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상생칼럼으로 마크 S. G. 디츠코프스키의 『The Doctrine of Vibration』을 읽었습니다. 책의 일곱 장을 차례로 따르지 않고, 무엇이 진동하는가, 그 진동을 언제 붙잡는가, 붙잡으려면 눈을 감아야 하는가라는 세 물음으로 따라갔습니다. 인용문은 필자가 영문에서 옮겼고, 번역어의 선택이 걸린 핵심 인용 네 곳에는 영어 원문을 함께 실었습니다. 본문 괄호 속 쪽수는 위에 적은 판본의 쪽수입니다. 
진동한 것은 전화기였을까, 『The Doctrine of Vibration』
왜 길게 말하는가. 스스로 겪게 될 것이다.
– 『스판다 카리카』 45송, 『The Doctrine of Vibration』 p.84에서 재인용
주머니에서 진동이 옵니다. 손이 먼저 갑니다. 꺼내 본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부재중 전화도, 새 메시지도 없습니다. 분명히 허벅지에 닿는 진동을 느꼈는데 말이에요. 우리는 전화기를 도로 넣고, 몇 분 뒤 같은 일을 또 겪습니다.
이 일에는 ‘유령 진동’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학부생 290명을 조사했더니 89퍼센트가 오지 않은 진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고 해요(Drouin 외, 「Phantom vibrations among undergraduates」, 『Computers in Human Behavior』, 2012). 드문 착각이 아닌 거죠. 그런데 이 흔한 일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이상한 데가 있습니다. 전화기는 가만히 있었어요. 그렇다면 진동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조사는 그 일이 얼마나 흔한지를 알려 줄 뿐, 무엇이 진동했는지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의 주의는 진동에 불려 나갑니다. 그런데 그 진동이 바깥에서 오는지 안에서 오는지조차 우리는 잘 가리지 못합니다. 이 물음을 한동안 열어 두려 해요. 천 년 전 카슈미르에, ‘진동’이라는 낱말 하나로 의식과 세계를 설명하려 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와 책
마크 S. G. 디츠코프스키(Mark S. G. Dyczkowski)의 『The Doctrine of Vibration: An Analysis of the Doctrines and Practices of Kashmir Shaivism』은 「SUNY 카슈미르 샤이비즘 총서」에 든 책으로, 판권면의 저작권 표기는 1987년 뉴욕주립대학교입니다. 이 글이 읽은 것은 1989년 델리의 모틸랄 바나르시다스가 낸 인도판 초판입니다. 우리말 번역본은 확인하지 못했고, 아래 인용문은 모두 제가 영문에서 옮긴 것입니다. 번역어의 선택이 걸린 핵심 인용 네 곳에는 영어 원문을 함께 싣고, 나머지는 우리말만 실었습니다. 저자는 감사의 말에서 이 책을 옥스퍼드에서 연구하고 썼으며, 그 전에 인도에서 고피나트 카비라지의 제자에게 카슈미르 샤이바 문헌을 처음 배웠다고 밝힙니다.
책이 다루는 것은 9세기 카슈미르에서 시작된 스판다(spanda) 학파입니다. 스판다는 산스크리트어이고 저자는 이를 vibration으로 옮깁니다. 이 글은 그 말을 ‘진동’으로 받되, 저자가 번갈아 쓰는 pulse와 throb, 곧 맥동과 고동의 뜻이 함께 들어 있는 말로 읽겠습니다. 시작의 장면은 이렇게 전해집니다. 후대의 주석가 크셰마라자가 전하는 바로는, 9세기 전반 바수굽타라는 수행자가 꿈에서 시바의 계시를 받습니다. 카슈미르의 마하데바 산에 온 인류를 위한 전언이 숨어 있다는 것이었어요. 일러 준 곳에 가 보니 바위 하나에 여든 남짓한 짧은 경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p.21). 이것이 『시바 수트라』이고, 그 가르침을 쉰한 개의 게송으로 간추린 것이 『스판다 카리카』입니다(pp.21-22). 저자도 이 이야기를 사실로 단정하지 않고 전승으로 옮깁니다.

