 학덕과 인품으로 압축될 것이다.
『주역』을 삶의 모범 답안으로 인정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오히려 세계를 밑바닥에서부터 사유하고 때로는 인생의 질곡을 구제하려는 성현들의 숭고한 고뇌와 실천 의지를 읽고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역사에는 인생의 온갖 고초를 겪은 다음에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남긴 문화 영웅이 숱하게 등장한다. 예컨대 주나라 문왕文王(?-?)은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주역』을 지어 이후 동양철학의 향방을 결정지었고, 맹자孟子(BCE 372-BCE 289) 역시 수많은 역경을 거친 군자만이 역사적 사명을 맡을 수 있다는 불후의 명언을 남겼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면 반드시 먼저 심지를 괴롭히고, 근육과 뼈를 수고롭게 하고,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아무것도 없게 해서 하는 일이 해야 할 일과 어긋나게 만드니 마음을 움직이고 본성을 인내하게 하여 불가능한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이다.[天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不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孟子』「告子」 上)
맹자의 말은 선비들이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용기를 북돋았던 글귀다. 만일 현실의 고통이 없었다면 주옥같은 작품들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주역』「계사전繫辭傳」은 우환의식憂患意識을 바탕으로 『주역』이 씌어졌다고 말했겠는가? 좌절과 실패는 성공을 담보하는 열쇠라는 교훈이다.
예로부터 동양인들은 『주역』을 형이상학과 정치철학, 윤리관을 수립하는 근거를 비롯해 사주명리의 이론적 전거를 제공하는 점치는 용도 등 다양한 방면으로 응용하였다. 『주역』은 사서삼경四書三經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고전이다. 우리나라 성인 중에서 『주역』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주역』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서양인들은 『주역』을 말 그대로 “변화의 원리를 다룬 책(The Book of Change)”이라고 번역한다. 만물의 보편 법칙이라는 뜻의 ‘주역’에는 변역變易(changing), 불역不易(non-changing), 이간易簡(easy and simple)이라는 세 가지의 근본 이치가 있다. 우선 바뀔 역易이라는 글자 자체가 날 ‘일日’ 자와 달 ‘월月’ 자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밤과 낮은 끊임없이 바뀌어 하루와 한 달을 만들어낸다. 밤과 낮의 규칙적 교체는 일월의 운행에 의해 빚어진다. 그러므로 계속 변화하면서 마침내 크게 변혁한다는 뜻이 곧 ‘변역’이다.
하지만 변역 속에는 바뀌지 않는 일정한 원칙이 있다. 예컨대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객관적 자연), 부모와 자식간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불변의 이치(윤리도덕)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만고불변의 이치라는 의미에서 ‘불역’이라 부른다. 옛사람들은 만물을 빚어낸 부모를 하늘과 땅으로 인식했다[天地父母]. 그리고 하늘땅[天地]은 쉽고[易] 간단한[簡] 법칙으로 만물을 일궈내고 생명을 영속시키는 ‘이간’의 원리를 소중하게 여겼다. 이것이 바로 주역의 세계를 이해하는 3대 명제로서 변화와 불변과 이간의 법칙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불변과 이간의 원리를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곧 음양론이다. 만물의 모체인 하늘과 땅 자체가 음양陰陽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유형과 무형의 형태를 띤 만물 역시 음양의 이치에 의거하여 생성변화하므로 음양을 바탕으로 이 세상이 움직이는 패턴을 설명한 것이 바로 음양오행론이다. 더 나아가 음양이 동서남북[空間]으로 확대하는 운동방식을 간단한 도표로 압축한 것이 8괘(복희팔괘와 문왕팔괘)이며, 또한 시간과 공간이 음양오행으로 결합하여 만물이 생성변화하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시스템화 한 설명이 바로 하도낙서河圖洛書다. 이런 의미에서 하도낙서는 천지창조의 이상과 꿈과 목적을 수록한 설계도라 할 수 있다.
동양철학에서 『주역』이 차지하는 위치는 학문의 최고 원리가 담겨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시대와 더불어 꾸준히 연구되고 발전되어 왔다. 지금도 『주역』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어 있다. 현대과학, 철학, 의학, 문학, 고고학, 민속학, 언어학, 인류학, 건축과 조경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연구방법은 물론 결과도 다양한 학설과 응용 방안으로 나타났다.
