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고요함을 사랑하노라[我愛其靜]
– 3. 한 가지에서 피어난 두 꽃의 향기처럼
고요함에 대한 지난 2번의 논의로 하이데거가 말하려는 것에 어느 정도 친숙해졌기를 기대한다. 그렇다면 이후 논의에서 더 풍부하고 깊은 사유거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 숙고했던 시원의 사상가 파르메니데스는 다음과 같은 권고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대는 모든 것을 경험해야 한다. 둥글게 펼쳐진 비은폐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또한 비은폐된 것에 대한 신뢰 가능성이 결여된 죽을 자들의 의견을.”(Zur Sache des Denkens)
하이데거는 이 얘기에서 “둥글게 펼쳐진 비은폐의 동요되지 않는 중심”에 대해 이렇게 말함으로써 고요함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비은폐의 동요되지 않는 중심]은 … 비은폐 자체를 의미하며, 비은폐가 비로소 허용해주는 것을 자신 안에 불러 모으는 고요함[Stille]의 장소를 가리킨다. 그 곳은 밝게 트임의 장(die Lichtung)이다.”(Zur Sache des Denkens) 존재의 비은폐가 허락되는, 아니 비은폐 자체인 밝게 트임의 장은 둥글게 열리는데, 그곳에 비은폐에서 내준 것을 불러 모으는 고요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 사태 안으로 더 들어서야 한다.
우선 하이데거는 비은폐에서 수락된 것을 현존現存(Anwesen)이라 말한다. “밝게 트임 안에는 현존이 고요히 머물고 있다(beruhen).”(Zur Sache des Denkens)라는 것이다. 여기서 현존은 본래적 존재 혹은 존재의 본질로서 은닉과 숨김에서 환히 열리며 우리 가까이 이르는 존재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들은 그 밝음에서 비로소 각자의 고유함으로서 존재한다. 또한 하이데거는 현존이 서구 초기의 그리스인들이 이해한 존재의 시원적 의미라고 밝힌다. 그에 따르면 ‘anwesen’에서 ‘wesen’은 고독일어 ‘wesan’인데, 이것은 ‘währen’과 같은 말로서 ‘머무르다’, ‘머물며 체류함’을 뜻한다. 그리고 희랍어 ‘para’에 해당하는 ‘an’은 ‘여기, 이리 가까이’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여기에, 이미 곁에 와 머묾(schon bei wesen)’인 ‘para’는 현존하는 것이 대상으로서 우리들 인간에게 향해 온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은폐로 나타남이란 의미의 가까움”(Was heißt Denken?)을 말한다. 환히 밝히며 도래하는 머묾을 ‘가까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존재의 시원적이며 본래적 의미인 현존이 이와 같이 밝혀짐에 따라, ‘비은폐의 중심인 밝게 트임의 장에 고요함’이 있다는 하이데거의 말은 다음의 사태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존재는 은닉으로부터 스스로 열어 밝히면서 혹은 스스로를 내주면서 둥글게 트이고 그 개현의 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감싸 안아 고유하게 현존하게 하는 탈은폐에서 고요함이 생기한다. 현존이 허락되는 밝게 트임의 장에 고요함이 깃든다는 것이다. 탈은폐와 고요함이란 “한 가지에서 피어난 벚꽃과 매화꽃이 서로 어우러져 향기를 품어내는 것”(Unterwegs zur Sprache)과도 같다. 인용 구절은 일본의 옛 시에서 노래한 것인데, 하이데거는 존재의 탈은폐가 생기하는 폭과 고요함이 서로 어울려 현성함을 그와 같이 사유한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Gelassenheit에서는 밝게 트임의 장을 ‘사역(Gegnet)’이라고 부른다. 즉 둥근 원으로 밝게 트이는 존재의 탈은폐는 이번에는 사역으로써 열리는 사태로서 사유되는 것이다. ‘사역’은 ‘영역’이나 ‘개방된 여지’를 뜻하는 독일어 ‘Gegend’의 고어古語로서 밖으로 트이는 존재 발현의 영역적 성격이 보다 두드러지는 개념이다. 사방으로 밝게 열리는 이 영역은 「사물」 강연 등에서는 ‘세계 사방’(Gevierte)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세계 사방’은 하늘, 땅, 인간, 신적인 것들이 하나로 화동和同하며 펼쳐지는 존재 진리의 ‘마당’이다.