책에서 가장 자주 불려 나오는 이름은 그보다 한 세기 반쯤 뒤의 아비나바굽타(Abhinavagupta)입니다. 예순 편이 넘는 저술을 남겼고(p.10) 궁정에는 몸을 두지 않았습니다(p.15). 책에는 그를 본 사람의 기록이 하나 실려 있어요. 남인도에서 카슈미르까지 온 늙은 떠돌이 고행자 마두라자가 송가를 지었는데, 거기서 아비나바굽타는 아직 젊은 모습으로, 여러 교단의 스승들과 여성 수행자들이 모인 큰 회중 한가운데에 앉아 있습니다(p.11). 뒤에 나올 크셰마라자가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입니다.
이 글은 책의 일곱 장을 차례로 따라가지 않으려 합니다. 주머니 속의 진동에서 생긴 물음 셋을 들고 책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무엇이 진동하는가, 그 진동을 언제 붙잡는가, 붙잡으려면 눈을 감아야 하는가.
첫째 물음. 무엇이 진동하는가
- 움직이지 않는 진동
책 제목의 ‘vibration’을 보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좋은 파동, 높은 주파수, 에너지 같은 말들이에요. 만물이 저마다의 진동수로 울리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책을 펴면, 3장에서 뜻밖의 정의를 만나게 됩니다. 아비나바굽타의 말입니다.
By ‘vibration’ (spandana) [we mean] subtle movement. It is subtle [in the sense that] although it moves not, it manifests as motion.
‘진동’(spandana)이란 미세한 움직임[을 뜻한다]. 미세하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움직임으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 아비나바굽타, 『The Doctrine of Vibration』 p.81에서 재인용
움직이지 않는 움직임이라니요. 저는 이 대목에서 한참 멈췄습니다. 저자의 풀이는 이렇습니다. 움직임이란 보통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가는 일인데, 이 학파에서는 모든 것이 의식이므로 오고 갈 두 점이 따로 없습니다(p.81). 그러니 스판다는 공기나 줄이 떠는 물리적 진동을 가리키는 말일 수가 없어요. 저자는 서론에서 스판다를 절대의 “저절로 일어나고 되풀이되는 맥동”이라 부르고, 그것이 밖으로는 우주의 온갖 것이 일어나고 가라앉는 리듬으로, 안으로는 의식이 알고 행하는 힘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p.24). 품이 아주 넓은 말이에요. 이 글은 그 가운데 우리가 겪어 볼 수 있는 한 모습, 곧 의식이 안에 머물다 대상을 향해 나가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드나듦을 붙들고 읽으려 합니다.
그렇게 미세한 것을 어떻게 알아본다는 걸까요. 책에는 음악을 오래 들은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비나의 줄에서 빠르게 이어지는 가락을 들으면서도 그는 미세한 음의 높낮이를 가려낸다는 거예요. 잘 닦인 수행자도 그와 같이, 갖가지 현상이 눈앞에 나타나 있는 채로 실재의 하나됨을 가려낸다고 합니다(p.41). 제게는 진동을 아는 일도 그렇게 귀가 트이는 일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주머니 속의 일로 돌아가 볼까요. 전화기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진동은 느껴졌습니다. 책이 유령 진동을 설명해 준다는 말은 아닙니다. 심리학의 일과 천 년 전 수행 전통의 말을 한 줄에 세울 수는 없어요. 다만 제게는 그 흔한 착각이, 이 낯선 정의로 들어가는 문이 되어 주었습니다.
- 구경꾼이 아닌 의식
저자가 1장에서 맞은편에 세우는 것은 샹카라의 아드바이타 베단타입니다. 그 배경인 상키야와 마찬가지로 의식을 가만히 지켜보는 목격자로 그리는 전통이에요(pp.34-35). 샹카라에게 실재의 기준은 변하지 않음이고, 변하는 세계는 밧줄 위에 잘못 덧씌운 뱀의 모습과 같습니다(p.36). 카슈미르의 샤이바들은 여기에 맞섭니다. 의식은 “수동적인 목격자가 아니다”(p.45)라고 하고, 크셰마라자는 한 걸음 더 나가 최고의 실재가 움직임 없는 것이라면 “그분의 본성은 스스로에 갇힌 정지일 것이고, 그렇다면 신이 아닐 것이다”(p.45)라고까지 말합니다.
