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남선(崔南善, 호는 육당六堂, 1890~1957)은 20세기 한국 지성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불과 17세의 나이에 ‘신문관新文館’이라는 출판사를 세워 근대 문화운동을 주도하였다. 신문관을 통해 《소년》(1909), 《청춘》(1914) 등 한국 잡지사의 기원을 이루는 여러 잡지뿐 아니라 역사와 문학, 지리 및 서양 사정을 다룬 다양한 서적을 출판하였다. 이어 1910년에는 ‘조선광문회朝鮮廣文會’를 조직하여 한국 고전 간행 사업을 벌임으로써 한국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알리는 일에도 힘썼다.
육당은 출판인으로서뿐 아니라 역사가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20년대부터 많은 역사 논설을 저술하고 발표하였는데 한국사회의 기원을 탐구한 《불함문화론》이 대표적이며 그밖에도 많은 역사 기사와 답사기를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역사가로서의 육당은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탐구하여 확립하는 데 중요한 공적을 남겼다.
2) 최남선이 젊은 나이에 일본에서 인쇄기를 구입해서 출판사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부친의 도움 덕분이었다. 부친 최헌규(1859-1933)는 중인 출신으로 잡과에 합격하여 관상감의 관리로 일하다가 퇴직한 후 약재 도매상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서울 여러 곳에 80여 채의 가옥과 전답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니 대단한 재력가였던 셈이다. 최헌규의 재력은 둘째 아들 남선의 근대문화 사업에 대거 투입되었는데 신문관 설립을 위해 남선에게 7만원을 주었다고 하며, 후일 남선이 《시대일보》를 창간하여 운영하면서 진 큰 빚도 결국 최헌규의 재산으로 변제되었다.
최헌규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첫째 아들은 창선昌善, 둘째가 남선, 셋째가 두선斗善이다. 창선은 동생이 운영하던 신문관의 사장 노릇을 하였다. 셋째 두선(1894-1974)은 독일로 유학,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또 후일 박정희 정권에서는 국무총리를 맡기도 한 인물이다. 창선은 아들이 없어 남선의 장남인 한인(漢因, 1915-1952)을 양자로 입양하였다. 남선이 형님에게 아들을 빼앗긴 셈인데, 당시에는 장자를 통해 집안이 계승된다는 관념 때문에 장자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최한인은 경성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서울의대 교수로 재직하다 한국전쟁기에 부산에서 병사하였다. 한인에게는 학주學柱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1941년생으로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공대에 진학하여 엔지니어가 되었다. 최학주는 20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여러 제약회사에서 일하다가 2005년에 은퇴하였다. 은퇴한 최학주가 쓴 책이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이다.

3) 최학주는 어린 시절 우이동 집에서 최남선과 함께 살았다. 최남선의 우이동 집은 전답도 딸린 큰 집으로 육당이 저술을 하던 서실도 본채와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육당은 이 집을 ‘소원素園’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후일 가족들뿐 아니라 육당기념사업회와 강북구청이 나서서 우이동 소원을 문화재로 복원, 보존하기를 원했지만 2003년 서울시문화재위원회는 최남선의 친일활동과 더불어 가옥의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문화재지정 요청을 거부하였다.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해 있고 한쪽 구석에 육당의 고택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석만이 남아 있다. 우이동 소원은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거기에 육당이 모아 놓았던 17만 권의 장서도 모두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 우이동에서 조부 밑에서 자랐을 뿐 아니라 중고교 시절에도 조부를 자주 만났던 최학주는 다른 연구자들과는 달리 육당의 가족사에 관한 세세한 이야기들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최학주의 책은 다른 육당 연구자들의 전기와는 달리 사료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최학주에 의하면, 육당은 걸출한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는 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많은 불행을 겪었다. 남선의 장남 한인과 차남 한웅은 모두 의사가 되었지만, 3남 한검은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과를 택했다. 그는 동경제대 문학부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뒤, 당시 지식인 사회를 휩쓴 좌익열풍으로 속에 남로당에 들어가 한국전쟁 때 월북하였다. 최학주에 의하면 그는 김일성대학 교수로도 근무하였다고 한다. 이념 때문에 식구가 남북으로 갈라진 것이다. 최남선은 또 한국전쟁기에 큰딸 한옥을 잃었다. 한옥은 후퇴하던 인민군에게 서울에서 학살되었고 의사였던 사위는 인민군에 의해 이북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4)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은 손자로서 조부에 관해 쓴 책이라서 그런지 육당의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제대로 서술하지 않았다. 육당은 1949년 2월 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수감되었던 중 〈자열서自列書〉라는 글을 써서 재판부에 제출하였다. 최학주의 책에도 이 글이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최남선이 지은 일종의 반성문이자 자기변명서인 셈이다. 최남선은 1928년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조선사편수회에 촉탁으로 들어가게 된다. 촉탁은 정식직원이 아닌 계약직 혹은 임시직을 뜻하는데, 그가 조선사편수회에 편수위원으로 들어간 것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3·1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여 그 때문에 2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으며, 또 고대사 연구를 통해 민족정신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온 그가 친일분자로 변절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단군조선의 역사를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하던 《조선사》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 일본인 위원들과 갈등을 빚기까지 하였다. 