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史書로서의 《용비어천가》1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 즉 한글이 창제된 후 한글로 지어진 첫 번째 책이다. 모두 125장으로 되어 있는데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그중 1, 2장이 실려 있고 시험에도 자주 출제되어 많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기억할 것이다.

 

1장 : 해동 육룡이 날으시어 일마다 천복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

2장 :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므로 꽃 좋고 열매도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냇물에 이르러 바다에 가나니 (이윤석 역, 《용비어천가》 솔, 1997)

 

 

물론 이는 현대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고등학교 때 고문古文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라면 《용비어천가》 에 나오는 원래의 한글 고어 표기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글로 된 각 장에는 한문 번역문도 함께 실려 있다. 《용비어천가》는 모두 10권으로 제작되었다. 125장 분량의 시만 모으면 A4 용지 몇 장이면 충분할텐데 왜 10권이나 될까?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는데, 바로 《용비어천가》의 태반은 한문으로 된 ‘주해注解’라는 것이다. 1장과 2장은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내용이지만, 그 외 대부분의 장은 ‘사적事蹟’(역사의 발자취)에서 따온 것이라 시만 읽어서는 뜻을 파악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제26장을 보자.

 

동도東都에 보내시거늘 하리로 말린들 이곳 저곳에 뒷날 다르리이까

북도北道에 보내시거늘 글발로 말린들 가심 계심에 오늘 다르리이까

遣彼東都 沮以讒舌 於此於彼 寧殊後日

遣彼北道 尼以巧詞 載去載留 豈異今時

 

전반부의 동도東都는 중국의 낙양을 말하는데 누가 누구를 동도에 보냈는지, 또 누가 헐뜯어 그것을 말렸는지 이 시구만으로는 알 수 없다. (‘하리’는 헐뜯는다는 우리말이다) 후반부의 북도北道는 어디인지, 또 누가 누구를 북도로 보냈는지, ‘가고 머무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모두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집현전 학사들이 동원되어 이 시구의 이해를 위해 상당히 긴 해설을 덧붙였다. 물론 새로 만들어진 한글이 아니고 한문으로 된 글이다. 제26장의 주해는 당나라 태종이 형과 동생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는 이야기를 대단히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역사책에서 소위 ‘현무문玄武門의 변’(621년)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 이연李淵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황태자로 정해져 있었던 장남 건성, 후일 태종이 되는 진왕秦王 세민, 3남 제왕齊王 원길이다. 그런데 이세민은 형, 동생과 사이가 아주 나빴다. 원길은 건성과 손을 잡고 둘째 형 세민을 죽이려 하였다. 궁궐의 많은 비빈들은 건성과 원길의 편에 서서 세민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려 한다고 고조에게 참소하였다. 당시 각 왕자들은 자신들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무력충돌을 우려한 당고조는 세민을 낙양으로 보내버리려 하였다. 당시 수도는 서쪽에 있는 장안이었는데 낙양은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도東都라 하였다.

그런데 건성과 원길은 진왕 이세민이 낙양에 가면 그곳에서 세력을 키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보고 부친에게 글을 올려 동도로 세민을 보내는 일을 막았다. 그리고 후궁들과 함께 세민을 참소하면서 그를 죽이라고 하였다. 당고조 이연은 “세민이 천하를 평정하는 데 공이 있으며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당시 건성과 원길의 이러한 공작이 세민의 측근인 방현령, 장손무기, 울지경덕 등에게도 알려져 이들은 세민으로 하여금 선수를 치도록 설득하였다. 세민은 골육상잔을 꺼려 주저하였지만 결국 형과 동생을 죽이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궁궐 안에서 죽이고 원량元良(황태자)으로서 권력을 잡게 되었다. 건성과 원길의 자식들도 모두 죽였다.

제26장 시의 전반부는 당시 세민의 적들이 참소를 하여 진왕 세민으로 하여금 동도에 못가게 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집현전 학사들은 제26장의 주해에서 현무문 사태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해놓았지만, 후반부 시구 주해는 매우 간단하다.