의식이 일을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비나바굽타가 든 금 항아리의 예가 있습니다.
우울하여 [세상에 자기에게 값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그 항아리를 보면, ‘있다’는 나타남만을 지각한다. (중략) 물을 길으려는 사람은 ‘항아리’라는 나타남을, 어딘가로 가져갔다가 도로 가져올 것이 필요할 뿐인 사람은 ‘물건’이라는 나타남을, 돈을 바라는 사람은 ‘금’이라는 나타남을, 보기 좋은 것을 바라는 사람은 ‘빛남’이라는 나타남을, 단단한 것을 찾는 사람은 ‘굳음’이라는 나타남을 [지각한다].
– 아비나바굽타, 『The Doctrine of Vibration』 p.56에서 재인용
항아리는 하나인데 여섯 사람이 본 것은 여섯 가지입니다. 보는 일이 받아 적는 일이었다면 이럴 수가 없겠지요. 보는 쪽에서 무언가가 먼저 나갔고, 그 바람의 꼴대로 대상이 떠올랐습니다. 같은 알림음을 떠올려 보면 쉽습니다. 합격 통보를 기다리는 취업 준비생, 택배를 기다리는 사람, 독촉 문자가 두려운 사람에게 그 소리는 같은 소리가 아니에요. 울리기도 전에 이미 저마다의 것으로 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세계를 마음이 지어낸 헛것으로 본 것은 아니었어요. 저자가 거듭 힘주어 말하는 대목입니다. 책이 끌어오는 비유로는 사탕수수 즙을 졸이면 당밀이 되고 황설탕이 되고 사탕이 되지만 단맛은 그대로이듯, 의식은 굳어서 물질의 꼴을 띠고도 의식이기를 그치지 않습니다(p.50). 돌에도 의식의 자취가 있다는 말까지 나와요(p.50).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뜻은 분명합니다. 이 학파에서 세계는 의식이 스스로 굳어 보인 얼굴입니다.
그래서 이 학파가 말하는 자유의 방향도 다릅니다. 저자의 요약으로는 베단타의 길이 무엇 ‘에서’ 벗어나는 자유라면, 카슈미르의 ‘새 길’은 무엇을 ‘할’ 자유입니다(p.39). 세계에서 물러나는 대신 세계가 나타나는 그 일에 깨어서 함께하는 쪽이에요. 우리의 하루에서 그 ‘일’에 가장 가까이 가 볼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요?
둘째 물음. 언제 붙잡는가
- 주먹을 쥐기 직전
진동이 의식의 드나듦이라면, 그것은 늘 일어나고 있을 테니 따로 붙잡을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책은 뜻밖에 때를 일러 줍니다. 『스판다 카리카』의 한 게송이에요.
Spanda is stable in that state one enters when extremely angry, extremely excited, running or wondering what to do.
몹시 화가 났거나 몹시 들떴을 때, 달리고 있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들어서게 되는 그 상태에 스판다는 굳건히 있다.
– 『스판다 카리카』 22송, 『The Doctrine of Vibration』 p.94에서 재인용
수행의 때라고 하면 우리는 고요한 새벽을 떠올립니다. 이 게송이 꼽는 것은 정반대의 순간들이에요. 화가 치밀 때, 겁이 나 달아날 때, 머릿속이 하얘질 때입니다. 저자의 설명을 따르면 이런 순간에는 흩어져 있던 마음과 감각의 힘이 한꺼번에 안으로 당겨집니다. 놀란 거북이 팔다리를 움츠리듯이요(p.93). 보통 사람은 그 힘의 물살에 떠밀려 가고, 깨어 있는 수행자는 바로 그 세기를 딛고 제 본바탕에 닿는다고 책은 말합니다(pp.93-94).
붙잡을 곳은 그 가운데서도 맨 처음입니다. 9세기 말의 사상가 소마난다는 이렇게 일러요. “펼친 손가락을 오므려 주먹을 쥘 때, 그 동작의 첫머리에서 [가벼운]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다”(p.93). 주먹이 다 쥐어진 뒤는 늦고, 쥐려는 뜻이 막 일어서는 그 찰나입니다. 게송에 붙은 옛 풀이는 더 자세합니다. 겁에 질려 달릴 때조차 발을 들려는 바람, 드는 힘, 디딜 곳을 향하는 주의, 내딛는 동작을 하나하나 알아차리라고 하고, 신나게 이야기할 때는 말소리가 만들어지는 마디마디를, 악기를 탈 때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지켜보라고 합니다(p.94).
