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 5

  1. 프라이부르크 대학, 나치의 유령

오후 4시쯤 다시 프라이부르크 도심으로 들어왔다. 어제처럼 거리를 오고 가는 많은 젊은이들의 활기, 광장과 맥주집을 메우던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내일은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다. 도심 광장에 있는 대학 본관 건물(KG 1)에 들어섰다.

그림 1 프라이부르크 대학 본관(KG 1). 건물 중앙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라’가 적혀 있다.

 

그림 2. 프라이부르크 대학 Aula 강당

 

한 굽이 들어서니 대형 홀이 나온다. Aola(강당)이다. 하이데거가 이곳 대학에 교수로 취임하면서 또 총장에 부임하면서 기념 연설을 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1928년 스승인 후설의 후임으로 이 대학 교수로 초빙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란 취임 강연을 하였다. 인간 본질이 무로의 초월에 있음을 밝히는 것이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특정한 ‘무엇’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 기본으로서의 불안 속에서 존재자 전체는 지금까지의 친숙함에서 무차별함 혹은 ‘아무래도 상관없음’에로 밀려 나간다. 그 밀려나감에서, 그와 함께 ‘아무 것도 아님’(Kein), ‘무’(Nichts)가 우리에게 닥치며 머문다. 이것이 무의 본질, ‘무화’(Nichtung)이다. 이러한 무화에서 존재자는 “이제까지 가려져 있던 완전한 낯설음에서, 무에 대한-단적인 타자로서,” 곧 무가 아니고 오히려 존재하는 존재자로서 드러난다. 즉 존재자의 존재가 불안의 근거 위에서 무 안에 들어서, 무를 견디는 우리들 자신에게로 비은폐되는 것이다. 무는 존재를 가리는 베일이며 무를 향한 인간의 존재는 곧 존재의 진리로 나가 있음[실존; 탈자脫自]이다.

그의 이같은 요지의 강연은 서구 지성에게 수상쩍은 것이다. 플라톤 이래 빛과 드러남의 세계에 집중하는 서양 전통 철학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빛이고 밝음만큼 존재한다. 반면 존재의 타자인 무는 어둠이며 은닉이며 비가지적非可知的인 것이다. 절대적 결핍이란 의미에서 사악한 것이기도 하다. 일부 청중의 귀에 하이데거의 강연은 허무주의적으로 들리거나 부조리한 소리였다. 또 어떤 이들은 무 주제가 친숙한 동아시아의 텍스트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나 의심했다. 그러나 기존 철학을 해체하며 독특한 수사修辭로 채워지고 주장보다 사태 자체의 기술에 바탕한 그의 강연은 부정적 반응을 압도했다. 그의 강연은 프라이부르크대 강사 시절부터 이미 청중을 사로잡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 Georg Gadamer)같은 목격자들은 이때 이미 젊은 강사(하이데거)에게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마치 “흥분제”와도 같은 구실을 한 매혹적인 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대개 이른 아침에 열리는 그의 강의 때면 사람들의 눈들이 커졌다. “분명 아리스토텔레스가 밀고 들어왔으며, 응집된 짙고 어두운 문장의 구름들과 그로부터 번쩍이는 섬광들은 우리들을 반 마비 상태로 만들었다.”

하이데거는 1943년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4판을 출간하면서 후기를 추가한다. 그 가운데 다음의 내용은 향후 그의 사유가 걸어갈 방향을 예고한 것이다.

존재자 전체에 대해 단적으로 다름은 존재자아님(das Nicht-Seidende)이다. 그러나 이 무는 존재로서 현성한다(wesen). 만일 우리가 진부한 설명 속에 무를 단순히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본질 없는 것으로 동일시한다면 지나치게 성급하게 사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한 공허한 예리함의 섣부름을 따르고 수수께끼 같은 무의 다의성을 포기하는 대신 무에서,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도록 수락하는 것[존재]의 영역성(Weiträumigkeit)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준비를 갖춰야 한다.”

존재가 존재로서 있는 의미를 묻는 하이데거 물음은 여러 사유의 길과 체류지를 거치며 존재가 존재로서 현성하는 장을 묻는 존재의 위상학으로 완성됐다. 이때 ‘영역’이나 영역의 사유, ‘위상학’은 그가 거쳐 간 사유의 사태들이 한 자리에 본질적으로 불러 모여 있다는 의미로의 완성이며 종말이다. 다시 말해 저 위 인용문처럼 아직은 모호한 가운데 그때그때 뿌려둔 종자들의 수확이다.