고려 공민왕은 환조桓祖 즉 이성계의 부친인 이자춘을 삭방도朔方道 병마사兵馬使로 임명하였는데 이 결정을 고려의 어사대에서 반대하였다. 이러한 오사대의 반대는 이성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여자문제로 관리와 다투고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동북면의 의주宜州(오늘날의 원산 지역)로 이주하였다. 《용비어천가》에 ‘목조穆祖‘로 등장하는 그는 몽골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투항하여 몽골 백성이 되었다. 몽골제국의 몽케 칸은 그를 두만강 건너 지역인 오동斡東의 천호에 임명하였다. 고려인이 적국인 몽골의 고급관리가 된 것이다. 천호는 천 가구의 군민을 관할하는 직책으로서 별다른 잘못을 범하지 않으면 세습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이행리, 손자 이춘, 증손자 이자춘까지 모두 몽골의 천호 직위를 세습하였다. 이행리는 다른 천호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정착한 곳이 당시 몽골의 영토였던 쌍성총관부에 포함되어 있던 등주登州(함흥 지역)였다. 오동 지역에 살던 주민들이 그를 따라 내려와 함흥 일대에 정착하였다고 하니 이행리는 주민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호족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공민왕은 원나라가 약화되는 틈을 타 반원정책을 펼쳤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쌍성총관부를 되찾으려 한 것이다. 당시 쌍성총관부의 총관직은 고려계 관리인 조소생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자춘은 그와 사이가 나빴다. 이자춘은 몰래 개경으로 공민왕을 찾아와 고려에 투항할 뜻을 밝혔다. 쌍성총관부 내부의 이러한 협조를 바탕으로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쉽게 회복할 수 있었다.(1356) 이자춘이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고려의 공격에 가담했던 것은 물론이다. 이자춘은 그 공으로 종3품의 사복경司僕卿이라는 직책을 받고 개경으로 이주를 하였다. 몽골식 이름인 울루스부카를 사용하며 몽골의 고위관리로 살던 이자춘은 이제 고려인이 된 것이다. 이자춘은 이후에도 여러 높은 관직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삭방 도만호 겸 병마사의 직책이 있었다. 이는 쌍성총관부 지역을 총괄하는 무관직이었다. 오늘날 같으면 동부전선 군사령관에 해당하는 높은 직책이었다. 고려의 어사대가 몽골제국의 고위관리였던 이자춘이 고려의 안보를 지키는 동북면병마사가 되는 것을 반대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이자춘이 동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어 현지로 부임하자 예전부터 그를 따르던 여진계 주민들이 그의 명에 따라 고려로 넘어왔다고 한다. 《용비어천가》 제26장의 시 후반부는 어사대가 아무리 정교한 논리로 이자춘의 임명을 반대했더라도, 결국 후일 조선이 건국되는 흐름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용비어천가》는 앞의 1-2장과 뒷부분의 110-125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들은 모두 중국사에서 끌어온 사건들과 이성계와 그 아들 이방원 그리고 그 선조들의 이야기를 연결하여 만든 시구와 그를 해설하는 주해로 이루어져 있다. 주해에는 주나라를 세운 무왕과 문왕, 나라를 망하게 만든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 한나라를 세운 유방, 오호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부견, 수나라 문제와 양제, 당고조 이연과 이세민, 당나라가 무너진 후 벌어진 오대십육국 시대 후주後周의 이시영,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 등 많은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마치 중국사서를 읽는다는 느낌도 준다.

《용비어천가》의 끝부분에는 이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한 발문이 실려 있다. 1445년(을축년) 의정부의 우찬성 권제權踶, 우참찬 정인지鄭麟趾, 공조참판 안지安止 세 사람이 조선 건국의 신성함과, 이성계와 그 선조들이 백성들로부터 받은 얻은 신뢰와 큰 공적을 찬양하는 노래를 125개의 장으로 지어 바쳤다. 세종이 이를 보고 ‘용비어천가’라 붙였다. ‘육룡六龍’ 즉 자신의 부친 태종으로부터 6대조의 높은 공적을 찬양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 시들이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여러 명의 관리들이 투입되어 긴 주해를 작성하였다. 그 작업에는 집현전의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현로, 성삼문, 이개 그리고 왕실의 친인척을 관리하던 돈녕부의 강희안, 이조吏曹의 신영손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자치통감》을 비롯한 여러 중국 사서들과 조선의 《태조실록》 등을 참조하여 주해를 작성하였을 것이다. 주해에 등장하는 중국사의 여러 인물들을 보면 당시 집현전 학사들이 얼마나 중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지 짐작할 수 있다. 각 시에서 언급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주해가 상당히 자세하기 때문에 《용비어천가》 분량이 10권이나 되는 것이다. 필자가 참고한 이윤석 교수의 번역본은 주해의 원문은 수록하지 않았는데도 상하권을 합하면 850쪽에 달한다.

《용비어천가》는 한글로 지어진 최초의 책이기 때문에 국어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해왔다. 하지만 분량으로 보건대 사서에서 뽑은 주해가 99% 이상을 차지하므로 《용비어천가》는 역사서에 가깝다. 주해에는 지명이나 관직명 그리고 어려운 용어 등을 풀어 설명하는 할주割註가 매우 자세하게 붙어 있다. 집현전 학사들이 직접 작성한 할주들 중에는 사료로서 가치가 뛰어난 것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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