왜 하필 처음일까요. 책은 밥 짓는 일을 예로 듭니다. 밥을 짓는 데 드는 동작은 여럿이어도 ‘내가 밥을 짓는다’는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이어집니다(p.91). 그 뜻이 가장 또렷한 때는 손이 움직이기 전, 무엇을 하겠다는 마음이 막 선 순간이에요. 여기서부터는 제 짐작입니다. 일이 시작되면 우리는 손에 든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뜻은 동작 뒤로 숨는 것 같아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예는 아마 이런 순간일 거예요. 단체 대화방에서 속을 긁는 말을 읽습니다. 엄지가 자판 위로 갑니다. 문장이 만들어지기 전, 무어라도 쏘아 주려는 뜻이 먼저 일어섭니다. 그 뜻에는 아직 낱말이 없어요. 책이 가리키는 곳이 거기입니다. 답장을 다 쓰고 ‘보내기’를 누른 뒤에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이미 굳은 주먹입니다.
- 생각과 생각 사이
화나고 놀란 순간만이 문은 아닙니다. 가장 조용한 문은 생각과 생각 사이에 나 있어요.
The expansion of consciousness that takes place when one is engaged in a single thought should be known to be the source from whence another arises. One should experience that for oneself!
한 생각에 몰두해 있을 때 일어나는 의식의 펼쳐짐이 곧 다른 생각이 솟아나는 근원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겪어 보아야 한다!
– 『스판다 카리카』 41송, 『The Doctrine of Vibration』 p.153에서 재인용
점심 메뉴를 떠올리다가 어느새 밀린 보고서를 걱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지요. 앞 생각이 끝나고 뒤 생각이 시작된 그 이음매를 우리는 본 적이 없습니다. 게송은 그 이음매가 비어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저자의 풀이로는, 내버려 둔 주의는 한 대상에서 다음 대상으로 저절로 옮겨 가는데, 옮겨 가려면 어떤 생각의 꼴도 띠지 않은 맨 알아차림을 한 번은 지나야 합니다(p.153).
책이 인용하는 옛 문헌 하나는 이것을 천에 견줍니다. 본디 흰 천은 한 번 물들고 나면, 다시 희어지지 않고서는 다른 빛깔로 물들 수 없다는 거예요(p.183). 붉은 생각에서 푸른 생각으로 건너가는 사이에, 의식은 제 흰빛을 한 번 드러냅니다. 저자는 여기에 단서를 답니다. 게송이 말하는 의식의 펼쳐짐은 이따금 왔다 가는 일이 아니고, 의식은 늘 펼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p.153). 흰빛은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물든 동안에도 천은 그 천입니다. 사이는 그것이 우리 눈에 드러나는 자리일 뿐입니다.
그 자리를 우리는 왜 번번이 놓칠까요. 책의 답은 무지입니다. 세계는 그 한가운데에서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는 대상의 세계가 한가운데에서 끊긴 것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p.183). 저는 여기에 다른 장에서 읽은 비유 하나를 보태 보았습니다. 저자는 마음(manas)의 일을 조각가의 끌에 견줍니다. 끌이 돌덩이에서 쓸모없는 부분을 쳐 내어 상을 드러내듯, 마음은 쏟아져 들어오는 감각 가운데 지금 쓸모 있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쳐 냅니다. 이 일이 없다면 음악회장에서 듣는 연주와 멀리서 나는 희미한 소리가 같은 세기로 들릴 거라고 해요(p.135). 마음은 고마운 일꾼입니다. 그런데 쓸모를 가리느라 쉬지 않는 그 끌이, 생각과 생각 사이의 틈마저 쓸모없는 것으로 쳐 내고 지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걱정이 하나 생깁니다. 그 틈을 보려면 결국 세상을 등지고 눈을 감고 앉아야 할 것만 같습니다.
