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역』에서 『정역』으로
정역사상은 선후천론에 입각한 매우 독창적인 역학易學이다. 정역사상은 일부一夫 김항 金恒(1826-1898)이 살던 당시는 물론 지금도 주역사에 나타난 수많은 학파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정역사상은 우주와 시간의 수수께끼를 낱낱이 풀어헤친 형이상학이다. 『정역』은 김일부 개인의 각고의 노력에다가 하늘에서 계시받은 내용을 써놓은 것이다.
정역사상의 주제는 선후천론과 시간론이다. 선후천론과 시간론의 핵심을 다루었다고 무조건 획기적인 사상이 될 수는 없다. 자연과 문명과 인간과 역사의 문제를 근거지우는 시간의 핵심을 근본적으로 사유했기 때문에 과거의 주역학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김일부는 한말의 유명한 사상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정역』은 충청도 연산땅 인내 강변에서 태어나 말 없는 하늘의 명령[天命]를 깨닫고 가슴에 벅차 눈물을 흘리며 쓴 책이다. 이 세상에 『정역』이 처음으로 출생신고를 한 것이다. 그것은 당시 한양의 종이 값을 올렸던 베스트셀러가 아니다. 정역사상은 시간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제친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 형이상학이자 동서양 시간론을 융합한 꽃이다.
『정역』은 김일부가 남긴 단 하나의 저술이다. 그것은 과거의 형이상학을 매듭짓고, 미래의 창조적 비젼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최종의 역易을 완수했다는 점에서 학술의 위대한 가치가 있다. 복희역과 문왕역에 숨겨진 원초적 대립과 갈등과 모순을 해소시키는 열쇠인 정역괘를 완성함으로써 인류사의 신기원을 마련했던 것이다.
김일부는 단순히 자연질서의 대변혁만을 외친 사상가가 아니다. 『정역』은 종교와 철학과 과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통합의 정신을 강조한다. 인간 삶의 궁극적 가치로서 도덕[天‘道’地‘德’]의 근거인 하늘과 땅의 문제를 회통의 정신으로 융합했던 것이다. 얼핏보기에 『정역』은 이념성이 강한 담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념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칫 이성적 사유에만 겉도는 관념론의 형태를 띠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정역』에 담긴 내용들은 바로 우리 역사 현실에 구현된다는 구체성, 즉 실재實在[=天道]와 현상現象[=地德]이 결혼하는 ‘하늘은 생명을 낳고 땅은 완수한다[天生地成]’의 근본적 이치를 해명한 점이 압권이다. 현재 김일부와 정역사상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제대로 아는 이는 아주 드물다. 아쉽게도 정역사상의 실상이 있는 그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어 매우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정역』의 근본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면서 오늘의 시대정신에 부합하고,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옮겨진 해설서다운 해설서가 없다는 것이 첫 번 째 원인일 것이다. 그러니까 『정역』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손에 잡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한결같이 대답한다.
『주역』 전공자들의 말을 빌리면, 『정역』은 가까워 하기에는 너무 먼 학문이라고 푸념한다. 보물이 보물 대접받도록 하는 기초 작업이 시급하다. 『정역』은 어느 한 사람만의 독점물일 수 없다. 혼자만 알고 감추는 전유물에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하는 사상인 것이다. 그만큼 대중화가 절실하다는 뜻이다.
조선조 말에 성립한 정역사상을 외형으로만 보면, 너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김일부선생 서거 100년이 지난 지금, 정확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여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해야 하는 지를 점검해야 마땅하다. 또한 새로운 프로젝트가 기획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선배들의 업적이 전혀 쓸모없다는 말은 아니다. 1세대 제자(김황현金黃鉉ㆍ김방현金邦鉉ㆍ김홍현金洪鉉 형제들, 하상역河相易, 염명廉明, 이상룡李象龍, 김영곤金永坤) 등, 2세대 제자들(이정호李正浩), 3세대 제자(한동석韓東錫, 유남상柳南相, 권영원權寧遠) 등은 그 공덕과 역할이 컸다. 모두 소중한 분들이다. 우리는 선배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층 앞장서 나가야 하는 것이 후배의 떳떳한 도리일 것이다.
우선 1세대 제자들의 업적물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작업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김일부와 직접 호흡을 같이 했던 사람들의 책을 해명하는 작업을 통해서 정역사상의 실체와 김일부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정역의 핵심을 인식하는 것과는 별도로 정역사상과 연관된 사이드 스토리(side story), 비하인드 스토리(behind story), 그라운드 스토리(ground story)를 차곡차곡 발굴하는 일도 중요하다.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한문투의 문장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이성과 감성을 종합하는 일이 대중화의 첩경이다. 더 나아가 김일부의 생애와 사상을 담는 “김항평전金恒評傳”의 저술도 시급한 과제다.
정역사상이 동학東學보다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외곽 세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상의 깊이와 폭이 동학의 그것과 비교해 손색이 없다는 것은 『정역』 자체와 선배들의 저술에 담긴 콘텐츠가 증명하고도 남는다. 다만 현대인들이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는 격으로 모르는 사람이 쫓아다니면서 배워야지 별 도리가 없다는 무책임한 발언은 예전에는 통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전국 대학교의 운영 시스템은 교수와 교직원 중심에서 학생 위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세일즈 시대인 것이다. 상아탑에서 고리타분한 교수는 설자리가 없다. 퀴퀴한 냄새나는 창고에 묻힌 서책이 아니라 팔딱팔딱 생기 넘치는 정역사상이어야 한다. 새장에 갇힌 정역이 아니라 AI문명을 선도하는 정역이어야 한다.
배우려는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직접 나서야 한다. 발상의 전환은 성공으로 나아가는 발판이다. 그래야만 『정역』의 대중화와 학문적 보편화도 가능할 것이다. 『정역』에는 무궁무진한 아이템이 가득하다. “나의 생각이 옳고 너의 주장은 그르다, 나는 선이요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편 가르기 식의 전달 방식”만을 고집하는 낡은 사고는 정역사상의 가치를 퇴보시키는 범죄에 해당된다. 더 이상 『정역』을 을씨년스런 초가집에 묻혀두지 말고 고풍스런 품격으로 리모델링한 ‘문화살롱’으로 모셔 부활시키자.
재야학자였던 김일부는 2,500년 동안 난맥상을 보이던 유교와 불교와 선교를 종합하여 현대적 의미에서 통합하였다. 『정역』은 일종의 과학철학, 종교철학, 수리철학을 종합한 융합의 학술이다.
서양 정신사를 뒤엎은 니체의 철학이 유럽을 송두리째 흔들어 이후의 예술과 인문학의 물꼬를 텃듯이, 동양의 정신사를 새롭게 장식한 『정역』이야말로 과거 동양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진리의 노른자다. 정역사상의 대중화는 학계와 문화계를 겨냥해야 한다. 우선은 학계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 위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것은 힘든 일이지만 반드시 해결하고서 넘어가야 할 『주역』에서 말하는 ‘이섭대천利涉大川’의 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