하이데거는 이 사역 안에서 그것을 통해 고요함이 생기하고 그 가운데 사역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울리며 그 자신으로 자유롭게 돌아간다고 밝힌다. 사역은 “사물을 그 자체에서 사물로서 머물게 한다.”(Gelassenheit) 노자의 말로 옮기면, “온갖 것 번성하나 각기 그 근본으로 돌아감”이 고요함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같은 사역의 존재하게 함을 “마법”(Zauber)(Gelassenheit)이라 표현한다. 사역의 ‘매직’은 사물을 처음으로 무에서 낳는 것도, 작용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물을 사물로서, 즉 다른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서 현전現前하게 하는 것이다. 사역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각각의 것을 각각의 것으로 그리고 모든 것이 서로 어울려 그 자체 안에 고요히 깃들도록 불러 모은다.”(Gelassenheit)
유비적으로 말하면 존재 발현의 장인 사역은 마치 스스로 어둠으로 물러나면서 별들[존재자 전체]을 빛나게 하고 가까이 모으는 밤과 같은 것이다. 사역, 즉 사방으로 혹은 둥글게 펼쳐지는 존재 진리는 그 펼침의 동안(Weile)과 폭(Weite)에 모든 것이 그 자체로서 현성하며 고요 속에 잠기도록 불러 모아 감싸는 것이다. 사역은 “고요히 머묾의 폭으로 체류하고 자유롭게 자신으로 돌아감의 때로 펼쳐진다.”(Gelassenheit) 즉 사역은 시간적이며[동안; 때] 공간적인[폭] 시공간이다. 이때의 시간은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하듯 ‘지금’의 연속이 아니며, 공간 또한 뉴턴(Newton)식의 물리적 공간(space-container)과 같은 것일 수 없다.
또한 사역은 하나의 존재자인 인간을 그의 본질로 돌아가 고요히 머물게 한다. 그러나 이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사역으로써 자신을 열어 밝히는 존재는 그것이 발현인 한, 그 밝음이 일어나는, 혹은 그것을 담을 개방성을 필요로 한다. 존재가 저의 본질인 발현으로 현성하기 위해 쓰이는 열린 장은 인간의 사유다. 인간의 본질은 사유로써 존재의 부름에 응대하는 데 있다. “인간의 특출함은 그가 사유하는 본질로서 존재에 열려 있고, 존재 앞에 세워져 있으며, 존재에 관련된 채 머물면서 그렇게 존재에 상응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본래 이 상응(Entsprechung)의 관련으로 있으며, 다만 그것이다.”(Identität und Differenz)
그리고 존재의 고유함이란 발현, 즉 자신을 환히 밝히며 우리 가까이 현존하는 것이기에 사유의 응대는 그리로 마음을 모아 향하는 동시에 물러나면서 스스로를 개방하여 열린 자리에 존재를 맞아들이는 방식으로써 이뤄진다. 인간 사유가 존재 발현이 생기하는 ‘궁전’이고 ‘그릇’인 셈이다.
존재의 소환에 대한 응답으로서 일어나는 이 사유는 존재를 표상적으로 혹은 초월론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의 사유와 다른 평면에 놓여 있다. 후자에 비하면 ‘또 다른 시원’에 기반한 새로운, ‘또 다른 사유’이다. 그것은 어떤 이론적, 실천적 결과도 작용도 갖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유란 단지 존재에 대한 ‘숙고(Andenken)’일 뿐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존재에 의해 그것의 진리를 지키도록 던져졌고 그것을 위해 요구되었기에 존재에 속하면서 존재를 사유한다. 그러한 사유는 어떤 결과도 작용도 갖지 않는다.”(Über den Humanismus) 그것은 다만 뒤로 물러서며 그리로 향함으로써 둥글게, 사방으로 펼쳐지는 존재 발현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여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작용하려 하고 현실성을 그의 요소로서 의욕하는”(Gelassenheit)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다.
나아가 하이데거는 사역을 다루는 곳에서 존재에 대한 상응을 우리를 향해 밝게 트이는 사역에 우리를 내맡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유의 본질은 “사역을 향한 내맡김에 들어섬”(Gelassenheit) 이다. 내맡김은 어떤 대상도 갖지 않는 것으로서 사역을 위해 스스로를 개방하여 그 자리에 사역이 현성하도록 하는 “기다림”(Gelassenheit)과 같은 것이다.