셋째 물음. 눈을 감아야 하는가
- 눈을 뜬 채로
많은 수행 전통이 감각을 단속하라고 가르칩니다. 눈과 귀는 마음을 밖으로 끌고 나가는 도둑이라는 거죠. 이 책에서 가장 뜻밖이었던 대목은 그 반대의 말이었습니다. 저자는 스판다의 가르침이 감각을 속박의 뿌리로 보지 않으며, 감각이 처음에는 깨달음의 수단이 되고 끝에는 해탈의 지복 그 자체라고 본다고 정리합니다(p.147). 10세기의 시인이자 철학자 우트팔라데바의 기도가 그 증거로 나와요.
제 감각의 활동이 쏟아져 나와 저마다의 대상에 가 닿게 하소서. 주여, 당신과 하나인 기쁨을 한순간이라도, 조금이라도 잃을 만큼 제가 경솔하지 않게 하소서.
– 우트팔라데바, 『The Doctrine of Vibration』 p.147에서 재인용
보고 듣기를 그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마음껏 보고 듣되 그 한가운데서 놓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예요. 책은 조건을 분명히 답니다. 이 수행자는 쾌락주의자가 아닙니다. 즐거움은 마음의 움직임이 잠깐 멎을 때 주체가 누리는 쉼이며, 그러니 대상을 좇지 말고 그 쉼의 근원에 주의를 두라는 것입니다(p.147). 저자 자신의 문장도 하나 옮겨 둡니다. “경이는 삶의 본질이다. 경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돌처럼 죽어 있고 무감각한 것이다”(p.149).
이 태도를 한 자세로 줄인 구절이 있습니다. 크셰마라자가 출처를 알 수 없는 탄트라에서 끌어온 것이에요.
겨눔은 안에 두고 바깥을 바라보며, 눈은 뜨지도 감지도 않는다. 이것이 모든 탄트라에 비밀로 감추어진 바이라바의 무드라이다.
– 크셰마라자가 인용한 탄트라, 『The Doctrine of Vibration』 p.158에서 재인용
눈을 감고 안으로 들어가는 몰입과 눈을 뜨고 세계로 나오는 몰입이 있고, 둘을 번갈아 오가다 마침내 한가운데에서 둘을 함께 쥐는 것이 이 학파가 그리는 완성입니다(pp.157-158). 그래서 진동의 교의에서 참된 해탈은 살아서 얻는 해탈뿐입니다(p.167).

이 길이 쉽다는 말은 책 어디에도 없습니다. 마지막 장에는 ‘떨어진다’는 말이 여러 번 나와요. 깊은 몰입에 들었던 수행자도 거기서 나올 때 알아차림을 놓치면 다시 생각이 지어낸 꿈같은 세계로 떨어지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누구나 오르내림을 겪는다는 것입니다(pp.207-208, 216). 그때 붙들 것으로 책이 꼽는 것은 하나, 주의(avadhāna)입니다. 떨어졌으면 낮은 데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그 낮은 자리도 적혀 있어요. 좋은 밥을 먹고 난 뒤의 흐뭇함, 좋은 음악을 들을 때의 기쁨 같은 순간에, 그 기쁨을 가져다준 것 대신 기쁨을 느끼고 있는 의식 쪽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p.217).
퇴근길 지하철에서 이어폰으로 듣던 노래의 한 소절이 문득 가슴에 닿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곧장 그 노래를 다시 틀지요. 책의 권고는 다시 틀기 전의 한 박자에 있습니다. 방금 무엇이 열렸는지를, 눈을 뜬 채로 한 번 보는 일이에요.
책은 삶 전체를 연극에 견주기도 합니다. 시바는 줄거리를 쓰는 시인이면서 모든 배역을 맡는 참나이고, 무대는 마음이며, 감각은 관객입니다(p.149). 관객은 무대에 뛰어들지 않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봅니다. 하루 종일 무대 위에서 제 배역에 쫓기는 우리에게도, 노래 한 소절이 닿는 그때만큼은 객석이 열려 있습니다.
이 책을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세 가지는 적어 두어야 합니다.