하이데거는 1933년 나치가 권력장악에 성공하던 해, 나치에 의해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된 전임 총장의 간곡한 권유로 총장직을 수락한다. 그리고 취임 연설인 「독일 대학의 자기 주장」에서 대학의 독립을 위해 교수와 학생 스스로가 대학의 안정과 쇄신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러나 다음해인 1934년 임기 9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총장직에서 사퇴한다. 그럼에도 1933년 그가 보인 정치적 판단은 그에게 재앙으로 변한다. 1946년 하이데거는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을 점령한 프랑스의 군정당국에 의해 친親나치 혐의로 무기한 교직 금지 처분을 받는다. 1949년 7월 당국은 최종적으로 하이데거와 나치 관계를 ‘복종 없는 동행자’로 결론짓는다. 2년 뒤 복직이 허락되지만 퇴임교수 신분으로서의 복귀였다. 그는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하고 교수직에서 완전히 물러난다. 그 후 그는 대부분 강연이 그 목적이던 몇 차례의 여행을 제외한다면, 25년 동안을 완전히 프라이부르크의 자신의 집이나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에서 칩거한 채 은둔 속에서 보낸다. 그는 토트나우베르크의 산장 앞에서 불을 피우며 “밤의 불길 옆에서 깨어 있음”이라든가 “오두막 주위에 바람이 사나워지고 눈이 흩날릴 때 철학자의 시간이 온다.” 등과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그림 3 프라이부르크 철학과 도서관. 하이데거 전집도 보인다.

 

그림 4 독립된 후설 문고가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게 독특했다.

 

“아마도 제3제국에서의 하이데거 역할이 또한 그를 기념하는 대학 문화에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독일 제3제국은 히틀러와 그가 이끌던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약칭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시기(1934∼1945)를 말한다. 프라이부르크 대학 방문 안내 담당이 하이데거 기념물이나 공간을 묻는 나에게 보낸 회신에서 하이데거에 대한 충분한 정보의 결여를 얘기하며 밝힌 내용이다. 철학부와 철학과 도서관이 건물 내 1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하이데거 흔적을 찾기란 어려웠다. 방문 시간이 짧았는지도 모르겠다. 철학과 도서관에는 고대 희랍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철학자들의 전집과 중요한 도서들이 비치돼 있었다. 하이데거의 전집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이를테면 하이데거 서고를 따로 만든다든지 하는 등의 하이데거에 대한 특별한 대접은 없었다. 도서관의 도서 정리 관점에서 보면 하이데거는 철학과가 확보해야 할 주요 사상가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의 스승이자 전임 교수인 후설의 위상은 사뭇 달랐다. 따로 후설 서고가 마련돼 있었는데 교수 연구실 4개를 더한 것보다 커보였다. 예상치 못하게 한 철학과 교수 연구실 문 앞 게시물에서 비록 ‘하이데거’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의 자취를 볼 수 있었다. 독일을 방문한 미국의 한 철학 교수의 강연을 알리고 있었는데 그 제목이 ‘존재와 시간으로부터 민족 사회주의로의 길은 있는가?’였다. 복도에서 만난 한 중국인 유학생에게 하이데거를 언급했을 때 그의 제법 긴 대답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한 마디만은 또렷이 들렸다. ‘나치오날소치알리스티쉐’. 도대체 2차 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승리자의 편에서 또 그들 자신의 손으로 과거사 청산이 얼마나 가혹하게 이뤄진 걸일까? 여전히 독일 시민, 특히 지식인은 나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다소 답답한 마음으로 건물을 나와 선물 사러 간다는 모녀와 떨어져 혼자서 또 하나의 하이데거 기억을 혼자 찾아 나섰다. 하이데거가 자주 가던 카페 하우저(Café Hauser)이다. 미리 찾아본 주소는 ‘Kaiser-Joseph-Straße 237, 79098 Freiburg im Breisgau’였다. 때로 혼자서 때로 동료나 제자 혹은 연인과 어울려 차를 마시며 대화와 여흥을 즐겼을 것이다. 맵 어플에 서투른 사람이 그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여러 번 소득 없는 물음 끝에 임자를 만났다. 위치를 묻은 내 물음에 한 청년이 옆에 있던 여자 친구에게 나를 넘긴다. 그녀가 이곳 토박이란다. 그녀는 자신 있게 그 번지수의 골목을 가리켜 준다. 바로 옆이다시피 한 그 곳은 우리 일행이 어제 슈바인스학세와 슈니첼을 먹던 식당이 있는 골목이다. 골목에 접어드니 과연 벽에 235, 236, 237번지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하면서 233, 235, 236번지를 지나 237번에 이르렀다. 그 식당이다. 알고 보니 1989년도부터 이곳에서 가게 문을 열어 성가를 얻으며 지금까지 영업을 해오고 있었다. 하이데거가 자주 갔던 같은 번지의 카페 하우저는 훨씬 전에 아니면 식당이 들어서던 1989년에 문을 닫았는지 모르겠다.

그림 5 교수 연구실에 붙은 강연 공고. 강연의 제목은 ‘존재와 시간으로부터 민족 사회주의로의 길은 있는가?’였다.

 

그림 6 하이데거가 자주 가던 카페 하우저는 마르틴스 브로이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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