그는 몇 년 전에 《시대일보》 경영으로 큰 재정적 손실을 보아 돈이 필요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사편수회 같은 기관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것인데, 그 때문에 반민족행위자로 지탄을 받는 것은 억울하다는 입장이었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 36권을 1938년까지 간행하였다. 이 사업이 완성될 무렵 조선총독부는 최남선을 총독부 자문기관 중추원 참의로 임명하였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한 역할에 대한 포상의 성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육당은 자신이 중추원 참의로 임용되었지만 그 회의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다고 한다. 최남선의 친일행각은 만주국의 건국대학 교수 임용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주지하다시피 만주국은 일본이 1932년에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 세운 괴뢰국이었다. 실제로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의 영향 아래 있었다. 관동군은 조선의 대표라는 명목을 내세워 최남선에게 건국대학 교수직을 주선하였다. 교수로 부임한 육당은 만몽문화사滿蒙文化史 강의를 하는 한편 역사답사도 많이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41년 12월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건국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육당의 말에 따르면 전쟁발발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일본인들이 자신을 교수직에서 내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귀국하기 전부터 그는 친일단체인 ‘흥아보국단興亞保國團’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일본을 지지하는 글을 썼다. 일본의 대동아권을 인도까지 넓혀야 한다고 하면서 대동아전쟁을 ‘신시대 신문화의 창조 운동이며 세계 역사의 개조’로 찬양하였다. 그는 또 조선의 청년학도들에게 학병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하는 강연을 하고, 그런 취지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글을 쓰기도 하였다. 최남선은 「자열서」에서 이러한 학병참전 권유 활동이 일본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 변명하였지만 친일활동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속되어 한 달간 복역한 뒤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에 의해 반민특위가 해산되는 바람에 실질적인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5) 반민특위가 출범한 1948년 9월 즈음 최남선이나 이광수 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책들은 학교 교과서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최남선이 쓴 책이 아니면 강의를 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실제로 최남선이 쓴 역사서들은 많이 판매되었다. 육당이 쓴 《아시조선兒時朝鮮》(1927), 《조선역사》(1931), 《고사통古事通》(1943) 등은 모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삼중당에서 발간한 《고사통》은 3만부가 넘게 필렸다고 한다. 최남선은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기를 누린 역사가였던 셈이다.
6) 최남선은 1924년 3월 31일 《시대일보》라는 일간지를 창간하고 사장으로서 한 동안 신문사를 경영하였다. 그런데 당시 민족지를 자부하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이미 1920년 봄에 창간되어 여론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최남선은 왜 또 하나의 신문을 만들었을까? 손자 최학주에 의하면, 당시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사이에 갈등이 심각하여 민족 내부의 분열이 심각하였던 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동시에 포용하는 신문을 발간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영자금이 부족하였던 최남선은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신문사 운영자금을 조달하려고 하였다. 그는 주식응모 과정에서 보천교 로부터 3만원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보천교에 신문사 경영권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단체인 보천교의 신문사 운영에 반대하는 신문사 직원들의 맹렬한 반발로 보천교는 결국 《시대일보》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시대일보》를 장악하려 했던 보천교의 시도는 결국 무산되었지만 신문사 설립과 운영 과정에서 최남선은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최학주에 의하면, 신문관 설립부터 《시대일보》에 이르기까지 문화사업을 위해 육당이 투입한 자금은 30만 원에 달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3백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육당은 1924년 9월 《시대일보》 사장직에서 사임함으로써 신문사 경영을 실패로 마감하였다. 그러나 최학주에 따르면, 이는 육당의 삶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언론인으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학자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육당은 《불함문화론》(1925)을 시작으로 지리산 답사기 《심춘순례》(1925), 고대사 논문 〈단군론〉(1926), 〈아시조선〉(1926), 《백두산 근참기》(1926), 시조집 《백팔번뇌》(1926), 〈삼국유사해제〉(1927), 북방 샤머니즘을 다룬 〈살만교차기薩滿敎箚記〉(1927), 《시조유취》(1928), 〈조선유람가〉(1928), 〈단군과 삼황오제〉(1928) 등을 쉼 없이 발표하였다.
최학주의 전기에 붙은 부제 ‘근대의 터를 닦고 길을 내다’가 보여주듯 확실히 육당은 한국 근대화의 선구적 인물이었다. 친일행적에도 불구하고, 근대문화 운동의 선구자이자 단군조선 연구의 선구자로서 그가 이룬 큰 공덕을 인정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학자로서의 육당이 남긴 변명 한마디를 소개한다.
“지조냐 학자이냐 나의 양자 중 그 일을 골라잡아야 하게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고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여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임도 내가 잘 안다.” (〈자열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