첫째, 이 책의 스판다는 누구의 스판다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서술이 크셰마라자의 주석을 따른다고 밝히고(p.22), 그 주석이 원래의 가르침에 없던 것을 얹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습니다. 후대 주석가들은 진동의 주체로 ‘우주적 나’를 세웠는데, 그들이 게송 속에서 찾아낸 그것이 실제로 거기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p.27). 7장의 뼈대인 수행의 분류는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네 갈래 가운데 셋은 옛 경전에 정의되어 있지만, 아비나바굽타 이전에 누가 그것을 해석의 틀로 썼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분류가 앞선 문헌의 수행을 잘 설명하며, 스판다 수행에 맞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라는 변호가 뒤따릅니다(p.171). 우리가 이 책에서 읽는 것은 9세기의 게송 위에 200년 뒤의 종합이 겹치고, 그것을 20세기의 학자가 다시 체계로 엮은 것이에요. 역사적 차이는 따로 낼 번역집으로 미루어져 있습니다(pp.22-23).
둘째, 이 가르침이 놓였던 자리입니다. 저자는 서론에서 이 전통의 어두운 쪽을 길게 적습니다. 역사가 칼하나는 이 계통의 스승들을 거의 기록하지 않았고, 시인 크셰멘드라는 탄트라 의례를 빙자한 방탕을 풍자했습니다(pp.14-16). 아비나바굽타 스스로도 자기 체계를 따를 자격이 있는 사람은 하나 찾기도 어렵다고 했고(p.14), 저자 역시 이 가르침이 영적으로 둔한 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씁니다(p.163). 감각을 긍정하는 길은 그만큼 쉽게 변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책에는 수행자가 병과 늙음에서 벗어나고 무엇이든 뜻대로 한다는 서술도 여러 번 나옵니다(pp.154-155). 이는 문헌의 주장을 저자가 옮긴 것이며, 이 글에서도 그렇게만 읽었습니다.

셋째, 낱말의 문제입니다. ‘vibration’은 스판다의 번역어이고, 저자 자신도 pulse, throb, pulsation을 섞어 씁니다. 이 글의 ‘진동’은 그 영어를 제가 다시 옮긴 말이에요. 주머니 속 전화기의 진동과 스판다를 한 낱말로 이은 것은 책의 논지가 아니라 저의 연상입니다. 아비나바굽타의 정의대로라면 스판다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틈도 있습니다.
마치며
책을 덮고도 남는 구절은 진동의 정의가 아니었습니다. 의식의 빛을 알아본 사람에게 무엇이 달라지는가에 관한 아비나바굽타의 말이에요. 저자는 빛과 진동이 같은 체험을 가리키는 두 상징이라고 합니다(pp.62-63).
[This] Bliss is not like the intoxication of wine or that of riches, nor similar to union with the beloved. The manifestation of the light of consciousness is not like the ray of light from a lamp, sun or moon. When one frees oneself from accumulated multiplicity, the state of bliss is like that of putting down a burden; the manifestation of the Light is like the acquiring of a lost treasure, the domain of universal non-duality.
[이] 지복은 술이나 재물에 취한 것과 같지 않고, 사랑하는 이와 하나 되는 것과도 비슷하지 않다. 의식의 빛이 드러나는 것은 등불이나 해나 달의 빛줄기와 같지 않다. 쌓여 온 여럿됨에서 풀려날 때, 지복의 상태는 짐을 내려놓는 것과 같고, 빛의 드러남은 잃었던 보물을 얻는 것과 같으니, 온전한 둘 아님의 자리이다.
– 아비나바굽타, 『The Doctrine of Vibration』 p.62에서 재인용
짐을 내려놓는 기쁨, 잃었던 것을 되찾는 기쁨이라고 합니다. 새로 얻은 것은 없다는 뜻이겠지요. 오지 않은 진동에 손이 가던 우리는 내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기다림이 조금 다르게 보여요. 진동하고 있던 쪽이 나였다면, 기다리던 것도 바깥에 있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오늘도 주머니에서는 진동이 올 겁니다. 정말로 울린 것이든, 울리지 않은 것이든요. 손이 가기 전의 그 한순간, 주먹이 쥐어지기 직전의 그 자리를 우리는 한 번쯤 알아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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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S. G. Dyczkowski, 『The Doctrine of Vibration: An Analysis of the Doctrines and Practices of Kashmir Shaivism』,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7. 우리말 번역본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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