이에 따라 존재가 발현, 비은폐 등 자신의 참됨으로 머물기 위한 필요에서 인간의 사유를 그 현성의 장으로서 삼는 일은 인간의 편에서는 ‘존재에 대한 상응’이라는 자신의 본질을 얻는 길이다. 다시 말해 사역은 자신의 진리를 위해 인간의 응대를 필요로 하고 동시에 인간은 그렇게 사역의 요구에 기꺼이 응함으로써 이윽고 자기 본질로 자유롭게 해방돼 고요함을 얻게 된다. 하이데거에게 진정한 자유란 그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유는 어떤 주어진 시간에 그 자신의 방식으로 탈은폐가 시작되는”(Basic Writings) 영역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존재 발현의 장으로 쓰임으로써 제 고유함을 얻는 것은 “자유로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해방만이 자유의 본질이다.”(Grundbergriffe) 그리고 여기서 진정한 안식이 가능하다. “[인간이] 자신을 바침은 존재가 그의 진리를 위해 인간을 자기의 것으로 요구하는 일어남의 본질에서 편안하다(heimisch).”(Was ist Metaphysik?) 그러기에 발현이 번성蕃盛하는 시공간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고 죽는’ 곳이다.
인도의 영성적 사유는 그것이 참나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참나를 깨닫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고요함이다. 성경에서도 ‘고요하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라고 말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냥 있는 것이지, 이것 혹은 저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길은 ‘고요하라’로 요약된다. 참나는 그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다.’를 경험하는 것은 고요히 있는 것이다.”(『불멸의 의식』); “보는 자가 보는 것 속에 보이는 것과 하나가 되는 경험은 삼매의 토대이다.”(I AM THAT) 이 대목에서 우리는 왜 하이데거를 인도 사유나 선불교, 신비주의 등과 비교하는 시도가 되풀이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하이데거는 심지어 ‘명상적 사상가(meditativer Denker)’로 불리기도 하며,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사유, 숙고는 영어권에서 ‘명상적 사유(meditative thinking)’ 또는 ‘명상(meditation)’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또 Parvis Emad와 Thomas Kalary는 하이데거의 저서 『숙고(Besinnung)』를 영어로 옮기면서 제목을 ‘Mindfullness‘라 달았다.
하이데거와 인도 사유의 비교를 가장 먼저 시도했던 카푸토(Caputo, John D.)는 선불교,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하이데거 사이의 공명共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선禪에서 자아는 전적으로 에고와 의지가 없어질 때 ‘사토리’에 든다. 하이데거에서는 현존재가 존재의 진리, 즉 발현에 들어선다. 그리하여 현존재는 진리의 발현을 위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밝게 트임의 열림과 관련을 맺으면서 ‘삿토리’, 즉 깨달음의 상태에 이른다. 영혼이 가장 내적인 기반(Seelengrund; Eckhart)으로 들어가고 선에서 자아가 불성佛性, 혹은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존재는 발현 안에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가장 고유한 본질에 들어선다.”(The Mystical Element in Heidegger’s Thought)
사역과 인간 사유의 본질인 내맡김은 사역은 인간을 향해 밝게 트이고 인간은 그리로 자신을 바치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속한다. 그리고 그 함께 속함에서 각기 고유함, 즉 발현과 그것을 지키는 이웃, 목자牧者에 이르게 된다. 더불어 사역, 즉 존재 발현이 펼쳐지는 ‘동안[時間]’ 그리고 그 ‘폭[空間]’에서 인간 이외의 사물 역시 사물로서 고유하게 현전한다. 다시 밤의 유비로 말하면, “별들을 점점 더 아름답게 반짝이고 경탄스럽게 하는 밤으로”(Gelassenheit) 깊이 들어서는 인간 본질의 응대에서 밤은 하나로 모으며 그것들을 빛나게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역 내지 존재 발현의 시공간을 중심으로 사역도, 사물도 고유함으로 머물고 인간 역시 본질로 정주하며 마침내 자유와 안식을 얻는다. 사역은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울리며 각기 제 본질에 이르는 회역會域의 장인 셈이다. 이와 같이 사역에 속하는 모든 것이 서로 불러 모여 저의 고유함에 깃드는 것이 고요함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역의 ‘마법’이다.
‘사유에서 머무르는 것은 길이다.’ 하이데거가 그의 말대로 존재 사유의 한 길을 가면서 길목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풍광 속에서도 끊임없이 응시한 것은, 한 가지에 피어난 두 꽃의 향기처럼, 존재의 탈은폐와 하나로 어우러진 고요함이었다. 고요함이 머물고 그 속에서 자유와 안식, 풍요로운 존립이 허락되는 존재 진리의 터전이 우리가 지상에서 본래적으로 정주定住할 가능성이 열리는 고향이며 ‘또 다른 시원’일 터다. 하이데거는 우리를 향해 그리로 눈짓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를 ‘귀향歸鄕의 사상가’로 부르는 편이 더욱 온당할 것이다.