일찍부터 『주역』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과 더불어 동양학의 뿌리가 되는 경전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명나라에서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이 과거시험의 정식 과목으로 채택되자 『주역』은 더욱더 사서四書의 원형이 담긴 책으로 평가되어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되었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역』은 두 길로 걸어 왔다. 하나는 학술서이며, 다른 하나는 운명을 감정하는 생활주역으로서의 점서占書이다. 전자는 지식층의 ‘최고 이론서’로 이름을 날렸으며, 후자는 재야 학술의 사상적 뿌리로서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신의 의지를 헤아리는 ‘신서神書’로 알려지고 있다. 지식층의 입장에서 보면 후자는 『주역』에 대한 모독이요, 재야 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전자는 사변철학인 동시에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특수서에 지나지 않으며,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교과서에 지나지 않는다.
주역학은 학술과 점술이라는 평행선을 타면서 동양철학의 밑바탕을 이루었다. 세계는 수학의 질서로 이루어졌다는 시각에서 연구하는 상수학象數學과, 인간다운 삶에 대한 지침을 내린 지혜의 가르침으로 간주하는 의리학義理學이 학술계의 주류를 형성했다. 또한 이 둘을 함께 고려하는 학파도 형성되었다. 그리고 주역학은 이 세상을 도덕적 이상사회의 건설이라는 타당성과 당위성을 제시하는 형이상학을 지향했다. 이것이 바로 동양의 선비들이 삶의 지표로 여겼던 『주역』의 본질이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믿었던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역사는 일반 백성들의 바램과는 전혀 동떨어진 방향으로 굴러갔다. 특히 운명과 죽음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 『주역』을 이용하는 실용적 가치에 주목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일종의 학술서의 변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는 점술을 통해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상을 사회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주역』을 현대적으로 탈바꿈시킨 사업들이 벤처기업으로 급상승하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날마다 인터넷에는 『주역』의 현주소를 대변하는 글들이 쏟아진다. 제목도 거창하다. “점점占占 커져가는 ‘운세사업’ 년 수 조원 시장”, “한국인과 점占, 인터넷 운수사이트 200여 개 호황”, “대학에 관련학과 개설”, “무속 타운의 형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요즈음 대학가에서 『주역』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분위기는 인문학의 퇴조와 맞물리는 현상을 겪는다. 『주역』을 전공으로 공부하는 대학원생은 손가락으로 꼽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아예 한문에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반면에 『주역』을 현실 생활에 응용하려는 젊은 학생들은 전공에 상관없이 수두룩하다. 그들은 점술의 밑바닥에 허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무척이나 관대하다.
점占은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방향을 제시하거나 행동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불확실한 현실, 불안한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본능적 욕구가 있다. 한국인은 유난히 점을 좋아한다는 통계도 있다. 점을 본 뒤에 그 내용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에서 예언은 확신으로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생활 『주역』’이 아무리 일상과 친밀감이 있더라도 문화의 핵심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명백하고 객관적인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합리적 사유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고, 점술의 사회적 만연은 보편적 가치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치명적인 결함도 있다. 다만 일시적인 카운셀링의 효과로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리하르트 빌헬름(Richard Wilhelm: 1873-1930)에 따르면, “역경의 체계는 다차원 세계의 표상이다. 이 세계 내에는 불변하면서 규칙적으로 변화하는 패턴이 있다.” 또한 ‘역경은 우주에 대한 이미지’라고 했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쓴 조셉 니담(Joseph Needham: 1990-1995)은 『주역』을 “상황에 대한 과학(a science of situations)으로서 괘卦는 별의 운동과 시간의 경과를 체계적으로 관련지어 만들어졌다”고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현대철학자 모종삼牟宗三(1909-1995)은 “64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우주의 표상으로서 세상을 부호로 표시한다는 특성을 지닌다”고 말하여 우주론의 시각에서 『주역』을 연구하였다.
주역학은 자연과 역사와 인간을 종합적으로 다룬다. 이들 중 어느 한 분야만을 전문적으로 탐구하느냐에 따라 형이상학, 역사철학, 인간학으로 나뉘기도 한다. 또한 주역학은 문제 중심, 시대 중심, 인물 중심, 학파 중심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정역사상正易思想은 기존의 연구 방법에 대해 고별을 선언한다. 우리는 『주역』에서 『정역』으로의 방향 전환을 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